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화해
(119/128)
119화.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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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화해
2022.12.19.
전시회는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뤘다.
언론의 관심은 물론 다녀온 관람객 평점도 높았다. 혜란은 인터뷰를 통해 재희를 칭찬했다. 거기에 재희와 미셸의 특별한 인연이 기사에 실리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뜨거웠다.
라윤 갤러리 관장과 KJ 그룹 회장의 며느리인 재희와 얼굴 없는 화가 미셸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전시회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덕분에 표는 물론 도록과 굿즈도 미친 듯이 팔려나갔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시간의 텀을 두고 관람하도록 변경해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라윤 갤러리 50주년에 걸맞은 성공적인 전시회였다.
덕분에 혜란의 얼굴에서는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성황리에 첫날 전시회가 마무리될 즈음, 마지막 관람객이 조용히 전시장에 들어섰다.
혜란의 지시로 전시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풍을 바꿨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알던 세라의 화풍과 지금 전시된 작품들의 화풍은 정반대였지만, 마지막 관람객인 장독수는 천천히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했다.
테마별로 이루어진 작품을 하나하나 관람하던 장독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바로 미공개 작품 5점이 전시된 [겨울, 그리고 봄] 테마였다.
미공개 작품을 전시한 공간인 만큼 그 어느 전시장보다 더 특별해 보였다.
“이건.”
[겨울, 그리고 봄] 테마에 걸린 작품을 본 장독수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장독수가 아는 세라의 초창기 화풍이었다.
“미셸이 처음 프랑스에 건너가 그린 작품입니다.”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장독수가 몸을 돌렸다.
그곳엔 정장을 입은 세라가 서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장독수가 가만히 응시하자 일일 도슨트가 된 세라가 입을 열었다.
“거의 초창기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미숙하고, 좀 더 날것 그대로가 표현되어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미셸에게 아주 특별한 작품입니다.”
장독수가 모르는 사랑하는 손녀딸의 이야기.
장독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말했다.
“…… 좀 더 이야기 해주겠나.”
“이혼하는 문제로 미셸은 사랑하는 할머니와 크게 다툰 뒤로 한국을 떠났죠.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정착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미셸은 프랑스에서 배 속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혼할 때 받은 돈은 있지만, 미셸은 앞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야 해서 그때부터 붓을 다시 손에 쥐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처음엔 자리 잡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붓을 놓으려고 했죠. 사실 잠깐 나쁜 생각도 했었고요.”
부모님도, 할머니도 없는 프랑스에서 미셸 혼자 자력으로 살기엔 상당히 벅찼었다.
돈은 충분했지만 타국에서의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편했을 테지만, 미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배 속의 아이를 번듯하게 키워내어 할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하지만 자리를 잡기 위해 바쁘게 살다 보니 할머니에게 연락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도화가 태어났고 미셸은 그때 그 감정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내내 겨울이었던 마음에 봄이 피어난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아 기뻤으니까요. 이 작품 5점을 완성한 뒤부터 발표한 작품마다 널리 알려지면서 지금의 미셸이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마친 세라가 장독수를 돌아봤다.
“하지만 갑자기 미셸이 낳은 아이는 아팠어요. 아주 많이.”
“…….”
“그 아이를 병간호하며 살다 보니,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그대로 굳어져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요.”
“그러니. 지금은 그 아이는 어떠니. 건강하니?”
“다행히도요. 특히 병원에 있을 때 신재희 씨가 그린 일러스트가 실린 동화책을 좋아했는데, 일러스트를 좋아해서 매일 베개 아래에 숨겨두고 잘 정도였어요. 지금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건강해졌어요.”
“……다행이구나.”
안도한 듯 장독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도화가 많이 아팠었다는 말과, 손녀딸이 겪었을 고된 시간에 마음이 아팠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더 세월의 흔적이 짙어졌지만, 여전히 장독수는 세라에게 있어 사랑하는 할머니였다. 세라가 가라앉은 눈으로 장독수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제게 한 말이 있었어요”
“어떤 건지 물어도 되나.”
“딱 너 같은 딸을 낳아봐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 그랬지. 그래서?”
세라가 사고를 칠 때마다 장독수가 장난스럽게 타박하던 소리였다.
“정말 저 같은 딸이 태어났어요.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아이가.”
세라가 그림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래서 더 잘 알 것 같았어요. 그때 할머니가 왜 제 이혼을 반대했는지. 정말 사랑했기에 부모를 잃은 손녀가 더 힘들어질까 봐 무서우셨던 거예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할머니가 반대했지만 세라가 원해서 한 결혼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한다는 소리를 차마 할 수 없어서 세라는 성격 차이로 이혼하고 싶다고 했고, 속사정을 몰랐던 장독수는 반대했었다.
부모를 일찍 잃은 손녀딸이 겨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지나 했는데, 다시 가족을 잃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장독수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격 차이라면 조금 더 맞춰서 살아보라고 장독수는 설득했었다.
그러자 세라는, 정말 저를 생각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화를 냈었다.
그때 남편의 바람과 손버릇으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던 세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이 되어줄 거로 생각한 할머니가 반대하자 더 큰 상처를 입었었다.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그때 당시 세라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한 결혼인데 실패했다는 걸 미셸은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미셸은 할머니의 마음보단 자신의 마음이 더 우선이었던 거에요. 어리석었죠.”
“…….”
“돌아가기엔 그때 패인 감정의 골은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장독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세라를 응시했다.
세라가 기억하는 고집스럽고 단단한 할머니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지금 미셸은 무슨 마음인가.”
“미셸은 한국으로 돌아올 거예요.”
“…….”
“그런데 좀처럼 마음에 드는 화실을 구할 수 없다면서, 장독수 화백의 화실을 같이 쓰고 싶다고 해요.”
“그런가.”
“그리고.”
세라가 발개진 눈으로 장독수를 보며 말했다.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
“어제 모진 말을 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때 할머니를 원망했던 마음도, 그렇게 도망치듯 할머니에게서 벗어난 것도 모두.”
“세라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지난 8년간 제가 할머니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사과하고 싶어요.”
“…….”
“전시회를 라윤 갤러리에서 연 것은 재희 씨 때문이기도 했지만, 할머니 때문이기도 했어요. 얼굴 없는 화가 미셸이 굳이 얼굴을 드러낸 이유도 모두 다.”
장독수는 세라를 잠시 보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5월의 연회 때 매화와 벚꽃을 겹쳐 겨울과 봄을 표현한 작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세라가 태어날 땐 겨울이었다. 그때 장독수는 겨울이었지만, 세상이 봄으로 가득 찬 기분이 들 만큼 갓 태어난 손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미셸은 아직도 어리구나.”
“…….”
“미셸은 도화가 미운 짓 하면 밉더냐?”
망설임 없이 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도화가 아무리 떼를 쓰고 힘들게 해도 미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 역시 그렇다네. 사랑하는 손녀딸이 돌아온다는데 내치는 할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
“손녀가 아무리 미운 짓 해도 이 할머니 눈에는 사랑스러운 손녀일 뿐이야. 그러니 그 손녀도 이 할머니 마음을 헤아려 주면 안 되겠나.”
세라의 눈가가 발개졌다. 장독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라는 알고 있었다.
“저 왔어요. 할머니.”
다녀왔다는 인사에 장독수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랜 여행을 다녀왔으니 이제 이 할머니에게 그 이야기 좀 들려주련?”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어제처럼 내 증손녀를 데리고 가버리면 좀 원망스러워질 것 같기도 하구나.”
너스레를 떠는 장독수를 보던 세라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다행히 그 증손녀가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못 하겠네요.”
한결 풀린 세라의 말에 장독수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화실에 이젤을 두 개 더 가져다 놔야겠구나. 큰 거랑 아이용으로.”
휑한 작업실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해질 생각을 하니 장독수는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은, 기분 좋은 아릿함이었다.
* * *
세라와 장독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라가 해외로 나가버린 뒤 장독수는 손녀사위의 바람과 폭력을 알게 되었고,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녀의 편을 들어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었다.
일 년 뒤 전남편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들은 세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신기하도록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우리 예쁜 증손녀는 어딨는가.”
“노을 서점에서 놀고 있을 거예요.”
“퍽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좀처럼 나오려 하질 않네요.”
“뭐 하나 마음에 들면 그곳에 집중하는 게 딱 네 성격이구나.”
“그 정돈 아니에요.”
“아니긴. 딱 어렸을 때 너란다.”
전시회장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무혁과 함께 서 있던 재희가 보였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니 잘 풀린 것 같아서 재희는 내심 안도했다. 혹시라도 다툼이 일어날까 봐 은근히 걱정하던 차였다.
세라가 재희에게 다가와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재희 씨.”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일도 없는걸요.”
“재희 씨가 제게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전 프랑스로 다시 갔을지도 몰라요.”
재희의 말대로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장독수에게 제 진심을 전할 수 없었을 터였다.
도슨트로 장독수의 앞에 나서는 결심에서부터 원망으로 굳어진 감정을 녹여 진심을 장독수에게 전하기까지 세라는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래. 김 관장은 아무 말 없었나?”
장독수의 말에 재희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관장님께선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하셨어요.”
“김 관장도 그 성격에 참 많이 참았구만.”
“네. 그래서 화백께서도 각오하시는 게 좋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장독수가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노을 서점 앞에 도착했다.
노을 서점 안에 들어가자 한창 소파에 앉아서 그림책을 읽던 도화가 발딱 일어나 다다다 달려왔다. 그러다 장독수를 보곤 얼굴이 밝아졌다.
“어? 할머니!”
도화가 팔을 뻗으며 안기려다 세라의 눈치를 힐끗 봤다.
세라가 도화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도화야. 인사해야지. 네 할머니야.”
“할머니?”
“그래. 엄마의 할머니이니까 도화의 증조할머니시지.”
“도화 할머니 없는데.”
“이젠 생겼어.”
세라가 차근차근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잠시 혼란스러운 듯 통통한 얼굴을 찌푸리던 도화가 끙끙거리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도화도 할머니가 생긴 거지?”
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장독수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양팔을 벌렸다.
“할머니한테 오련?”
“할머니!”
도화가 스스럼없이 장독수에게 안겼다.
장독수는 이제야 마음 놓고 도화를 꼭 끌어안았다.
“노을 서점도 이제 사람으로 북적북적해지겠군.”
무혁이 노을 서점을 둘러보며 목소리로 말하자 재희가 돌아보았다.
“싫어요?”
“아니. 그간 사람이 없었던 게 이상한 거였지.”
“마지막 손님은 무혁 씨와 저였죠.”
재희가 쓰게 웃었다.
서점 할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거라 생각하니 아려오는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재희가 흘리듯 말했다.
“아이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응?”
“오랫동안 묵었던 감정이 도화로 인해 풀리는 걸 보니 문득 궁금해졌어요.”
“……아이, 가지고 싶어?”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겐 할 일이 있는걸요.”
무혁이 가만히 재희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아이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자. 재희 말대로 아직 할 일이 있으니.”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동안 도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혁 역시 한동안 그런 재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