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겨울의 노을 서점 (113/128)


#113화. 겨울의 노을 서점
2022.11.28.


달이 기울고 찬바람이 반투명한 유리문을 쉴새 없이 두드렸다.

탕탕, 유리문이 흔들리며 내는 소음을 가만히 듣던 재희는 가만히 눈을 굴려 노을 서점을 둘러보았다. 타닥, 장작을 태우며 훈기를 만들어내는 오래된 난로와 그 위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낡은 주전자.

불규칙하지만 규칙적으로 정리된 책장과 책더미. 덜컹덜컹, 찬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훈기 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겨울 냄새.

익숙하고 절로 미소지어지는 익숙한 냄새와 분위기.

재희는 이런 낡고 따뜻한 노을 서점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

한때 노을 서점이 낯설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바로 무혁이 없을 때였다. 무혁을 기다리며 노을 서점을 지켰지만, 종종 재희는 이 노을 서점이 쓸쓸하다고 느꼈다.

당연히 노을 서점에 자신과 함께 있어야 할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이곳에 있어야 할 이, 제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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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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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곧장 대답이 들려온다.

정해진 시간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라, 뒤에서 바로 들려오는 생생한 목소리.

재희가 작게 웃으며 다시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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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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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몇 번 그렇게 반복하자 뒤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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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려던 재희가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대답 대신 무혁이 재희의 목덜미를 가만히 입술로 꾹 눌렀기 때문이었다.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움칠거리자 무혁이 품에서 못 벗어나도록 더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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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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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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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더 듣고 싶어.”

그리웠던 건 재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재희보다 무혁이 더 이 순간을 간절히 원했을지도 몰랐다.

재희는 가만히 몸을 돌렸다. 의외로 무혁이 순순히 팔에 힘을 풀었다.

재희는 무혁의 허리에 제 팔을 감으며 남편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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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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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혁의 강직한 눈매가 평소와 다르게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재희는 이 얼굴을 안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가끔 무혁이 잠에서 덜 깼을 때 보여주던 표정이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재희는 살살 조심스럽게 손으로 무혁의 눈매를 매만졌다.

무혁이 그 손길을 느끼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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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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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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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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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작고 보드라운 손길이 무혁의 얼굴 곳곳을 스쳤다.

사실 무혁과 재회하고 나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떨어졌던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풀듯이 오롯이 서로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중간에 다락방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눈 떠보니 ‘ㅁ’자로 놓인 소파 위다.

간밤의 일을 떠올린 재희는 얼굴을 붉히며 괜스레 무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무혁이 느른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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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얘기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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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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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목소리 좀 더 듣고 싶어.

마치 무혁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재희는 곰곰이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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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머님이 여기에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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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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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한테도 한번 말한 적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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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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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한번 오고 싶어 하셨는데 시간이 안 나서 못 오셨었거든요.”

전시회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난 뒤 휴가를 받은 재희가 노을 서점에 살다시피 하자 혜란이 찾아왔다.

재희가 차를 대접했지만, 혜란은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한동안 말없이 노을 서점을 둘러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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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안 하셨지만, 마음에 드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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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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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주 멋진 곳이라고 칭찬까지 해주셨어요.”

낡은 서점이 혜란의 마음에 들 거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련된 혜란과 노을 서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심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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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나 제가 왜 그렇게 이 서점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면서요.”

재희는 그때 혜란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날 일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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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옛날에 막 라윤 갤러리가 개관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셨어요.”

무혁은 대답 대신 가만히 재희의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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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종종 오겠다고도 하셨어요.”

노을 서점을 소중한 사람이 알게 되자 재희의 목소리에는 무척이나 기쁜 티가 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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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세라 씨도 전야제가 끝나면 노을 서점에 오기로 했어요.”

세라는 전시회 준비를 하면서도 삽화의 배경이 되는 노을 서점에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을 종종 내비쳤다.

그런데도 전시회 준비 기간에 굳이 오지 않았던 것은 오롯이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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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청소를 해 놔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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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는 제가 매일 하고 있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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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번엔 나와 함께해.”

전문 관리인이 있더라도 재희 혼자 청소하게 둔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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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손이 안 닿은 곳 좀 닦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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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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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꽤 까다로운데, 아무리 무혁 씨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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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할게.”

무혁의 팔을 가만히 쓸며 재희는 오랜만에 행복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재희는 이것저것 소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셸이 한국에 도착한 이야기나, 별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들.

무혁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재희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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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혁 씨 이야기를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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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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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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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없는데. 아무거나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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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요.”

장난스럽게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재희에게 가볍게 입맞춤하며 무혁이 느른한 웃음을 흘렸다.

사소한 입맞춤이지만 재희는 한쪽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출장 가기 전에도 무혁이 종종 애정표현을 해왔지만, 지금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두근두근 가슴이 세게 뛰었다.

무혁이 느른한 한숨을 흘렸다. 결혼하고 몇 번 보지 못한, 무혁의 풀어진 모습.

재희는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무혁의 숨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커다란 짐승이 저보다 작은 여자의 품에 파묻혀있는 듯했다.

조금 부끄러운 기분에 재희는 괜스레 출장 가기 전보다 더 두꺼워진 무혁의 팔을 꾹 쥐었다.

이윽고 무혁이 재희의 목덜미 사이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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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소식 궁금하지 않아?”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느른한 시선이지만 눈동자에 담긴 진중함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의 말대로 재혁의 소식이 궁금했다.

무혁이 가만히 재희의 뺨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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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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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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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닿는 데까지 세계 곳곳을 다녀보고 싶다고 하더군.”

재희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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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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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야.”

두바이에서 시달리면서 재혁은 종종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곤 했었다.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끊임없이 구르는 도중에도 무언가 검색하고 무혁에게도 질문을 하더니,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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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장이 끝나면 귀국하지 않고 바로 떠나겠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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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도 없이.”

재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종종 통화하면서 재혁은 재희에게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아마 걱정 끼치기 싫어서 독단적으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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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올 거란 말도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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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재혁은 그동안 받은 월급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 혼자 힘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말도 했다.

재혁이 그런 의견을 피력했을 때 무혁은 격려는커녕 별다른 말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라고 짧게 말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재혁은 힘이 되는지 까맣게 탄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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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리가 된다면 돌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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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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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일이 내내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무혁은 그러라는 말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무혁의 말을 듣는 내내 재희 역시 재혁의 마음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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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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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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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정보다 일찍 왔어요?”

묻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에 무혁이 여기에 있으면 안 되었다. 미친 듯이 일을 몰아 하지 않은 이상 말이다. 재희의 질문에 무혁이 짧게 침묵했다.

재희는 그 짧은 침묵이 망설임의 표시임을 눈치챘다.

이윽고 무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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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재희 너를 노을 서점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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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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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노을 서점은 재희, 네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곳이야. 재희는?”

무혁이 되묻자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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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도 무혁 씨가 있어야 노을 서점이 완성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서점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노을 서점 곳곳에 서점 할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노을 서점은 서로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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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돌아왔어. 겨울의 노을 서점에 홀로 있다는 건 쓸쓸할 테니.”

재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혁이 어떤 걸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비밀 친구도 사라진 노을 서점. 더 이상 열지 않는 노을 서점 앞에서 재희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더 이상 노을 서점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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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요.”

재희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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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가 돌아왔을 때 불 꺼진 노을 서점 같은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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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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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잖아요. 분명 내가 기억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 서점인데, 아무도 없고 불이 꺼져있는 걸 보는 기분은.”

그래서 재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매일 노을 서점에 들렀다.

환하게 불을 켜고 훈기가 돌도록 난로를 켰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이 되면 서점 할아버지와 무혁이 그랬듯 처마등도 켰다.

정말 시간을 낼 수 없을 땐 관리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재희는 그렇게 거의 매일같이 노을 서점에 들러 이곳을 지켰다.

무혁이 돌아왔을 때 불이 꺼져 있고 싸늘한 노을 서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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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뻤어요. 무혁 씨가 왔을 때 맨 처음 본 게 불 꺼진 노을 서점이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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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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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나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무혁 씨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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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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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전에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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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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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무혁 씨가 무리할까 봐 겁이 났어요. 그리고 그건 너무 큰 욕심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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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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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혁 씨가 이렇게 왔어요. 제가 지금 어떤 마음인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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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알지만 무혁은 표현할 수 없었다.

재희가 느끼는 감정이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같다면.

만약 그런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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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난 무혁 씨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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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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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무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재희의 몸이 무혁 아래로 순식간에 깔렸다.

재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무혁을 올라보았다. 무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눈으로 재희를 보며 숨을 내쉬었다.

애틋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사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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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마찬가지야.”

세상엔 다양하고 풍부한 단어가 많지만, 가끔 그런 단어로도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무혁에게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가만히 고개를 내린 무혁이 재희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재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혁의 등에 팔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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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

무혁이 귓불에 살짝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의 밤.

맞잡은 두 손은 한참이나 떨어지지 않았다.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를 바로 코앞에 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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