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태몽 (120/128)


#120화. 태몽
2022.12.22.


세라의 짐은 호텔에서 장독수의 집으로 옮겨졌다.

장독수의 집은 2층 주택이었는데, 정원이 넓고 예뻐서 도화가 꼭 마음에 들어 했다.

심지어 프랑스 집보다 멋지다며 여기서 살고 싶다며 조르기까지 했다. 내심 도화가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던 세라는 안도하였다.

장독수와 미셸의 관계가 알려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혜란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당사자 입에서 직접 듣자 놀라워하면서도 이제야 그 귀한 손녀딸을 소개해 주냐며 가볍게 타박하는 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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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정말 좁다니까.”

이 한마디만 남기고.

이제 노을 서점은 몇몇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로 세라, 도화, 그리고 케빈 때문이었다.

도화가 조르는 바람에 세라와 케빈은 노을 서점에 거의 매일 들렀다.

도화는 노을 서점 곳곳을 탐험하다가 질리면 자기 몸통만 한 책을 펼쳐놓고 읽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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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인가요?”

재희의 질문에 세라는 대답 대신 도화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곤 케빈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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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프랑스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정리하려고 해요.”

재희가 힐끗 케빈에게 시선을 던졌다.

재희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케빈이 신경 쓰였다.

그런 재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라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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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시회가 끝나면 앞으로 라윤 갤러리와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고민도 해 봐야 하고요.”

그 말인즉 다음 전시회도 라윤 갤러리와 함께하겠다는 뜻이었다.

재희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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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그 전에 먼저.”

재희가 케빈을 향해 눈짓을 하자, 세라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재희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는 듯 세라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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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도화가 다락방에 장난감 어질러 놨던데 치워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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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같이가요.”

무혁이 먼저 일어나며 손을 내밀자 재희가 싱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도화는 노을 서점 곳곳을 탐험하다 발견한 다락방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곧잘 그곳에 제 장난감을 가져다 놓기 바빴다. 세라가 난색을 표했지만, 재희의 눈에는 도화가 마치 다람쥐 같아서 귀엽게만 보였다.

무혁과 재희가 자리를 비우자 세라가 케빈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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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앞으로 한국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거야.”

어떤 주저함도 없이 본론과 결론부터 꺼내는 세라를 보며 케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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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케빈 너랑 같이 일할 거야. 거처만 옮기는 것뿐이고 에이전시와의 계약은 유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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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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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케빈을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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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이 제멋대로인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조금은 망설이는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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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해’라고 말하려던 세라의 입이 다물어진 건 그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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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가 비자를 발급받을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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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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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에이전트의 소중한 화가이신데 보스가 잘도 너 혼자 보내겠다. 당연히 나도 보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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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너도 한국에 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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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전담 매니저인 거 잊었어? 5년을 같이 일했는데 설마 혼자 여기서 살 생각이었어?”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케빈을 보던 세라가 피식 웃었다.

케빈이 아까부터 말이 없었던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처럼 크게 웃는 법이 없는 세라였기에, 케빈은 그 웃음이 상당히 기뻐하는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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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날 감당 가능한 건 케빈 너뿐이지. 나도 새 매니저를 구하기 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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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끔찍하게 들리지만, 좋게 봐줬다니 다행이네.”

댓 발 튀어나와 있던 케빈의 입이 슬며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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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겨울에 시작된 전시회는 1월에 종료되었다.

연일 성황리에 진행되던 전시회는 라윤 갤러리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었고, 곧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갤러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거기다 앞으로 한국에서 열리게 될 미셸의 전시회는 라윤 갤러리가 독점하게 되었다.

미셸이 속한 에이전시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 역시 많았는데, 미셸의 소개로 라윤 갤러리는 에이전시와도 협약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재희 역시 자리했다. 덕분에 기사나 방송에서 신재희라는 이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무혁이 진행했던 두바이 초고층 빌딩 역시 첫 삽을 뜬 뒤 공사가 진행되면서 커다란 화제를 일으켰다.

역시 국내외 유명 언론사에서 빌딩 건설 건을 다루기 바빴다. 이로써 무혁 역시 KJ 건설 후계자로 단단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라윤 갤러리의 차기 관장과 KJ 건설 차기 대표가 부부인 것이 알려지자 그 역시 화제가 되었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도 나서길 부담스러워하는 재희를 혜란이 대신했다.

덕분에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애정 어린 극성이라는 기사가 올라가기도 했었다.

그런 정신없고 바쁜 날을 뒤로한 채 재희와 무혁은 가지런하게 심겨 있는 여러 그루의 나무 중 한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찾은 산은 KJ 그룹 소유의 선산이었다.

재희는 무릎을 굽혀 나무 밑에 세워진 비석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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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왔어요. 할아버지.”

서점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가만히 보며 추억에 잠겨 있던 재희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바로 옆에는 조금 더 오래된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재희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서점 할아버지가 평생 사랑했던 부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었다.

항상 부인을 입에 올릴 때마다 인자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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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할아버지께서 사랑하시던 분이시니 분명 좋은 분이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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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부를 미워했던 할아버지셨지만, 종조모께서는 심성이 고운 분이라고 말씀하셨어.”

가족인 형을 외면하고 여자를 선택한 놈이라며 욕을 했지만, 그 부인은 심성만큼은 고왔다며 한탄하곤 했었다. 당시 무혁은 서점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할머니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혁 역시 재희와 결혼하기 위해 많은 걸 걸었고, 재희를 얻어낸 지금은 서점 할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다.

강직한 성격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강진이 곧잘 얘기했지만, 어쩌면 서점 할아버지의 성정을 가장 많이 닮은 건 무혁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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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그만 가자. 추워.”

무혁이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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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우리 여기 자주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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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집으로 가기 전, 무혁과 재희는 자연스럽게 노을 서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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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말이 맞아요.”

무혁이 가져다준 따뜻한 차를 받아들며 문득 재희가 말했다.

무혁의 시선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재희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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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할머님이랑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무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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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희를 생각하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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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엔 아니라면서요.”

재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무혁이 옆에 앉으며 가만히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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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종조모님께 실컷 자랑하셨을 수도 있지. 우리 손자며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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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요.”

재희가 웃으며 고개 젓자, 무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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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부께서 언젠가 하신 말씀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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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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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네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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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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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재희 네가 행복하길 바라셨어. 그러니 오늘 가장 크게 기뻐하셨을 거야.”

선산에 가면서 무혁은 재희의 기분을 살폈다. 혹시라도 재희가 후회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막상 선산에 갔을 때 재희에게서 슬픔이나 후회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밝아 보였다. 서점 할아버지가 가장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이었다.

재희는 찻물을 가만히 보다, 이윽고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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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그거 알아요? 할아버지께서 제게 한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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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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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점에 와줘서 고맙다고요. 그리고 무혁 씨와 친구 해 줘서 고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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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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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하고 말도 없는 녀석이 저랑 있을 때 유일하게 말이 많아진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게 참 좋다고요.”

언젠가 서점 할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서점 할아버지도 가끔 무혁의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런 무혁이 유일하게 말을 조금 많이 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재희가 서점에 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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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무혁 씨도 서점 할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었을지도 몰라요. 내색은 하지 않으셨겠지만요.”

무혁은 찻물이 남아 있는 컵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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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갖다두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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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 그래요.”

무혁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재희의 뺨에 한번 입 맞춘 뒤 다 마신 잔을 갖다 두기 위해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낡은 나무 계단이 무혁의 발걸음을 따라 음악 계단처럼 일정한 소리를 내었다. 문득 무혁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칠이 벗겨진 오래되고 낡은 소파. 그곳은 서점 할아버지가 늘 신문을 읽고 계시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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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이다.”

서점 할아버지가 문득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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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게 온 것이 나의 큰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무혁은 서점 할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이 노을 서점에서 유일하게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 존재가 바로 무혁과 재희였다.

어쩌면 당신이 눈을 감으면 노을 서점이 사라질 것을, 다시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걱정하셨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무혁이어서, 재희여서 그 자체로 좋아하셨을지도 몰랐다. 이젠 서점 할아버지의 의중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무혁의 곁에 재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혁은 잔을 갖다둔 뒤 다시 다락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희가 있는 다락방에.

* * *

재희는 문득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제 몸은 노을 서점이지만, 노을 서점이 아닌 곳에 누워 있었다.

분명 노을 서점 다락방이었다. 무혁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다 잠든 그 다락방.

그런데 왜인지 지금 누워 있는 이 다락방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기묘한 느낌에 재희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까슬한 무언가가 재희의 뺨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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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슬한 감촉에 화들짝 놀란 재희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제 뺨을 핥은 범인을 본 재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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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커다랗고 하얀 아기호랑이가 꼬리로 다소곳하게 모은 두툼한 앞발을 감싼 채 재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여웠지만, 재희는 왜 다락방에 백호가 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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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니? 어디서 온 거야?”

재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아기호랑이가 머리를 비볐다. 북슬북슬한 감촉과 귀여운 아기호랑이의 외모에 긴장했던 재희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다락방에 왜 아기호랑이가 있는지, 이젠 그런 의문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왠지 호랑이를 안아야 할 것 같은 강한 충동에 재희가 조심스럽게 품 안에 끌어안았다.

발버둥 칠 줄 알았던 아기호랑이는 고르릉 소리를 내며 품 안에서 편한 자세까지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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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성격 한번 급하구나.”

아기호랑이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하던 재희는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리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곳에는 중절모를 쓴 서점 할아버지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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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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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구나. 재희야. 잘 지냈느냐.”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재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서점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계셨다. 그것도 모자라 성큼 재희에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서점 할아버지는 눈물까지 글썽인 채 저를 보는 재희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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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해왔고 애썼다.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우리 재희 장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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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때 할아버지를 만나서, 무혁 씨를 만나서 다행이었어요.”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에게 우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 재희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서점 할아버지는 마치 아이를 쓰다듬듯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점 할아버지의 시선이 재희의 품에서 능청을 떠는 아기호랑이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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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잘해온 재희에게 이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왔는데, 이 녀석 성격이 급해서 말이다. 앞으로 좀 고생하겠지만, 재희라면 잘해 낼 거다. 거기에 무혁이까지 있으니까 말이다.”

서점 할아버지는 인자한 눈으로 재희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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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와주어서 고마웠다. 재희야. 난 항상 널 사랑했었단다.”

재희는 이게 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늘 서점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지금 아니면 영영 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재희는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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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 친할아버지처럼 사랑했어요.”

서점 할아버지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서점 할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서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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