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미셸의 입국 (111/128)


#111화. 미셸의 입국
2022.11.21.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곧 겨울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인 미셸 전(展)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처음엔 혜란의 며느리여서, 또한 재희의 실력을 의심해서 팀원들과 손발이 맞지 않아 고생했었다.

드러내놓진 않았지만 팀원들은 재희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피하기도 했었다.

한 비서를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니 혜란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재희를 믿고 맡기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재희는 더 열심히 노력을 했고,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합을 맞추어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세라 씨. 케빈 씨. 도화야. 여기예요.”

인천 공항.

재희는 입국장을 통과하는 세라와 케빈과 도화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세라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 때, 둥그런 머리통 하나가 빠르게 재희에게 직진했다.


“언니!”

재희는 와락, 안기는 도화를 끌어안았다.

전보다 키가 좀 더 자란 도화가 얼굴을 반짝이며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오늘도 공주님 같다!”

“도화도 더 귀여워졌어.”

“도화 안 보고 싶었어?”

“당연히 보고 싶었지.”

“약속은?”

“안 잊었지. 얌전히 집에 다녀왔으니까 이따 공주님 그림 그려줄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말에 대답해 주는 재희가 좋은지 도화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화야. 인사 먼저 해야지.”

세라가 가볍게 타박하자, 도화가 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인사 안 해?”

세라가 엄하게 말하자 도화가 마지못해 재희 품에서 빠져나왔다.


“안녕하세요.”

도화가 꾸벅 인사하자 재희가 둥그런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화도 안녕?”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도화가 배시시 웃었다.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도화는 재희 허리에 착 달라붙었다.

세라가 넘어진다고 떨어져 걸으라고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제가 도화 안 넘어지게 잘 걸을게요.”

“한국에만 오면 도화 버릇이 영 나빠져서.”

인천 공항 한가운데서 재희에게서 안 떨어지려는 도화와 실랑이하다 세라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도화를 얄밉다는 눈으로 보던 세라가 재희를 보며 말했다.


“본래 한 달 정도 프랑스에 있다 올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지체됐어요.”

“프랑스에서 정리할 것도 있었을 테니까요. 전시회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들어갔는데, 마음에 들면 좋겠어요.”

“메일로 보내준 사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오히려 이런 멋진 곳에서 전시회를 해야 한다니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예요.”

케빈은 조금 떨어져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가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몇 번이나 만났다고 저렇게 친해진 건지.’

사실 세라는 빨리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

5월의 연회로 한국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5월의 연회에 가기 전, 세라는 한국에 가는 걸 결정했음에도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케빈은 한국행을 내키지 않는 마음을 몇 번이나 내비쳤다.

그런데도 세라는 케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강행한 것도 모자라 전시회까지 열겠다고 했다.

케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 삽화 하나 때문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 생각을 하냐고.’

프랑스에서 케빈이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세라는 고개 저었다.
 


“번복은 안 해.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혹시라도 전시회에서 할머니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케빈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한편으로는 재희는 도화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결정을 한 세라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세라는 도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제 할머니라도 만나면? 그땐 어떻게 할 건지.

케빈이 그런 우려를 내비쳐도 세라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웬만해선 안 마주치는 게 상책이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사실 5월의 연회도 세라로서는 꽤 과감한 행보였다.

그땐 어떻게 넘어갔더라도 이번엔 쉽지 않을 터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겠지.’

라윤 갤러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세라의 할머니이니 5월의 연회에서 안 마주친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런 속 타는 케빈과 반대로 세라는 말짱한 얼굴로 재희와 대화를 나눈다.


‘저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케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재희는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세라의 얼굴을 살폈다.

세라는 화상 통화할 때와 변함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백과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면 안 되겠지.’

몇 달 동안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 참석 여부를 밝히지 않았던 장독수가 며칠 전에 연락을 해왔다.
 


“전시회에 참석하겠네. 그렇지만 미셸에겐 내가 참석한다는 말도, 티도 내지 말아주게.”

 
워낙 단호한 어조, 아니 간절한 부탁이라 재희와 혜란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진 장독수의 요구에 혜란이 기함을 했다.
 


“그리고 전시회에서 내가 안 보이더라도 찾지 말아 주게.”

 
혜란은 말도 안 된다며, 그런 특별한 날에 왜 얼굴조차 제대로 내비치지 않는 거냐며 투덜거렸지만 굳이 장독수를 설득하진 않았다. 장독수의 고집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미셸과 장독수는 아는 사이였다. 그것도 어느 누구보다 밀접한.

문득 재희는 장독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투덜대며 혜란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설마 오래전에 헤어진 손녀딸을 떠올리는 것도 아닐 테고. 이해할 수 없는 양반이라니까.”


“손녀딸이요?”


“그래.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았던 데다 너무 아껴서 나조차 제대로 못 본 손녀딸이 있어.”

 
결혼식조차도 해외에서 올렸다고 했다.

그때 혜란은 어머니에게서 라윤 갤러리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데다, 처음으로 큰 기획을 맡고 있어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혜란의 부모님만 결혼식에 참석했고,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장독수가 곧 손녀딸이 한국에 올 테니 그때 정식으로 소개해 줄 거라고 약속까지 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장독수의 손녀딸이 이혼하면서 혜란은 그 귀한 손녀딸을 볼 기회도 사라졌다며 투덜거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재희와 비슷한 나이이거나 좀 더 연상일 거라고 말해주었다.


‘설마……?’

“무슨 일 있어요?”

세라가 묻자 재희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세라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재희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만약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면 이건 재희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세라 씨. 일전에 노을 서점에 대해 말했던 거 기억나세요?”

“물론이죠. 우리 도화가 좋아하는 일러스트의 배경이 된 곳이라면서요. 이번엔 꼭 가 보려구요.”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올겨울의 노을 서점은 어쩌면 사람으로 북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재희는 생각했다.


 

* * *

세라가 입국한 뒤 전시회 준비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전시회에 관한 내용은 세라도 전부 전달받았고, 사진으로도 확인했으며, 피드백도 오갔다.

재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해서 세라는 대충 준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꼼꼼하고 세세하게 피드백해서 라윤 갤러리 직원들도 질릴 정도였다.

한두 달 전부터 국내 최초 얼굴 없는 화가 미셸 전(展)이 열린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올라갔다. 덕분에 대중의 시선이 라윤 갤러리에 집중되었다.

전문가들도 기대감을 내비쳤고 대대적으로 광고도 걸렸다.

미셸 전(展) 후원 기업엔 KJ 그룹 계열사 이름이 심심찮게 보였다.

혜란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기쁜지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진으로만 접하던 미셸의 작품이 국내에서 최초로 전시된다고 하니 티켓은 금세 매진되었다.

그에 따라 혜란 역시 밤낮을 잊을 정도로 전시회 준비에 매진했다.

숙원이었던 전시회인지라 혜란은 그야말로 신이 나 보였다.

한번은 우진이 혜란을 걱정해 도시락을 사 왔다가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정신없던 전시회 준비가 끝났을 땐, 계절은 이미 겨울에 들어섰다.

추위는 성큼 다가와 살을 엘 정도로 칼바람을 일으켰다.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도 두터운 패딩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찰나, 관장실로 불려온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휴가…… 요?”

의자에 편하게 기댄 혜란이 팔짱을 낀 채 재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시회까지 얼마 안 남았지만, 그동안 너도 고생했으니까. 쉬다 오도록 해.”

“전 괜찮아요. 어머니.”

“곧 무혁이 오잖니.”

곧은 아니었다.

무혁이 올 때엔 이미 전시회가 끝나 있을 터였다.


“아마 전시회가 끝나면 올 거예요.”

“요즘 연락이 뜸해졌다며.”

“……네.”

“그 무심한 자식. 그렇게 결혼하겠다고 난리 치더니.”

혜란이 무혁의 욕을 하자 재희가 쓰게 웃었다.

혜란의 말대로 최근 무혁의 연락이 뜸해졌다.

무혁은 최대한 연락하려고 노력하려는 기색이었지만, 갈수록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은 재혁에게서 먼저 연락 온 적이 있었다.
 


“매형은 진짜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세 시간만 자고 일할 수 있어? 아니, 주위 사람은 생각도 안 해?”

 
재혁은 한참이나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매형은 사람도 아니라며 험담 아닌 험담을 했다. 그래도 무혁은 무서운지 이르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아두며 잠들었다.

재혁 역시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재혁의 죽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재희는 차마 무혁에게 함부로 연락하기 꺼려졌다.

사실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다만 작은 욕심이라도 내도 된다면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에 무혁이 함께해 주길 바랐다. 아마 무혁이 오는 건 그 후겠지만.


“전 괜찮아요. 어머님.”

혜란은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재희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아무튼 너도 지쳤을 테니 쉬고 와. 당일에는 더 바쁠 테니까 쉬어둬야지.”

“네. 그럼 며칠만 쉬다 올게요.”

더는 거절하지 않고 인사하고 나가는 재희를 보며 혜란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강진이 무혁이 요즘 그답지 않게 일을 서두른다며, 혹시 재희에게 뭐 들은 건 없는지 물었다.

혜란은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진에게 입 다물고 있으라며 단단히 주의까지 주었다.

재희에게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일정 못 맞추기만 해봐라.”

무심한 아들놈을 생각하며 혜란이 고개를 저었다.

* * *

혜란은 쉬라고 했지만, 재희는 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노을 서점에 도착한 재희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구석구석 청소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관리인도 있었고 매일같이 정성 들여 관리해서 손댈 곳은 없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자 재희는 괜스레 책을 이리저리 옮겼다.

어차피 그 위치에서 그 위치였지만 잡생각을 지우기 위한 행동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응. 희수야.”

때마침 희수에게 전화가 오자 재희가 반갑게 받았다.


-재희야. 휴가받았다며?

“응. 어머님이 전시회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쉬고 오라고 하셨거든.”

-으. 미안해. 한창 또 바쁠 때라서. 꼭 전시회에 갈 수 있게 끝내볼게.

“연말이 다가오잖아. 괜찮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아니지. 네가 어떻게 기획한 전시회인데 안 갈 수가 있어.

재희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재희만큼이나 희수도 전시회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프로젝트가 생겨 희수는 화를 냈지만, 빠질 수가 없는지 거의 밤낮으로 매달려 있는 중이었다.


“응. 알아. 괜찮아. 얘는……. 미안할 게 뭐 있어.”

재희는 책장에 책을 한 권 한 권 꽂으며 수다를 떨었다.

적막한 노을 서점에 혼자 있지 않고, 이렇게 희수와 수다를 떠니까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여긴 걱정하지마. 뭐? 아니거든. 너도 참.”

책더미 뒤편에서 책을 정리하던 재희는 작게 웃었다.

이윽고 무거운 책 몇 권을 들고 책더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재희는 모르고 있었다.

책더미 너머 걸음을 옮긴 순간, 노을 서점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사람과 마주칠 것을.

이른 겨울바람이 몰아친다.

낯선 이방인이 방문한 노을 서점에 겨울이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