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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도화의 비밀 (115/128)


#115화. 도화의 비밀
2022.12.05.



“여기 계셨네요.”

상념에서 깨어난 장독수가 돌아보자 재희가 무혁과 함께 서 있었다.

무혁이 가볍게 인사하자 장독수가 미소지었다.


“출장 다녀온 모양이네.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화백.”

“그래. 둘이 오랜만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구만.”

“네.”

무뚝뚝한 무혁의 대답에도 장독수는 개의치 않았다.

무혁이 태어날 때부터 봐온 장독수였다.

무혁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장독수는 바쁜 혜란 대신 종종 무혁을 봤었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서 장독수는 걱정하기도 했다.

어느 여자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무혁이 유일하게 선택한 여자가 재희였다. 그래서인지 장독수는 유독 이 부부가 참 마음이 들었다.

재희가 다가오자 장독수의 시선이 다시 그림으로 향했다.

재희의 시선 역시 장독수를 따라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 멋지네요.”

“그래 보이는가.”

“네. 마치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아요.”

“그래? 자네 눈엔 그렇게 보이나?”

“네. 제가 잘 아는 사람 같아요.”

장독수는 재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눈치챘다.

하지만 재희는 그 이상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장독수 역시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나 먼저 가겠네.”

“돌아가시려고요?”

전야제 내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독수였다.

그 때문에 혜란은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나 싶어서 재희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자 장독수가 빙긋 웃었다.


“아니. 저녁에 멋진 약속을 하나 잡아놨거든. 아주 귀여운 아이랑.”

재희는 아까 마주친 도화를 떠올렸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여서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도화는 야무지게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대충 감을 잡은 재희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희가 비켜드려야겠네요.”

“그래. 김 관장에게는 잘 말해주길 바라네.”

“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한 재희가 무혁과 함께 자리를 뜨자, 장독수는 빙긋 미소지었다.

* * *

전야제는 순조롭게 흘렀다.

케빈은 전야제에 참석한 인사들을 모조리 감당하고 있었다.

케빈은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세라가 아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온 도화를 데리고 자리를 비운 덕에 케빈이 할 일은 늘었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세라는 라윤 갤러리 직원들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는 걸 원치 않았다.


‘이 자리에서 할머니를 만나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굳이 전야제까지 참석한 세라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케빈은 제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인사에게 억지로 미소 지어 보였다.

휴게실에서 도화를 훈육하고 있을 세라에 대한 원망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한편 세라는 팔짱을 낀 채 도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해봐.”

“응?”

휴게실 소파에 앉은 도화가 짧은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새침하게 눈동자를 굴렀다.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세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 갔었어?”

“그냥 구경했어.”

“그러니까 어디를 구경하느라 늦은 건지 묻잖아.”

“엄마.”

“왜.”

“도화는 감추고 싶은 게 많은 7살이야.”

세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그러니까 너무 묻지 마. 도화의 그…… 그으…… 그거어.”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지 도화가 귀엽게 찌푸리며 끙끙댔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는데 어려워서 금방 까먹은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라가 알려주었다.


“사생활.”

“응! 그거. 도화의 사생활을 너무 알려고 하지 마.”

“엄마라도?”

“응! 엄마라도.”

도화가 배까지 쏙 내밀며 단호하게 말하자 세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도화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도화는 저런 표정을 지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긴. 저 고집이 꼭 제 할머니를 닮…….’

무심결에 할머니를 생각하던 세라가 멈칫했다.


‘라윤 갤러리에 오니까 나도 모르게 약해졌나 보네.’

세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고 치지 마.”

“응!”

도화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라는 왠지 불안했다.

저녁을 먹은 뒤, 도화는 세라의 시선을 피해 장독수와 만나기로 했던 그림 앞으로 달려갔다.

세라의 시선을 피하기가 요원하지 않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진 탓에 도화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이윽고 그림 앞에 서 있는 장독수를 보자 도화의 표정이 밝아졌다.


“할머니!”

그림 앞에 서 있던 장독수의 몸이 순간 움찔 굳었다.

마치 할머니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장독수가 어색하게 돌아보았다. 도화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밥 먹고 왔어요!”

장독수가 검지로 입술에 대고 쉿, 하자 도화가 두 손으로 입을 꾹 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장독수가 가만히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은 든든히 먹고 왔어?”

빵빵해진 배를 쏙 내밀며 도화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배를 토닥 두드렸다.


“응! 많이 많이 먹고 왔어요.”

“그래. 그중에서 도화가 가장 맛있게 먹은 건 뭘까.”

도화가 자기가 먹은 음식을 줄줄이 나열했다. 장독수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듯 연신 맞장구쳐주며 도화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보다 할머니. 저 이야기해주기로 했잖아요.”

도화가 보채듯 칭얼거리자, 장독수가 안아 들려고 하다 멈췄다.

자연스럽게 안기려던 도화가, 장독수가 손을 도로 거둬가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안아줘요?”

“응?”

“도화 안아줘요.”

도화가 팔을 뻗고 칭얼거리자 장독수가 잠시 머뭇하다 안아 들었다.

도화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보들보들한 도화를 안아 든 장독수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할머니. 이야기 해줘요.”

도화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우리 도화 기다리게 했구나.”

장독수가 도화의 등을 두드리며 복잡한 감정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말이다. 할머니가 한 번도 못 본 증손주를 상상하면서 그린 그림이란다.”

“증손주? 그게 뭐예요?”

도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의 손녀가 낳은 아이를 증손주라고 한단다.”

“왜 한 번도 못 봤어요?”

순수한 도화의 질문에 장독수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손녀랑 사이가 틀어졌거든.”

“왜요?”

되묻는 도화의 머리를 장독수는 한번 쓰다듬었다.


“내내 상상하면서 그렸단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도화는 가만히 들었다.


“그 아이가 낳은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분명 이렇게 우리 도화처럼 예쁘겠지, 하고.”

프랑스로 넘어간 장독수의 손녀, 세라는 장독수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장독수가 먼저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은 닿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독수는 그것도 한때뿐이라고, 이 시기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손녀를 위해서 한 말이 오히려 사이를 갈라버린 것이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도화가 그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장독수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 그림 속 아이는 할머니 증손주예요?”

“아마도 그렇지않을까.”

“보고 싶어요?”

“그럼.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단다. 내 손녀도, 증손주도.”

 

* * *

장독수와 대화를 끝낸 도화가 타박타박 걸었다.


“장도화!”

도화를 찾던 세라가 엄한 얼굴로 다가왔다.

저녁 먹자마자 갑자기 사라진 도화를 또 내내 찾은 모양이었다.


“어디 갈 때 엄마한테 말하랬지.”

“엄마. 나도 할머니가 있어?”

뜬금없는 도화의 말에 잠시 세라가 입을 다물었다.


“응? 도화도 할머니가 있어?”

세라는 커다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도화를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있지. 하지만 도화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

“그럼 더 위 할머니는?”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냥 할머니도 도화를 많이 생각했을까 싶어서.”

한 번도 할머니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는 도화였다.

세라가 말을 해주지 않기도 했지만, 도화는 프랑스에서 친구들이 할머니와 있는 모습을 보고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도화가 한 번도 묻지 않던 할머니의 존재를 묻자 세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 누구랑 만나고 온 거야?”

도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세라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엄마도 몰라.”

도화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세라가 도화를 안아 들었다.

세라가 도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도화의 존재를 알고 계신다면 많이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정말?”

“그럼.”

“그럼 할머니도 엄마를 많이 생각했을까?”

도화의 말에 세라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도화가 세라의 품에 안겨들며 중얼거렸다.


“도화를 많이 생각했다면 엄마도 많이 생각했을 거야. 그치? 도화의 엄마니까.”

“그랬을 거야.”

세라의 말에 도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내 도화가 평상시처럼 재잘재잘 댔지만, 세라는 도화가 걸어온 방향 쪽을 연신 돌아보았다.

* * *

전야제의 자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세라는 조용해진 도화를 지켜봤다.

평소라면 공주님 성 같다면서 더 돌아다녀야 할 도화가 내내 어딘가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딘가를 연신 힐끔거리던 도화가 세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나 화장실 다녀올래.”

“엄마가 같이 가줄까?”

도화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갔다 올 거야.”

“그래. 화장실 위치 알지?”

평소라면 위험하다며 같이 갔을 세라였지만, 의외로 순순히 보내주었다.

도화가 어딘가로 다다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자 세라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약간 외진 곳의 모퉁이를 돈 도화가 누군가를 반갑게 불렀다.


“할머니!”

“도화니?”

도화를 따라 모퉁이를 돌려던 세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도화의 목소리에 대답해주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집에 안 가고 왜 여기로 왔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모퉁이 밖으로 살짝 고개를 빼고 도화가 있는 곳을 본 세라의 표정이 굳었다. 도화가 스스럼없이 장독수의 품에 안겨들고 있었다.


“집에 가기 전에 할머니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엄마는 어쩌고.”

“적당히 말하고 왔어요.”

딴에는 어른스럽게 말하는 도화가 귀엽다는 듯, 장독수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라는 찰싹 붙어 있는 도화와 자연스럽게 안고 있는 장독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내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려던 세라의 눈동자에 한 그림이 들어왔다.


‘저건.’

요정님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잠든 아기 그림.

세라는 저 그림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모를 리가 없었다.


‘나잖아.’

결혼하기 전, 장독수는 종종 세라가 아기였을 때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무엇보다 결혼선물로 장독수가 선물이라며 준 그림이었다.


‘아냐. 그 그림은 아니야.’

결혼선물로 받은 그림은 프랑스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세라가 지겹게 본 자신의 어릴 적 사진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가만히 살펴보면 도화와도 닮아 있었다.


“이거 도화 주면 안 돼요?”

“이 그림을?”

“응. 도화랑 닮았어요.”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장독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고말고.”

“정말요?”

“언젠가 태어날 증손주를 생각하며 그렸는데, 도화가 딱 할머니 증손주만 한 나이니까 가져도 된단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도화가 배시시 웃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세라가 저도 모르게 나서고 말았다.


“무슨 자격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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