122화.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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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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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함박눈
2022.12.29.
재희가 무혁의 품에서 벗어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무혁은 그답지 않게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처음 본 그의 모습에 재희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무혁이 헛기침을 하더니 가만히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어떤 거예요?”
“우선 들어가서 얘기해.”
무혁이 재희를 단숨에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재희가 그의 목에 매달렸다.
무혁은 한쪽 팔로 재희를 안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을 모두 주워들고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무혁이 조심스럽게 재희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무혁 씨. 저기 봐요.”
재희가 가리킨 식탁에는 경자가 정성껏 차려놓은 음식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재희가 만든 거야?”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무혁의 말에 다행히도 재희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임신 사실을 안 아주머니께서 축하한다며 저렇게 차려주셨어요.”
재희가 수줍게 말하며 웃음 지었다.
“어디 아픈 곳이나 불편한 곳은.”
무혁은 전보다 더 신경 써서 재희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를 가졌으니 혹시라도 몸이 안 좋은 건 아닌지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걱정 말아요. 무혁 씨. 의사 선생님이 아무 이상 없대요. 아직 초기니까 몸조심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병원에 혼자 갔어?”
“아니요. 아주머니께서 같이 가주셨어요. 저보다 더 기뻐하시더라고요.”
친정엄마가 계셨다면 아마 경자와 같은 반응이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무혁 씨. 저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요.”
한참 얘기하던 재희가 힐끗, 무혁이 한쪽에 둔 쇼핑백에 시선을 두었다.
무혁이 쇼핑백에 담겨있던 꽃다발을 꺼내자 재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까 바닥에 떨어졌지만, 어디 하나 상한 곳 없이 싱싱하고 풍성한 꽃다발이었다.
거기다 재희가 좋아하는 꽃으로 만들어진 꽃다발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했다.
“임신 축하선물이야.”
“고마워요. 이렇게 큰 꽃다발은 처음 받아봐요.”
덤덤하지만 진심이 담긴 무혁의 말에 재희는 과할 정도로 풍성한 꽃다발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그게 끝이 아닌지 무혁이 쇼핑백 안에서 뭔가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민트색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재희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열어 봐.”
재희는 꽃다발을 옆에 내려놓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아.”
상자 속을 확인한 재희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아기 신발 한 켤레와 재희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알고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선물에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혁은 고개를 저으며 상자를 든 재희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반은 짐작이었어.”
무슨 말인지 재희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혁이 금세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노을 서점에서 꿈을 꿨어.”
“꿈?”
“미셸이 화백과 화해하고, 우리 둘이 다락방에서 잤던 그 날에 종조부께서 나오셨어.”
“아.”
그날이라면 재희 역시 알고 있었다.
그날 재희 역시 서점 할아버지에게서 아기호랑이를 선물로 받는 꿈을 꿨었다.
같은 날에 무혁도 같은 꿈을 꾸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점 할아버지는 무혁에게 아기 호랑이를 안겨주었다.
그러곤 잘 지내야 한다며, 그 한마디를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했다. 이윽고 무혁은 똑같은 아기 호랑이를 안고 웃고 있는 재희의 모습을 보았고 곧 잠에서 깨어났다.
“그럼…….”
“처음엔 태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럼 어떻게 안 거예요?”
“재희, 네가 잠이 많아졌으니까.”
무혁은 임신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재희가 유독 잠이 많아지자 어렴풋하게 임신 초기에는 잠이 많아진다는 걸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도 만약 임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했으려고요."
"상관없어. 임신이 아니었어도."
재희가 할 말이 있다며 빨리 들어오라고 했을 때, 무혁은 직감했다.
막상 재희의 입으로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아서, 무혁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말조차 하지 못했다.
재희는 상자 안에 담긴 아기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산 아기 신발과 비슷한 디자인의 앙증맞은 신발. 누구도 아닌 무혁에게 아기 신발을 선물 받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던 재희는 지금 아니면 다시 꺼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아이, 생겨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지.”
무혁의 목소리가 굳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희가 무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일전에 제가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무혁 씨 그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해요?”
재희가 뭘 말하는지 눈치챈 무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재희는 아이를 가진 지금도 그때 제 반응을 기억하고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재희 네가 걱정되어서였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무혁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재희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
“그럼 그때 왜 그랬어요?”
“난 재희 네가 힘든 걸 원치 않아.”
“그래서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 거예요?”
“그래.”
“내가 고생할까 봐?”
“누가 뭐래도 내게 있어선 재희 네가 가장 중요해.”
그때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무혁의 진심을 알 수가 없어 상처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을 들은 지금, 재희는 마음이 간질간질해 졌다.
무혁은 아이를 가지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이 아이를 바랐다. 다만, 무혁은 아이보단 재희가 더 우선이었을 뿐이었다.
“무혁 씨랑 나의 아이를 가지는 건데 힘들 리가요.”
그의 진심을 알게 되자 재희는 가만히 무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너무 기뻐요. 무혁 씨.”
저와 같은 꿈을 꾸고 티조차 내지 않았는데도 임신일까 봐 먼저 선물을 챙겨주는 무혁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무혁 씨. 하나 더 말해줄 게 있어요.”
아이를 가진 것도 기쁘지만, 아이가 생긴 시기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재희는 이 이야기를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무혁에게 말해줄 생각이었지만, 지금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소중한 남편의 마음에 응하고 싶었으므로.
“이 아이. 무혁 씨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에 우리에게 온 아이예요.”
산부인과에서 주수를 확인했을 때, 재희는 놀라서 얼마간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말해주듯, 아이는 기적처럼 출장에서 돌아온 무혁과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찾아왔다.
다른 장소도 아닌 무혁과 재희의 소중한 노을 서점에서 찾아온 소중한 아이.
“다른 곳도 아닌 노을 서점에 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온 아기예요. 그러니까 저 소중하게 키울 거예요.”
무혁은 스스로 다짐하듯 말하는 재희를 번쩍 안아 들고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결연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재희의 눈꼬리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무혁이 말했다.
“함께해. 재희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을 거니까.”
“응. 우리 둘이서.”
사락.
거실 창에 새하얀 눈송이가 톡 떨어졌다.
재희가 작게 탄성을 지르자 무혁의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처음엔 한두 송이로 시작한 눈송이는 이내 함박눈이 되어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무혁은 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재희가 함박눈을 보지 못하도록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재희는 가만히 손으로 무혁을 잡으며 고개 저었다.
“전 괜찮아요.”
“…….”
“눈 내리는 거 보고 싶어요.”
재희는 가만히 내리는 눈을 눈동자에 담으며 읊조렸다.
“눈이 내릴 때마다 싫은 일만 겪어서 보기 힘들었는데 참 이상하죠.”
보는 것도 모자라 타박, 재희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도시의 야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눈이 더 이상 싫지 않아요. 이 아이가 좋은 기억을 갖게 해줬으니까요.”
무혁이 뒤에서 가만히 재희를 끌어안았다.
재희가 살짝 돌아보자 무혁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를 보는 재희의 눈동자에는 눈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두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맑고 단단했다.
“목걸이 제 선물이죠? 걸어줘요.”
무혁이 목걸이를 가져오자 재희가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었다.
무혁은 하얀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만히 입술을 내려 입을 맞췄다.
재희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으나 무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혁 씨. 장난하지 말고요.”
재희가 가볍게 타박하자 그제야 무혁이 입술을 뗐다.
무혁이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세공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무혁은 조심스러워 했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거실 조명에 예쁘게 반짝였다.
재희는 가만히 손으로 목걸이를 매만졌다.
“예뻐요. 오늘 너무 좋은 일만 생겨서 기쁘고……. 너무 행복해요.”
무혁이 허리에 팔을 두르며 가만히 끌어안자 재희는 편하게 남편에게 기댔다.
든든하고 너른 품과 익숙하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남편과 함께 보는, 눈이 내리는 야경은 아름답고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다.
재희는 더 이상 눈이 싫지 않았다.
* * *
며칠 후.
무혁은 휴가까지 내어 재희와 함께 병원에 방문했다. 재희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무혁이 혼자 보낼 수 없다며 고집부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여기 보이시죠? 이게 아기집이고 여기 이 작은 콩같이 보이는 게 아기예요.”
무혁의 시선은 내내 초음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재희의 손을 꼭 쥐고 있었는데, 아기집을 신기한 눈으로 보던 재희는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보다 더 긴장한 듯 무혁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뒤 재희는 거의 강제로 침대에 눕혀졌다. 아직 날이 춥고 병원까지 다녀왔으니 무리하지 말라는 무혁의 걱정 때문이었다.
재희 곁에 앉은 무혁의 시선은 내내 초음파 사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같이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던 재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신기해요?”
“이렇게 작은 아기가 배 속에 있다는 게 안 믿어져.”
“저도 그래요. 아직 티도 나지 않는데 이 아이가 조금씩 자랄 거란 게.”
“가끔 이게 정말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
무혁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재희는 가만히 무혁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조만간 평창동에 방문해야 할 것 같아요. 부모님도 이 사실을 아셔야 하니까요.”
“그럴 필요 없어.”
무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 말 들었잖아. 거기까지 어떻게 가.”
“…… 그 정도는 움직여도 괜찮아요.”
“날이 추워. 같은 거리를 이동할 거라면 부모님을 초대하면 돼.”
“그래도 어떻게 시부모님을 오라 가라 해요.”
“재희가 더 중요하니까.”
무혁은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건강에만 신경 써.”
무혁이 고집을 피우자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아무리 말해도 무혁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재희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