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너도 인제 그만 이 집에서 벗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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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너도 인제 그만 이 집에서 벗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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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너도 인제 그만 이 집에서 벗어나야지.
2022.11.07.
신채근은 병원을 나서는 재희와 무혁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재희와 무혁이 차에 타고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시선을 떼지 않던 신채근이 곧 걸음을 옮겼다.
한창 두바이에 대해 검색하던 재혁은 병실에 신채근이 들어오자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어. 아버지 오셨네요.”
“그래. 몸은 어떠냐.”
“거뜬해요. 애초에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웃는 아들을 보는 신채근의 입안은 썼다.
결국 제가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이런 일까지 벌어졌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네 어머니는.”
“먹을 거랑 제 옷 챙기러 잠시 집에 가셨어요. 괜찮다는 데도 굳이 가셔서.”
“이번에 할머니 때문에 놀랐겠구나.”
“저보단 누나가 더 놀랐을 거예요.”
재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채근이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재혁의 앞머리를 거칠게 문질러주었다.
“할머니 막느라 네가 고생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할머니는 어떠세요?”
할머니의 밑바닥까지 봤으니 정이 떨어질 만도 한데 재혁은 역시 걱정이 되었다.
신채근은 그런 재혁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안 보는 게 나을 거다.”
“할머니 많이 다치셨어요?”
재혁의 안색이 굳어졌다.
혹시 저때문에 할머니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신채근이 고개를 저었다.
“멀쩡하시다. 그러니 넌 그냥 두바이 가는 일에만 신경 쓰거라.”
“아버지. 그러면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 일에 집중해요.”
신채근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리 말해두마. 이번 일은 네 탓이 아니다.”
신채근으로서는 지금 이 말이 최선이었다.
* * *
잠시 후.
할머니를 뵙고 온 재혁은 멍한 얼굴로 신채근과 함께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재혁은 방금 자신이 본 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신채근과 재혁을 보고 어디 갔다 왔냐며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다.
할머니는 재혁의 머리에 붙은 거즈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며 방방 뛰었다. 혹시 재희가 그랬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재혁이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의 행동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신채근은 그 길로 재혁을 데리고 나왔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 것 같다. 최근 건강검진 결과에선 아무런 이상 징후도 없었으니까.”
“…….”
“정확한 결과는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희망적이진 않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 상처를 보고 누나가 그랬다고 생각을 해요?”
“할머니는 평생 재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분이시다. 또 고집 역시 센 분이시다. 그러니 모든 화살을 재희에게 돌리시겠지.”
신채근의 말에 재혁은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재혁은 죄책감과 함께 속이 답답해져 왔다.
“혹시 제가 마지막에 할머니한테 소리를 질러서…….”
한때 할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를 예뻐해 주던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꼭 할머니가 저리된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재혁은 마음이 불편했다.
“네 탓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내 탓이지.”
“…….”
“할머니는 평생 나와 너만 바라보고 사신 분이시다. 네가 그렇게 나갔더라도 나라도 할머니를 위로해 드렸다면 괜찮을지도 모르지.”
아마 평생 자랑거리나 다름없는 아들과 손주가 제게 등을 돌려버리니 할머니가 그렇게 되신 걸지도 몰랐다. 아들과 손자의 외면은 할머니가 감당하기엔 생각보다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서 두바이에 안 갈 거냐?”
신채근의 물음에 재혁은 당장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생각 정리를 마친 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갈 거예요.”
“잘 생각했다. 네가 안 간다고 했으면 억지로라도 보냈을 거다.”
신채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거라.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책임질 필요도 없다.”
“…….”
“너도 이제 할머니 치마폭에서 나와야지.”
“그, 누나에겐…….”
“말하지 마라. 재희가 더 이상 여기와 얽힐 필요도 이유도 없다. 특히 네 할머니와는.”
“…….”
“지독한 악연은 이제 끊어내야지.”
“예.”
“들어가라. 상처 덧난다.”
무심하게 말한 신채근이 걸음을 옮겼다.
재혁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재혁이 너도 인제 그만 이 집에서 벗어나야지.’
이 집안의 일은 그동안 무심했던 신채근이 정리할 때였다.
아니, 해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며 언젠가 재희에게 사과할 날이 오기를 바랐다.
언젠가는, 그래. 그 언젠가는.
* * *
무혁이 출장 가기 하루 전.
재희는 무혁이 출근해 있는 낮 시간동안 시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예전엔 불편하기만 했던 시댁이었지만 5월의 연회 이후로 심적으로 편해져서인지 불편하지 않았다.
재희가 시댁에서 지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할머니가 저지른 일 때문이긴 했지만, 그 집에 재희 혼자 두기 불안하다는 혜란의 의견과 강진의 무언의 긍정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니었고 경자도 있었다.
하지만 혜란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재희는 혜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덕분에 경자는 낮 시간동안 자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혜란은 갤러리에 출근하지 않고 낮 시간을 재희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시냐고 말했다가 등짝을 한대 얻어맞은 것 말고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게 네가 뽑은 사람들이라고?”
혜란은 재희가 추려낸 직원 명단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사람 볼 줄 아네.’
재희가 고른 인물들은 한 비서가 추려낸 직원들 중에서도 50주년 특별전시회 미셸 전(展) 준비에 더없이 어울렸다. 완벽하게 추려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그 이상을 해냈다.
“다들 경력이나 실력이 우수해서 고르기 어려웠어요.”
“그렇지. 내가 직접 면접 보고 고르고 골라 뽑은 직원들인걸.”
재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 혜란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가끔 혜란의 이런 모습이 조금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 좋아. 이대로 진행하도록 해.”
“네. 어머니.”
딱히 혜란이 뭔가 지적할 것도 없었다.
재희는 내심 안심하며 서류를 챙겼다.
재희에게 명단을 다시 넘겨주며 혜란은 잠시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
서류를 정리한 재희는 혜란의 기색이 이상한 걸 눈치채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음.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혜란은 장독수의 미묘한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장독수에게 숙원이던 미셸 전(展)을 드디어 열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장독수는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장독수는 이어 혜란이 미셸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표정이 굳었다.
장독수 역시 미셸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셸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다. 당연히 장독수도 미셸의 얼굴을 모른다.
혜란이 미셸의 외양에 관해 얘기했을 때 장독수의 반응은 어색했다.
세세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다.
거친 화풍과 다르게 숏 커트의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었다 정도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 후 심심하면 라윤 갤러리에 방문하던 장독수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워낙 제멋대로 구는 괴팍한 양반이라 혜란도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번엔 반응이 평소와 다르단 말이지.’
갤러리에 찾아오진 않았지만 장독수는 미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베일에 싸인 화가 미셸이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장독수는 미셸뿐만 아니라 그 딸인 도화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장독수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지라 혜란조차 신기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장독수에게 함부로 미셸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도 없었다.
장독수 역시 혜란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만나게 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았다.
혜란이 미셸에 대해 말한 것도 장독수란 사람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이 무겁고 무리한 부탁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내가 특히 더 믿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장독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장독수.
아끼는 손녀딸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혜란조차 한 번도 그 손녀딸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살았던 데다 장독수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손녀딸이랑 불화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장독수가 그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은 탓에 혜란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독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골치가 아팠다.
“요즘 장독수 화백이 영 이상해서.”
“이상하다뇨?”
혜란이 장독수가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 털어놓자 재희도 생각에 잠겼다.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장독수는 호방한 성격이었다. 그런 장독수가 갑자기 소극적이게 행동하는 건 재희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미셸과 장독수 화백이 아는 사이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 거야.”
혜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이라면 미셸이 누군지 장독수 화백이 진작 나에게 말해주었겠지.”
그랬다면 미셸을 영입하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미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이상해지셨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미셸도 좀 어느 정도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 둘의 접점은 분명히 없는데……. 없는 게 맞는데.”
재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혜란이라도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장독수와 미셸의 접점은 없어 보였다.
미셸이 참석한다는 걸 알면서도 장독수는 5월의 연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은 별로라며 거절하던 장독수였다.
‘그랬던 양반이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어.’
그런데 미셸의 외모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장독수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렇게 되자 도저히 장독수와 미셸이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혜란이 생각을 정리하도록 시간을 준 재희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번 전시회에 장독수 화백을 초청하는 건 어떨까요.”
“장독수 화백을? 그 양반이 올까? 5월의 연회에도 오지 않았던 양반이?”
손녀딸과의 불화 이후로 장독수는 매년 참석했던 5월의 연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장독수를 설득하던 혜란도 이젠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잖아요. 특별한 날이기도 하니 분명 축하하러 오실 거예요.”
“그래. 오시겠지. 설득하면 그러긴 하시겠지만.”
그런데도 왜 이렇게 뒷맛이 쓴지 모르겠다.
고민에 빠진 혜란을 보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장독수 화백을 찾아뵐까요?”
“네가?”
“이번 특별전시회에 장독수 화백이 빠지면 안 되잖아요.”
혜란의 어머니 때부터 인연이 이어진 장독수 화백이었다.
그러니 라윤 갤러리의 특별한 날에 장독수가 빠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혜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어떻게 보면 네가 할 일이니.”
“예. 조만간 찾아뵐게요.”
“그나저나 친정과는 연락하고 있니?”
“아직은요. 할머니 일로 정신없으실 거예요.”
연락이 와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친정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재혁조차도 재희에게 친정 일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재희는 굳이 그런 속사정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혜란 역시 묻지 않았다.
“그래. 그렇겠지.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렴. 알겠니?”
혜란의 걱정이 묻은 목소리에 재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대하기 어려웠던 시어머니이지만 지금은 친정보다 더 편안했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꼭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꼭 그럴게요.”
“그래, 오늘 무혁이랑 노을 서점에서 보낸다고? 준비는 다 했고?”
“네. 차질없이 무사히 준비해 뒀어요.”
남들에겐 그냥 그저 그런 하루라도 재희에겐 매일매일 특별해 보였다.
내내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재희를 혜란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긴.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정말 신혼 같을 테니.’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나서도 재희는 제대로 신혼을 즐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무혁은 바빴고 재희는 자신의 심술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날 원망하지 않니?”
뜬금없는 질문에 재희가 잠시 혜란을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않아요.”
“흐음.”
혜란이 흥미로운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혜란이 인정했어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였다. 그런데도 재희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래도 혜란은 불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 같은 거 없다고 대답했다면 조금은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혜란은 거짓 없이 솔직한 사람을 좋아했다.
“무혁 씨랑 결혼하고 나서 많은 게 변했어요. 힘든 일도 있었지만, 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그런 일이오.”
처음엔 무혁만 보고 도피로 시작한 결혼.
하지만 그 결혼은 많은 걸 가져다 주었다.
가끔 믿을 수 없어서 꿈이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걸 알려주듯 재희가 손만 뻗으면 언제든 닿았다. 가족, 노을 서점, 그리고 비밀 친구이자 남편인 무혁까지.
“그래. 다행이구나.”
혜란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더 이상 내가 네 행복을 건들면 안 되겠지. 기사를 불러줄테니 얼른 가렴.”
“네. 어머님.”
“그리고.”
혜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언제 나도 거기 한번 데리고 가주렴. 노을 서점이란 곳 말야.”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 지었다.
“네. 서점 할아버지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예요.”
사람의 발길이 끊긴 노을 서점.
다시 하나둘 사람들이 방문한다면 서점 할아버지는 좋아하실 터였다.
재희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을 서점은 언제라도 발을 들이는 이들을 품어주는 그런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