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우리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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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우리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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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우리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2022.11.03.
정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후 신채근은 병원 벤치에 착잡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10분 전 대화를 나눈 정 교수가 한 말 때문이었다.
“정밀 검사……말입니까.”
신채근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 교수를 보며 거의 읊조리듯 되물었다.
정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할머님께선 크게 다치신 부분은 없습니다. 아마 넘어질 때 손자분이 잘 막으신 듯합니다.”
그렇게 말한 정 교수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말을 이었다.
“할머님께서 손자분이 걱정된다며 난리를 피우는 통에 퍽 애를 먹었지만 말입니다.”
“난리요?”
“손자분에 대한 사랑이 깊으셨던 모양입니다.”
정 교수가 가볍게 말했지만 신채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재혁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과할 정도였다.
“왜 갑자기 정밀 검사를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게…….”
알츠하이머가 의심된다고 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인지 아닌지 좀 더 검사해 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희망적인 소리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어머님은 일 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으십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받으셨는데 아무런 이상 없으셨습니다.”
증손주까지 봐야 한다며 과도하게 건강을 챙기는 어머니였다.
건강검진도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건강검진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알츠하이머 의심이라니.
신채근은 기가 막혔다.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정 교수를 따라 치료실로 간 신채근은 병실에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신채근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 교수는 잠든 할머니를 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아드님과 손자분이랑 오해를 풀어야 한다며 계속 중얼거리셨습니다.”
“…….”
“그러다 갑자기 그것 때문이라며 화를 내시다가 또 금세 괜찮아지셨습니다. 한참 그러시다가 방금 잠드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정을 내리긴 이르지 않습니까.”
안다.
의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말할 리가 없다는 걸. 그러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정 교수가 신채근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근 할머님께서 심하게 충격을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충격이라면.”
“육체적 충격이어도 좋고, 정신적인 충격도 상관없습니다. 할머님이 감당하기 힘든 일 말입니다. 짚이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신채근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할머니가 심하게 충격받을 일이라면 그 일밖에 없었다.
신채근이 어머니를 외면한 일.
어머니여서 신채근은 연을 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비겁해도 재희의 아버지이기도 해서 딸에게 벼루를 던진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실망한 마음을 비쳤다. 거기다 재혁의 반항. 그게 할머니에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신채근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정 교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정 교수가 신채근을 보며 말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
“물론 일시적인 증상일 수도 있습니다. 정밀 검사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희망은 놓지 마십시오.”
“…… 혹시, 혹시라도 정말로 그거라면…….”
최악의 수를 생각하며 신채근이 물었다.
정 교수는 잠시 침묵하다 곧 적당히 말을 골라냈다.
“그래도 오늘처럼 갑자기 진전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천천히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가족분께서는 앞으로 주의 깊게 할머님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 교수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털썩, 옆에 누군가가 앉았다.
무거운 눈으로 옆에 앉은 이를 확인한 신채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드시겠습니까.”
커피를 권하는 이는 강진이었다.
“한번 이렇게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예.”
신채근은 커피를 받아들었다.
* * *
둥그렇게 모양낸 키 작은 나무 사이로 참새 몇 마리가 바쁘게 뒤적거리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로 한 두 중년의 남자는 참새를 보기만 할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견례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색한 침묵 끝에 신채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사돈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강진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강진이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닌 이런 병원의 벤치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은 있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진은 KJ 그룹의 회장이었다.
모든 일정이 초 단위로 나뉘어 있는 KJ 그룹 회장이 아무리 사돈과 있다고 해도 하릴없이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강진은 뜸 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본론을 말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건 아마도 며느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리라.
짧은 침묵 뒤 이번엔 강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단된 공사 때문에 타격이 크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까.”
“같은 업계인 데다 사돈 회사의 일이 아닙니까.”
“다행히 강 상무님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위가 아닌 업무상의 직급으로 무혁을 언급하는 신채근에게 강진은 잠시 시선을 두었다.
“아닙니다. 감사를 받을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사돈이 어려우신데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진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평소의 강진이라면 [괜찮습니다.] 이 한마디로 대화를 마무리했을 터였다.
우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두고두고 아버지 무슨 일 있으시냐며 귀찮게 굴 법한 대답이었다.
재희와 가족들 사이가 안 좋은 건 강진 역시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었다. 상견례 자리에서만 보더라도 충분히 눈치채고도 남을 일이었다.
거기다 아까 병원 복도에서 신채근은 재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이지 않은 부녀 사이였다.
속사정에 대해 무혁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강진 역시 굳이 깊게 묻지 않았다.
재희가 자신의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란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장(査丈)어른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가 봅니다.”
“유쾌한 소식은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강진의 시선이 비서에게 향했다.
다음 일정이 촉박한 듯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새아기를 참 잘 키우셨습니다.”
신채근이 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딱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기업인이라면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인간미가 없기로 유명한 강진이었다.
그런 강진이 재희를 새아기라고 칭하다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새아기 덕분에 아들놈이 편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집안의 복덩이입니다.”
FM으로 살아온 무혁에게 파장을 일으키고 가족 앞에서 보여준 적 없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 만든 재희. 물론 그것 때문이라면 강진은 복덩이라는 말까지 하지 않을 터였다.
무혁이 필사적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작은 아버지의 노을 서점.
그 중심에 재희가 있었다.
재희에게 흥미를 느껴 단둘이 만났던 강진은 조용하지만 맑고 올곧은 그 눈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들 부부를 지켜보던 강진은 몇십 년 만에 마음을 바꿔 혜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다고 생각해 고수했던 태도를 몇십 년 만에 달리한 것이다. 지독한 외골수인 강진에겐 큰 변화였다.
“새아기 덕분에 저와 제 아내의 사이도 좋아졌습니다.”
재희가 들어왔을 뿐인데 집안은 조금씩 서서히 많이 바뀌어 갔다.
재희는 가족이었고 강진은 집안의 어른이었다.
그러니 강진은 재희가 친정 일로 힘들어한다면 언제든 시아버지로서 방어막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의 강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사돈인 신채근에게 하는 것도 저 이유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란 거, 별거 아니더군요.”
시집와서 낯설어하는 혜란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게 아니라 남편으로 손 한번 내밀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을 터였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먼저 손 내미는 그 행동을 하지 못하여 돌아온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몇십 년 동안 깊게 팬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깊게 팬 골만큼 앞으로도 큰 노력을 해야 했다.
강진은 아직도 혜란과 사이가 삐걱거리지만 전처럼 말싸움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새아기는 우리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신채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진 역시 대답을 들을 생각 따위 없었다.
“정리가 되시면 언제 술이나 한잔 기울일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덧없는 약속이었지만, 강진 역시 신채근에게 여지를 남겨두었다.
선택은 신채근이 하는 것이고, 강진은 새아기의 아버지이기에 존중했다.
신채근이 진정으로 재희에게 다가가고자 한다면 그 역시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강진이 멀어지자 신채근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 누나. 왔어? 매형도 오셨어요?”
시댁 식구를 모두 돌려보낸 뒤 면회 허락을 받은 재희는 1인 병실에 입원한 재혁을 찾았다.
재혁은 비스듬하게 앉아서 머쓱한 얼굴로 재희와 무혁을 반겼다.
재희는 할 말이 많았지만 꾹 눌러 삼켰다.
“머리는 어때? 아프지 않아?”
“심하게 다친 건 아니야.”
그렇게 대답한 재혁이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렇게 굳이 매형이 여기로 밀어 넣어서 좀 민망하네.”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그런 말이 나와?”
아직도 현관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재혁의 모습이 선명했다.
재희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 교수는 가벼운 뇌진탕이 있지만 활동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말대로 큰 상처는 아니었는지 이마에 커다란 거즈를 붙인 재혁을 착잡한 눈으로 보던 재희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크게 다친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
“어릴 때 유도 배운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말은.”
재희가 밉지 않은 눈으로 장난스럽게 말하는 재혁을 흘겨보았다.
“그래서 갈 수 있겠나?”
무뚝뚝한 무혁의 말에 재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래. 혹시 모르니 치료에 전념해.”
무혁은 긴말하지 않았다.
재혁은 재희가 뜯어말려도 반드시 갈 기세였다.
“인제 그만 돌아가, 누나. 난 괜찮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재희가 머뭇머뭇했다.
재혁은 무혁의 눈치를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누나 시간을 내가 더 뺏었다간 두바이 가서 매형한테 시달릴거야.”
“무슨 소리야.”
누나.
누나는 매형을 되게 잘 알면서도 되게 모른다.
이 순간에도 매형의 시선은 누나에게 박혀서 안 떨어지는데.
재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엄마도 곧 오실 거니까 얼른 가.”
홍연화가 곧 온다는 말에 재희가 머뭇거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몸조리 잘해.”
“응. 얼른 가.”
재희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병실에서 나왔다.
홍연화와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무혁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여서 어쩔 수 없었다.
병실에 나온 뒤 무혁이 걱정하는 기색이 가지 않는 재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정 교수님은 꽤 유능한 분이시니 후유증은 없을거야.”
“그래도 다쳤는데 두바이는 좀…….”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 불안해하는 재희를 보며 무혁이 손을 맞잡았다.
“누나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어린애가 아니야.”
“그건 알지만.”
재혁이 여전히 철부지 같기도 하지만 과연 거기 가서 적응은 잘할지도 걱정이었다.
“재희야.”
무혁이 묵직한 목소리로 부르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두바이에 가.”
“네. 그렇죠.”
이미 재희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담담한 재희의 반응에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혁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재희가 신경 쓸 사람은 나야.”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재희가 잠시 후 작게 소리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비밀 친구가 질투도 다 하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덤덤한 얼굴로 무혁이 이어 말했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은 바로 재희고.”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어떻게요?”
“글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야?”
“음. 글쎄요.”
일부러 뜸들이는 재희를 무혁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이 별것 아닌 밀당도 무혁은 즐겁기만 했다.
“출장 전날, 노을 서점에서 우리 하룻밤 같이 보내요.”
“노을 서점에서?”
“몇 달간 떨어져 있을 건데 비밀 친구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재희가 가만히 남편의 커다란 손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이게 저만의 책임지는 방식인데 어때요?”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무혁이 가만히 재희의 손가락에 입 맞췄다.
“이만 돌아가자.”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감쌌다.
재희는 그런 무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곤 함께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