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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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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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만남
2022.12.01.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
이번 전시회는 혜란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라윤 갤러리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갤러리를 최고의 자리로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 만큼 몇 년 전부터 공을 들일 정들일 정도로 혜란이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절대로 단 한 번도 전시회를 연 적이 없는 베일에 싸인 화가 미셸 영입에 진심이었다.
그런데 미셸이 라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겠다고 한 것도 모자라, 미공개 작품 5점도 선공개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그때 혜란은 환희에 휩싸여 몇 날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였다. 모두 일러스트 한 장, 아니 신재희가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미셸 전(展)을 하루 앞둔 전야제.
국내 최초 미셸 전(展)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혜란이 특별히 여는 행사로 국내외 내로라하는 학계 인사들이 초빙되었다.
“멋지군.”
당연하게도 자리에 참석한 강진이 짧게 말했다.
"당연하죠. 나랑 재희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혜란은 종일 싱글벙글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예상대로 국내외 유수의 갤러리는 물론, 평론가들마저도 진심으로 축하해 왔다.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공들이셨는데, 드디어 빛을 보시는군요.”
혜란이 자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미셸이 큰 결정을 내려주어서 감사할 뿐이죠.”
“저어, 그런데 미셸에게 잘 말해서 저도 언제 한번 대화를 하게…….”
은근히 접촉해 오는 평론가나 대형 갤러리 관장들에게 적당히 대꾸해 주던 혜란의 시선에 어두운 안색의 한 중년 여인이 걸렸다.
혜란이 라윤 갤러리를 물려받았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J 갤러리의 박명주였다.
이명규의 유작 [서리가 내린 아침]을 위작으로 몰고 라윤 갤러리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리려고 했던 박명주는 웬일인지 이 자리에 참석했다.
J 갤러리도 대형 갤러리 중 한 곳이었다. 무시할 수만은 없어서 체면치레로 혜란이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참석할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라윤 갤러리와 J 갤러리는 사이가 무척이나 나빴다.
‘하긴. 학계 인사들이 참석한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려니 마음에 걸렸겠지.’
혜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리며 곧장 J 갤러리의 박명주 관장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자리는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자리에 참석한 뒤로부터 내내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박명주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승리에 찬 혜란의 미소를 보니 속이 뒤틀렸지만 박명주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네…… 정말 멋지네요. 과연 명망 높은 라윤 갤러리다워요.”
박명주가 운영하는 J 갤러리는 이명규 옹의 작품이 위작임이 판명되자마자, 예정되어 있던 전시회의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되었다.
거기다 어떻게 그 일이 새어나갔는지 기사까지 터지는 바람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라윤 갤러리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리려다가 되려 역풍을 맞아버린 것이다. 덕분에 망신도 망신이지만 J 갤러리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뼈가 아픈데 누구나 눈독 들이는 미셸이 라윤 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니. 거기다 어디에서도 공개한 적 없는 미공개 작품을 5점씩이나! 박명주는 질투로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런 속마음과 다르게 박명주가 억지로 웃음 지었다.
“그런데 미셸은 이 자리에 참석 안 하시나 보죠.”
“아시다시피 미셸은 베일에 싸인 화가라서요. 에이전시에서만 참석했어요.”
“저런. 그렇게 미셸과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네요.”
일부러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혜란은 여유로웠다.
“라윤 갤러리는 미셸의 의사를 존중한답니다. 뭐. 전 얼굴을 알고 있지만요.”
혜란은 스스로도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일그러지는 박명주의 얼굴을 보니 괜찮았다.
거기다 혜란이 굳이 박명주에게 말을 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소개?”
“아. 저기 오네요. 재희야. 이리 오렴.”
무혁과 함께 자리에 막 참석한 재희는 혜란이 부르자 곧장 다가왔다.
혜란이 곁에 온 재희를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며 박명주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한번 본 적 있으시죠? 박 관장님 며느리가 될 뻔한 우리 재희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답니다.”
“뭐라구요?”
“미셸과 우리 재희가 참 인연이 깊었지 뭐예요. 우리 집 복덩이랍니다.”
박명주의 이가 살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란의 의도를 눈치챈 재희가 어색한 얼굴로 살짝 미소지었다.
“박 관장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박 관장님이 실컷 뛰어서 선 자리를 알아봐 주신 덕분에 정말 귀한 며느리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박명주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내 아들 선 자리를 가로챈 주제에!’
라윤 갤러리 사교 모임에서 박명주는 중간에 혜란이 맞선을 가로챈 덕분에 자기 아들은 더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했다며 비웃었었다. 그때 보인 혜란의 표정은 통쾌했다.
그런데 지금 둘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배 아프겠지. 자기 말에 고분고분하고, 자기 아들의 망나니짓을 눈감아줄 무늬뿐인 며느리가 필요했을 테니.’
최근 박명주의 아들이 폭력 사건을 일으키며 부부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다.
대놓고 말이 퍼지지 않았을 뿐이지, 알음알음 조금씩 소문은 퍼지고 있었다.
혜란이 맞선 자리를 가로채지 않았다면, 박명주 아들의 뒷감당은 재희가 감내했을 터였다.
그때 혜란은 뼈아픈 실책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자기가 중간에 맞선 자리를 가로챈 것이 행운이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즐기다 가시길 바랄게요.”
“배려 감사합니다. 김 관장님.”
안 그래도 아들의 일과 질투로 속이 뒤틀린 박명주가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그 자리를 홱 벗어났다.
“괜찮을까요?”
재희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멀어지는 박명주를 바라보았다.
J 갤러리도 결코 작은 곳이 아니었기에 재희는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혜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어느새 근사하게 차려입은 무혁이 재희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분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어.”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무혁과 혜란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하니?”
혜란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무혁을 쳐다보았다.
“누가 대답하든 상관없잖습니까.”
무혁의 말대로 박명주가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켜 봤자 박명주만 손해 볼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무혁이 중간에서 가로채자 혜란은 어이가 없었다.
“너 정말…….”
뭐라고 하려던 혜란은 무혁의 시선이 재희에게 떨어질 줄 모르니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며칠 전에 무혁이 귀국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무혁이 회사에 들르지도 않고 노을 서점에 머물면서 뒤늦게 보고한 터라, 강진이 대로했었다.
그러나 무혁이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까지 하고 왔으니 강진으로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애틋할 만도 하지.’
무엇에도 덤덤하기만 했던 무혁이 유일하게 집착하는 재희였다.
결혼 전부터 일만 하다가 이제 겨우 여유가 생겼는데,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어떻게 모를까. 사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무혁은 애가 탈 것이었다.
혜란이 주변을 둘러보곤 재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미셸은?”
“도화가 갤러리 안이 너무 예쁘다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나 봐요. 내내 도화를 쫓아다니고 있어요.”
“그 아이는 여기가 마음에 드나 보구나.”
혜란은 해맑게 웃는 도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공주님 성에 온 것 같대요.”
“그래. 알았다. 어차피 여기서 미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별일 없겠지.”
“네. 전야제 시작 전엔 돌아온다고 했어요.”
5월의 연회가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미셸의 미공개 작품 5점 역시 테마가 겨울이었다. 계절에 맞는 테마여서 국내에서도 관심도가 높았다.
혜란은 이번 전시회가 부디 무사히 마무리되길 바랐다.
* * *
“도화야. 장도화.”
세라가 도화를 불렀지만 쪼르르 어디론가로 신나게 달려간 도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국에 온 뒤로 도화는 부쩍 신이나 보였다. 거기다 라윤 갤러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도화는 줄곧 즐거워 보였다.
“세라.”
“찾았어?”
같이 도화를 찾던 케빈이 다가오자 세라가 물었다.
케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우리랑 숨바꼭질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얘가 정말.”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니 언제 한번 혼을 내야겠다고 세라는 생각했다.
도화가 누구를 만나는지 까맣게 모르는 채로 말이다.
* * *
그 무렵, 도화는 오랜만에 신이 나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 봐도 라윤 갤러리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성같이 보였다. 엄마를 따라 전시회에 많이 가봤지만, 여기만큼 멋진 곳은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공주님이 있어서일까. 도화는 유독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어?”
열심히 짧은 다리를 놀리며 바지런히 돌아다니던 도화의 시선에 한 그림이 걸렸다.
도화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시선을 붙잡은 그림을 올려다 보았다.
눈꽃으로 만든 옷을 입은 요정님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잠든 아기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길 잃었니?”
너무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도화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백발이 예쁜 할머니가 뒷짐 지고 서 있었다.
‘엄마?’
짧은 커트 머리여서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엄마와 닮은 할머니였다.
세라와도 닮아서 도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할머니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가야. 길 잃었니?”
도화가 머리를 붕붕 저었다.
살짝 긴장한 도화의 표정을 본 할머니가 빙긋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럼 여기에 왜 혼자 있어? 엄마는?”
“아마 절 찾고 있을 거예요.”
부드러운 미소에 조금 경계가 풀린 도화가 냉큼 대답했다.
할머니, 장독수가 장난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소지었다.
“저런.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어야지. 그러다가 정말 길 잃으면 큰일 난다.”
“괜찮아요. 엄마는 도화 잘 찾아요. 공주님인 재희 언니도, 야수 아저씨도, 케빈 아저씨도요.”
“이름이 도화니?”
“네! 엄마가 하늘에서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절 가졌다고 해서 도화라고 지어줬어요.”
맑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도화를 장독수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얼른 엄마한테 가야지. 엄마가 걱정하잖니.”
“칫. 이거 더 보고요.”
도화가 뒷짐 지고 온몸으로 가기 싫다는 표현을 하자, 장독수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감돌았다.
“이 그림 말이니?”
“아기 천사님 같아요.”
“마음에 드니?”
도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독수가 무릎을 굽혀 도화와 눈을 맞추었다.
“얌전히 엄마한테 돌아가면 이 할머니가 나중에 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해줄게.”
“그런 것도 있어요?”
도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이지. 어느 그림에나 이야기는 들어있단다.”
“재미있어요?”
도화의 물음에 장독수가 천천히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아주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
“언제 해줄 거예요?”
“이따 배부르게 저녁 먹고 나서 여기서 보자꾸나.”
“응!”
도화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독수는 그런 도화를 물끄러미 보다 몸을 일으켰다.
“얼른 엄마한테 가거라. 그리고 엄마한테 할머니 만났다는 소리하지 말고.”
“왜요?”
“둘만의 비밀이라고 해두자.”
도화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끄덕였다.
“둘만의 비밀!”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도화를 미묘한 눈으로 보던 장독수가 가만히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만족한 도화가 몸을 돌려 다다다 뛰기 시작했다.
장독수는 한동안 그런 도화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도화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장독수는 그림 아래 부착된 캡션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었다.
캡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화가명 : 장독수
작품명 : 겨울의 축복
문득 손녀딸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게 할머니가 할 소리예요?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요?”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
“저를 위해서라면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셨어야 했어요.”
장독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아기는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다.
마치 도화처럼.
“여기 계셨네요.”
장독수의 상념을 깨뜨린 건 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