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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세라의 부탁 (118/128)


#118화. 세라의 부탁
2022.12.15.


시간이 늦었음에도 도화가 호텔로 돌아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재희가 도화를 재운 다음에 데리고 갈 것을 권유하자 거절하려던 세라가 곧 마음을 바꿨다.


“그럼 여기서 조금 더 있다가 도화가 잠들면 데리고 갈게요.”

도화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책을 뒤적거리다가도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열심히 놀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곧 도화가 졸음으로 가물가물해진 눈을 손으로 비볐다.

그런 도화를 품에 안은 세라가 소파에 누우며 팔베개를 해주었다.

도화가 얌전히 세라의 팔을 베고 하품을 했다.

재희와 무혁, 그리고 케빈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는 여전히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었다. 낡은 건물이지만 웃풍도 없었다.

밖에 있을 땐 반갑지 않았던 칼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며 내는 둔탁한 소리조차도 겨울의 정취를 만들어내는 음악처럼 들렸다. 낡은 나무의 냄새와 훈훈한 공기에 절로 잠이 쏟아졌다.

세라는 잠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하품하며 버티는 도화를 보며 자장가 부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도화야.”

“웅?”

도화의 배를 다독이며 세라가 물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

“아니.”

의외의 대답에 배를 다독여 주던 세라의 손이 잠시 멈췄다. 도화가 엄마 품에 파고들며 하품을 하며 웅얼거렸다.


“그치만 아까 봤던 할머니는 또 보고 싶어.”

“……왜?”

“좋으니까.”

“이유도 없이?”

“아니.”

“그럼?”

“할머니가 도화를 너무 슬픈 눈으로 봤어. 가끔 엄마가 도화를 그렇게 봤거든.”

“…….”

“근데 도화 안아줄 때 따뜻했어.”

“…….”

“그래서 좋아.”

도화가 이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쌕쌕 잠들었다.

세라는 복잡한 마음에 눈을 꾹 감았다.

도화를 낳았을 땐 막막했지만 행복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도화가 쓰러지고 간호하면서 때때로 세라는 버거웠다.

그래도 한국에 가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남편이 없어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 고집으로 시작했지만 종종 힘에 부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괜찮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세라는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었다. 어떻게든 도화를 잘 키워보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했었다.

도화는 그 눈빛이 슬퍼 보였다니.

세라는 충격으로 말문이 막혔다.

도화가 완전히 잠들자 세라가 몸을 일으켜 책장을 돌아 나왔다.

재희와 무혁과 대화를 나누던 케빈이 몸을 일으켰다.


“도화 데리고 나올까.”

케빈이 묻자 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더 자게 놔둬.”

세라가 외투를 챙겨입으며 말했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도화는 제가 보고 있을게요.”

재희는 역시나 묻지 않았다. 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을 서점 문을 열고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세라의 뺨을 할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세라가 뒤따라 오는 케빈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따라와?”

“난 네 매니저니까. 무엇보다 밤거리는 위험해.”

세라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골목 몇 곳을 돌아 나오자 한 건물이 보였다.

세라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변한 게 없구나.”

장독수의 화실이 있는 건물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세라가 힐끗 옆에 선 케빈을 돌아보았다.

케빈의 성격대로라면 옆에서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케빈은 의외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세라가 기억을 더듬어 화실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때와 변한 게 없다면 비밀번호 역시 그대로일 터였다.

삐릭.

잠금장치가 쉽게 열리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세라였다.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면 세라 역시 미련 없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이 있었던 터라 이런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안 들어가?”

머뭇거리는 세라를 케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들어갈 거야.”

안으로 들어서자 노을 서점과 달리 휑하고 싸늘한 화실 내부가 보였다.

화실 한쪽에 장독수의 캔버스가 보였다. 세라가 캔버스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옛날과 화풍이 달라지긴 했지만 세라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장독수의 그림임을.


“낡았네.”

캔버스를 받쳐주는 낡은 이젤은 장독수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낡은 이젤 역시 세라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어렸던 세라는 부모님과 함께 종종 놀러 오곤 했었다.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동경하며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외국으로 나가기 전까지 세라는 이 화실에서 놀곤 했었다.


“케빈. 그거 알아? 나 여기서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

“그림 그리는 할머니 모습이 너무 멋졌거든. 나에겐 최고의 화가였어.”

세라가 손을 뻗어 이젤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런데 내가 할머니에게 화를 냈고 외면했는데도 여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마치 언제든 와도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날 미워할 법도 하실 텐데.”

장독수는 금세 질려 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젤이든 무엇이든 몇 번이나 바꾸는 성격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화실은 세라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세라가 복잡한 얼굴을 한 케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는 뜻일까.”

“세라.”

세라가 복잡한 눈으로 화실을 둘러보자 케빈이 다가왔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무슨 뜻이야?”

“한국에 온 거. 사실 할머니를 만날 생각이 있었던 거지?”

“…….”

“물론 일러스트레이터를 만나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그 목적 하나만으로 한국행을 정한 건 아닐 거야.”

“케빈.”

“5월의 연회나 전시회도 그래. 사실 너까지 참석하지 않아도 됐었어. 할머니가 라윤 갤러리랑 친분이 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어. 이미 넌 답을 정해두고 한국행을 정한 거잖아.”

“언제부터 독심술을 익혔어?”

“너랑 일한 지 오 년이 넘어가. 속 모르는 네 비위 맞춰 주려면 익혀야지.”

케빈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세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가 문득 재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진심이 닿지 못해요.”

 


‘또 뭐라고 했더라.’

 


“망설인다면 상대에게 내 진심을 전해주기까지 너무나도 힘든 일이 될 테니까요.”

 
그럴지도 몰랐다.

처음엔 할머니에게 보란 듯이 도화를 잘 키워낸 것을 보여주려 했으나, 결국 제 마음과 다르게 골이 깊게 파인 채 시간만 흐르게 되었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세라가 결심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

* * *

세라가 자리를 비운 틈에 잠든 도화의 잠자리를 살펴보고 나온 재희가 책장에 기대앉자, 무혁이 그 옆에 자리했다. 재희가 걱정되는 듯 연신 입구를 바라보았다.


“걱정돼?”

“아무래도요.”

“그럼 물어보지 그랬어.”

“세라 씨가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기다려 줄 셈이었어요. 무혁 씨가 그랬던 것처럼.”

무혁이 재희의 턱을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쥐어 제게 당겼다.

재희가 순순히 끌려오자 무혁이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통통한 입술을 보던 무혁이 갈증을 느끼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가볍게 다시 입 맞췄다.


“이번 전시회 끝나면.”

“끝나면?”

“종조부께 한번 다녀오자.”

그 말에 재희가 멈칫했다.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비밀 친구도 사라졌다. 때문에 재희는 서점 할아버지가 잠드신 곳을 알 수 없었다. 무혁이 비밀 친구임을 밝혔을 때도 서점 할아버지가 잠드신 곳을 묻지 않았다.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에 잔뜩 취해버린 탓일까. 무혁의 말을 들은 재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종조부께서는.”

죄책감으로 망설이는 재희의 말을 끊으며 무혁이 말했다.


“재희가 행복하길 바라셨어.”

“…….”

“그러니 재희가 당신을 떠올리지 못하셨어도 원망하실 분은 아니야.”

“그래도 저라도 할아버지께서 어디 계신지 물어봤어야 했었어요.”

“그때보다 밝은 얼굴로 뵙는다면 더 기뻐하실 분이야. 어쩌면.”

“어쩌면?”

“종조모님을 만나셔서 우리 생각 같은 건 안 하셨을 거야.”

그 말에 재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위로하는 방법이 많이 늘었어요. 무혁 씨.”

“재희에게만이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무혁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응. 꼭 같이 가요. 늦었지만 저도 가고 싶어요.”

무혁이 제 뺨을 감싼 재희의 손등을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 노을 서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가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겨울 공기를 털어내듯 외투를 털어내며 세라가 들어왔다.


“재희 씨. 물어볼 게 있어요.”

서두도 없는 말이었지만 재희가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독수 화백이 전시회에 오기로 했어요?”

“네. 첫날 관람 시간이 끝나면 그때 오시기로 했어요.”

이치에 맞지 않았지만 장독수였기에 혜란이 특별히 허락한 사항이었다.

아마 장독수 역시 세라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내린 결론인 듯했다.

세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도슨트도 그땐 없겠군요.”

“장독수 화백에겐 도슨트는 필요 없을 거예요.”

“재희 씨.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 어떤?”

“하루만 제가 도슨트가 되게 해주세요.”

“네?”

재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장독수 화백은 제 할머니예요. 예전에 안 좋게 헤어졌지만.”

막역하게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재희의 얼굴엔 놀란 기색은 없었다.


“한국에 오면서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사실 예상했었어요. 막상 만나니 안 좋은 말을 먼저 해버렸지만요.”

재희가 세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라면 재희 씨 말대로 진심을 전하기는 더 어려워지겠죠.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케빈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간다며 언뜻 탄식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뜻을 이해한 재희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려면 관장님의 허락이 필요해요. 분명히 관장님께서는 이유를 물어보실 거예요.”

“괜찮아요. 어차피 계속 비밀일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장독수 화백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면 더더욱.”

세라의 허락하자마자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하루, 딱 하루 도슨트를 특별히 채용했다고.”

 

* * *

다음날.

전시회 첫날 오픈하기 전 재희는 혜란에게 먼저 찾아갔다.

세라의 부탁을 말하자 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셸을 도슨트로?”

“네. 미셸이 그렇게 요청을 했어요.”

혜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드물지만 화가가 직접 도슨트를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얼굴 없는 화가로 알려진 미셸이 도슨트를 자처한 것도 모자라, 상대는 도슨트가 따로 필요 없는 장독수였다.


“이거 내가 알아도 되는 내용이니?”

둘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이미 세라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재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셸과 화백은 외할머니와 손녀 관계예요.”

그 말에 기가 막힌 듯 혜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니?”

“네. 아마 미셸도, 화백도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겠지. 미셸은 잘 모르겠지만 그 양반이 얼마나 자기 손녀딸을 아꼈는데. 그러니 손녀딸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될까 봐 나에게도 말을 안 했겠지.”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좋아. 이번 전시회 책임자는 재희 너니까 잘했겠지. 나중에 두 사람에게서 확실히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혜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재희가 웃음 지었다.

전시회 당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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