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공백의 시간
(110/128)
110화. 공백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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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공백의 시간
2022.11.17.
“누나, 잘 지낸대요?”
서류를 보던 무혁의 시선이 재혁에게 향했다.
바늘로 찌르면 도리어 바늘이 휘어질 것 같은 딱딱한 표정이었다.
방금 재희와 통화하던 사람의 얼굴이 맞는지 의심이 들 만큼 딱딱한 표정에 재혁이 곧바로 후회했다. 적막감을 이기지 못하고 꺼낸 말인데 괜히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조금 편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지.’
처음부터 무혁이 편한 건 아니었다.
재혁에게 무혁은 우상이나 다름없었던 데다 가까이하기엔 어려운 남자였다.
그런 무혁이 조금이나마 편해진 건 최근 일 때문이었다.
가출했을 때 무혁이 재희와 함께 찾아온 데다, 재희의 집에 잠깐 머물 때도, 병원에 있을 때도 자주 마주친 덕분에 조금은 편해진 게 문제였다.
그러나 무혁이 드물게 편하게 느껴질 때는 재희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 사실을 재혁은 두바이에 도착한 그 날 바로 알게 되었다.
재혁은 재희와 대화를 나눌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무혁의 표정이 풀어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재혁이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무혁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짤막하지만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재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그, 누나도 많이 부드러워 진 거 알아요?”
다시 서류로 향하던 무혁의 시선이 재혁에게 닿았다.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얼른 말해보라는 듯한 재촉이 섞인 시선이었다.
아주 조금 분위기가 풀린 것 같아서 재혁이 볼을 긁적였다.
“누나야 항상 다정하고 착하게만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거든요.”
“무슨 소리지.”
“누나가 남에게 벽을 잘 쳐요. 희수 누나도 누나랑 친해지기 정말 힘들었대요.”
무혁이 모르는 재희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혁이 서류를 완전히 덮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시다시피 저랑도 딱히 사이가 안 좋았고요.”
확실히 재희는 무혁과 결혼하고 나서 약간 벽이 얇아졌다.
전보다는 재혁이 재희에게 다가가기 쉬워진 것이다.
‘공항에서 누나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줄 줄 몰랐지.’
잘 다녀오라는 짧은 인사였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재혁에게 거리를 두지 않겠다는 재희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때 일을 잠깐 떠올린 재혁은 시큰거리는 코끝을 괜히 손가락으로 훑었다.
다시 재희랑 사이가 가까워진 것도 모두 무혁 덕분인 것 같았다.
그러니 재혁은 슬쩍 그 은혜를 갚기로 했다.
“예전에 누나가 가끔 가던 곳이 있었어요.”
“가던 곳?”
“정확히는 거의 매일같이 갔다가 돌아오던 곳이죠.”
얼른 말해보라는 듯 재촉하는 시선에 재혁이 헛기침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귀가하던 누나가 겨울이면 거의 매일 늦었어요. 할머니에게 아무리 혼나도 누나는 계속 늦게 들어오더라구요. 처음 봤어요. 누나가 집에서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요.”
“…….”
“한번은 그냥 두면 할머니에게 더 혼날까 봐 찾으러 간 적이 있었어요.”
말 한마디 나누는 것도 손에 꼽힐 정도로 재희와 사이가 어색했던 시기였다.
재혁은 재희가 걱정이 돼서 할머니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염치 불고하고 희수에게 물어서 찾아간 곳은 바로 서점이었다.
서점이란 말에 무혁이 즉각 반응했다.
“서점?”
노을 서점에서 등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 재희가 말했었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그렇게 사느라 잘 오지 못했지만, 가끔 노을 서점에 왔었다고.
그런데 지금 재혁은 재희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가던 곳이라고?”
“네. 특히 겨울에요.”
“자세히 말해봐.”
재희의 일엔 항상 집중하는 무혁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반응에 재혁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괜한 말을 꺼냈나 싶다가도,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집에서 거의 무표정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누나가 그런 표정으로 서 있는 걸 처음 봤어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추울 텐데도 재희는 불 꺼진 노을 서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더 이상 허허 웃던 서점 할아버지도, 비밀 친구도 없는 텅 비어버린 노을 서점 앞에서 재희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정을 주고 친했던 사람이 사라진 서점.
사람의 온기와 그리운 냄새가 사라져 버린 서점.
재희는 겨울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진한 그리움을 안고 하염없이 서점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 이해 못 했거든요. 대체 그 서점이 뭐길래 누나가 저러는지.”
가슴 아플 정도로 간절하게 무언가를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재혁은 알 수 없었다.
“뭘 그리워하는 표정으로 있냐고, 추운데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어요.”
“…… 그래서 물어봤나?”
무혁의 물음에 재혁은 고개를 저었다.
“못 물어봤어요.”
재혁이 쓰게 웃었다.
그때 재희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
“누나의 표정이 가슴 아플 정도로 먹먹했거든요.”
노을 서점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가도 미처 닿기도 전에 흠칫하며 재희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마치 문을 만지는 순간 차가운 감촉에 그리운 사람들이 떠나간 노을 서점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물어요. 묻는 순간 뻥 하고 터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재희는 그렇게 손을 뻗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노을 서점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칼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어도 자신이 알던 온기를, 그리움을, 따뜻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재희는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혁은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재희에게 잔혹한 그 집에서 그 서점이 유일하게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었음을.
“그거 아세요? 제가 길을 잃었던 이후로 누나는 저한테 한 번도 화낸 적도, 뭐라고 한 적도 없어요.”
“…….”
“거기다 누나는 결혼 전에 늘 표정이 거의 없었어요. 감정을 지우려는 것처럼요.”
무혁은 처음 맞선 자리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재희를 떠올렸다.
지끈.
둔탁한 통증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저 원치 않는 맞선 자리여서 굳은 표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늘 그래와서였다.
그 집에서 늘 그래와서 맞선 자리에서도 똑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습관처럼 굳은 무표정.
…… 비밀 친구였을 때 알던 잘 웃고 잘 울던 그때 그 재희의 모습이 아닌, 그 집에서의 재희의 모습이었다
‘그게 내가 모르던 재희의 본 모습.’
그런 상황에서도 재희는 끝까지 노을 서점을 놓지 못했다.
“결혼 전에 매형이 그 카페에서 누나 구해줬을 때요. 거기서 누나가 곤란해하는 모습 보고 속으로 놀랐어요. 전 처음 봤거든요.”
“처음…….”
“믿지 못하시겠지만, 아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 집에서의 누나 위치가 그렇잖아요.”
“…….”
“그 집에서 누나가 솔직하게 웃는 모습, 저 한 번도 못 봤어요.”
“없다?”
“네. 그런데 지금은 웃잖아요. 저한테 화도 내고, 절 때리기까지 하고.”
가출했을 때 재희가 울먹거리며 때리던 모습에 재혁은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재혁이 씨익 웃었다.
“누나가 지금이라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모두 매형 덕분이에요.”
* * *
재혁이 나간 뒤 무혁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지끈, 미묘하게 찾아온 두통에 미간을 꾹 눌렀다.
무혁은 비밀 친구였을 때부터 재희가 솔직하게 웃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혼여행 갔을 때도, 같이 지내면서 무혁은 재희의 웃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었다. 그에 더해 저에게 화를 내고, 따지고 솔직하게 슬퍼하는 모습까지.
그런데 재혁은 재희의 그런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집에서 감정을 죽여 살아온 재희의 모습이 그려지자 주먹 쥔 무혁의 손등에 핏줄이 투둑 불거졌다.
자신의 감정을 지우는 와중에도 재희는 본능처럼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노을 서점의 온기를 더듬어 찾아왔었다.
그러나 재희가 맞닥뜨린 노을 서점은 더 이상 온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
사랑했던 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노을 서점.
웃고 떠들던 이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런데도 그 웃음소리가, 온기가, 분위기가, 따뜻함이 그리워 찾고 또 찾았던 노을 서점.
텅 비어버린 노을 서점 앞에서 재희는 무슨 마음으로 추운 겨울날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을까.
그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무혁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았던 눈을 뜬 무혁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뭐? 정말?”
한동안 프로젝트로 두문불출하던 희수가 힐링하러 왔다며 노을 서점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간식을 먹다 입을 벌렸다.
할머니가 집까지 찾아와 폭력을 휘두르다 재혁이가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희수야. 과자 부스러기 떨어져.”
정작 그 일을 겪은 당사자인 재희는 담담했다.
재희의 말에 희수가 얼른 과자 부스러기를 치웠다.
“그보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네 할머니가 정말 그런 짓까지 저질렀어?”
“응.”
“와. 드디어 노망났나 봐. 어떻게 자기 손녀한테 그런 짓까지 할 생각을 해?”
“과하긴 했지. 나도 놀랐어.”
“그래서 그냥 넘어갔어?”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고 생각도 했는데…….”
사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무혁이 직접 나서려는 걸 재희는 뜯어말리면서도 고민했다.
어떻게든 할머니가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은 마음과, 또…….
잠시 생각에 잠긴 재희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그 집과 엮이기 싫었어.”
“그래도 어떻게 그냥 넘어가.”
“아버지가 나한테 사과하기 전까지 보지 않기로 했어.”
희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이미 노을 서점에 오기 전에 재희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재희의 아버지인지라 희수는 별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끝까지 비겁한 아버지라며 욕을 했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할머니를 고소하기라도 하면 다시 그 집이랑 엮일 수밖에 없잖아.”
“그건 그런데…….”
꿍얼거리던 희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나라도 더러워서 엮이기 싫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희수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더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그런 희수를 보며 재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이미 죗값을 치르고 계실지도 몰라.’
병원에서 정 교수가 신채근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봤을 땐 별생각이 없었다.
할머니 역시 다치셨을 테니 아버지를 부르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할머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었다.
평소 재희를 싫어하던 할머니였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굴진 않았다.
벼루를 던진 적은 있어도 그건 그 집에 있을 때 이야기였고, 바깥에선 체면을 중시하는 할머니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할머니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집에 찾아올 때부터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더군다나 재혁이 소리치며 뒤에서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는데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평소의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당장 멈추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셨지.’
할머니를 아는 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재혁이 다치고, 두바이까지 갔는데도 할머니는 재희를 찾아오기는커녕 연락조차 없다.
아무리 신채근이 막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건 분명 할머니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궁금했지만 재희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 집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지만, 어떤 경로로든 자신의 귀에 소식이 들려올 터였다.
그러니 재희는 할머니의 일은 여기에서 적당히 마무리 짓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할머니의 일보다는 지금 당장 갤러리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희수가 돌아간 뒤 재희는 늘 앉았던 책장에 기대앉았다.
오늘따라 노을 서점의 풍경이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아마 책장 뒤편 비밀 친구인 무혁이 없어서일 터였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무혁과 통화했는데도 부족했다.
‘지금 손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재희는 무혁이 앉아 있던 방향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텅 빈 바닥의 감촉만 느껴질 뿐, 익숙한 커다란 손은 만져지지 않았다.
아무리 손을 더듬어도 닿지 않았다.
그 겨울날, 거의 매일같이 노을 서점에 갔을 때도 그랬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면 비밀 친구와 서점 할아버지가 맞이해줄 것 같은데.
노을 서점으로 향하면서 재희는 속으로 빌고 빌었다.
오늘은 서점 할아버지와 비밀 친구가 있기를.
‘알고 있었어.’
그럴 일은 없다는 걸.
부질없는 기대감이 겨울바람에 부서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재희는 노을 서점 문조차 만지지 못했다.
부질없는 허상과 희망이라도 좋았다.
문을 열면 그때처럼 서점 할아버지와 비밀 친구가 노을 서점에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면서도 미련하게.’
재희는 쓰게 웃었다.
무혁에게 불 꺼진 쓸쓸한 노을 서점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혁 대신 노을 서점을 잘 지킬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커서 쓸쓸했다.
재희는 처음으로 시간이 빨리 가길 빌었다.
하루빨리 무혁이 보고 싶었다.
다시 겨울이 온다면 그때만큼 아프지 않을 테니까, 얼른 겨울이 오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항상 아픈 기억이 있었던 눈이 내려도 상관없었다.
무혁과 빨리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땐 재희는 처음으로 눈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