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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할머니의 분노 (105/128)


#105화. 할머니의 분노
2022.10.31.


할머니는 끙끙 앓아누웠다.

신채근은 재희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한 뒤로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혁 역시 그렇게 집을 나간 뒤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며느리인 홍연화를 붙잡고 죽는소리를 했지만, 며느리의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시어머니인지라 적당히 들어주는 척은 했지만,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고용인인 영산댁은 적당히 몸을 뺀 지 오래였다.

신채근은 집에 들어오면 인사는 했지만, 긴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딱 어머니에 대한 예의만 차렸을 뿐이었다.

한평생 아들과 손주만 바라보고 산 할머니는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드러누워 버렸다. 반쯤은 나를 봐달라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영산댁! 영산댁!”

물수건을 올려두고 끙끙 앓던 할머니가 고함을 질렀다.

할머니의 몸보신용 한약을 달이던 영산댁이 들어오자 할머니가 노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내 아들은 어디 갔어.”

“아이고. 사장님은 아침에 출근하셨잖아요.”

“출근? 내가 앓아누웠는데?”

“아침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하셔놓고선.”

바로 세 시간 전 일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큰 사모님. 답답하셨나 보네. 이거 좀 보고 계세요. 제가 얼른 한약 좀 다려올테니까요.”

영산댁이 할머니가 평소 즐겨보던 신문을 가져다 두었다.

영산댁이 나가자 할머니는 인상을 찌푸린 채 신문을 바라보았다.


“출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심결에 누운 채 신문으로 손을 뻗던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곱게 접힌 신문 한 면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신문을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프랑스 화가 미셸 전(展)이 열린다는 기사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기사에 실린 한 이름에 고정되어있었다.

프랑스 화가 미셸 전(展) 총 책임자로 재희의 이름이 작게 실려있었다.

할머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내놓고 혼자 잘 살려고 해?’

비틀거리며 할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내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암. 그렇고말고.’

그러곤 신문을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큰 사모님. 어딜 가세요?”

잘 달인 한약을 사기그릇에 담던 영산댁이 깜짝 놀라 불렀지만 할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영산댁은 들었다.

할머니가 재희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흉흉한 기색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영산댁이 재빨리 할머니를 잡았다.


“큰 사모님. 지금 어딜……!”

노인의 힘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거세게 영산댁을 뿌리친 할머니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안 들린다는 듯 걸음 옮기는 할머니를 영산댁이 질린 얼굴로 멍하니 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산댁이 다급하게 대문 밖으로 나갔지만, 할머니는 이미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로 가버린 후였다.


“이를 어째.”

영산댁이 재빨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영산댁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이고. 큰일 났어요.”

 

* * *

늦은 오전.

경자는 장을 보기 위해 외출한 상태여서 집 안은 조용했다.

미셸 전(展)을 준비할 팀원 인선을 마친 재희는 느지막하게 외출준비를 했다.

노을 서점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미 수없이 쓸고 닦고 정리했지만, 재희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그냥 가고 싶은 거지만.’

그간 서점에 가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사람처럼 재희는 매일 노을 서점으로 향했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막 잠금장치를 풀어 현관을 열려 할 때였다.

지잉.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낯익은 이름이 뜨자 재희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재혁아.”

재희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지금 어디야?

“응? 나 지금 나가려고.”

-나오지 마! 절대!

“뭐?”

-설명할 시간 없어. 문 단단히 잠그고 없는 척해. 매형한테도 얼른 전화해!

“지금 무슨 소리를…….”

-나 지금 거의 다 와 가니까 조금만 기다…….

재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현관이 열렸다.

그 바람에 현관을 잡고 있던 재희의 손이 쓸렸다.

뻐근하고 화끈한 통증에 재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현관을 연 사람을 확인한 재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할…… 머니?”

그 말을 들었는지 재혁이 소리 질렀다.


-누나! 빨리 방으로 들어가!

평소처럼 깔끔하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는 할머니였지만,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은 발은 흙먼지로 더러웠다.


“네깟 게 감히!”

평소와 다른 흉흉한 기색에 놀란 재희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할머니가 손을 치켜들어 그대로 재희를 향해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재희가 몸을 움츠리며 그 손길을 피했다.

쨍그랑!

선반에 올려둔 도자기 장식품이 바닥에 떨어지며 처참하게 깨졌다.


“이게 무슨…….”

재희는 주저앉은 채 두려움에 찬 눈으로 깨진 장식품과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평소 강경하고 빈틈없어 보이던 할머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재희는 더 큰 사달이 나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재희가 주저앉은 채 뒤로 피하려 하자 할머니의 눈에 노기가 짙어졌다.


“너만 행복하게 둘 줄 아느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아들과 내 손주와 내 사이를 갈라놓아. 네깟 게 감히!”

감정이 격해졌는지 거의 제정신이 아닌 할머니의 눈빛에 처음으로 공포란 감정이 재희의 눈동자에 차올랐다.

너무나도 무서우면 사람은 순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린다.

굳어버린 재희에게 할머니의 우악스러운 손이 거의 닿았을 때였다.

거의 구르듯 뛰어든 재혁이 아슬아슬하게 할머니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할머니!”

“이거 놓거라. 이거 놔! 내 오늘 저것의 버릇을 고쳐둘 테니!”

“진정하시라고요!”

재혁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할머니는 재혁의 목소리마저도 안 들리는지 악을 썼다.


“내 오늘 너를 죽이고 나도 따라 죽으련다! 네까짓 게 감히 이간질해서 내 아들과 손주를 뺏어가? 내 오늘 너를 죽이고 말 것이야!”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를 뜯어말리는 재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슨 노인의 힘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할머니는 성인 남자의 힘으로도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마치 눈 앞의 재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할머니의 반응은 점점 거칠어졌다.


“어……!”

그때였다.

순간 중심을 잃어버린 재혁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재혁아!”

재희가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할머니를 감싸며 넘어지던 재혁이의 머리가 선반 모서리에 찍혔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재혁과 할머니가 바닥을 굴렀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재혁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번졌다.

그것을 본 재희가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순간 정신이 돌아온 걸까.

바닥에 넘어진 할머니의 눈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재혁이 보였다.


“재, 재혁아!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새끼!”

그러나 재혁은 대답이 없었다.


 

* * *

연락을 받은 무혁이 다급하게 병원으로 들어섰다.


“재희야.”

병원 복도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재희를 발견한 무혁이 서둘러 다가갔다.


“무혁 씨.”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재희가 동요하는 눈으로 무혁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꽉 다문 무혁의 턱에 힘줄이 솟았다.

무혁은 곁에 앉아 재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재희에게 연락을 받은 건 30분도 되지 않았다.

재희가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재혁이 다쳤다며 그 말만 쉼 없이 반복했다.

무혁은 회의도 다 미뤄두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오면서 속도위반을 몇 번이나 했지만 상관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어이……!’

무혁은 진료실 너머를 노려보았다.

재혁은 안에서 치료받고 있었고, 할머니 역시 넘어질 때 다쳤는지라 치료받고 있었다.

무혁은 당장이라도 치료실로 들어가려는 몸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 사달을 낸 할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재희야.”

무혁은 가만히 달달 떨고 있는 재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재희에게 굳이 상황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희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을 터였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거기다 재희는 사람이 피를 흘리며 기절한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재희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무혁은 속이 타들어 갔다.


“재혁이 어떻게 해요? 아까 재혁이 머리에서 피가 많이 났는데. 크게 다친 거면…….”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하, 할머니는…….”

재혁이 두바이에 가기로 한 이상 할머니와 마주칠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걱정되면서도 걱정되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에 재희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괜찮아.”

무혁이 다독여주었지만 재희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때 병원 복도 반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희야!”

“새아가.”

“형수님!”

소식을 듣고 혜란과 강진, 그리고 강우진이 바로 달려왔다.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시댁 식구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괜찮니? 안 놀랐어?”

가장 먼저 혜란이 재희의 손을 쥐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여길…….”

얼떨떨한 얼굴로 묻는 재희의 질문에 혜란이 대답해 주었다.


“우진이가 말해줬어.”

재희의 시선이 우진에게 향했다.

우진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상황을 살펴보라고 하셔서 무슨 일 생긴 것 같아서요. 엄마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불렀죠.”

재희의 시선이 강진에게 향했다.

강진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혁이 갑자기 나한테 보고하던 도중 뛰쳐나가더구나.”

강진은 언뜻 무혁이 초조한 목소리로 재희라고 부르는 것과 XX 병원으로 가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강진은 지체없이 전용 담당 의사인 정 교수에게 연락했다.

재희는 정신이 없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오는 의료진을 이상하게 여길 틈도 없었다.

떨리는 눈으로 시댁 식구들을 보던 재희가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재희를 혜란이 괜찮다며 다독였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았지만 강진 역시 걱정하는 기색이 언뜻 보였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제 동생이.”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 일 없을 거다.”

무뚝뚝한 강진은 답지 않게 위로했다.

아버지가 위로하는 걸 처음 본 우진이 먼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걱정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자.”

“……알았어요.”

듬직한 무혁의 말에 재희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곁을 지켜주니 조금씩 진정되었다.

한편 뒤늦게 도착한 신채근은 시댁에 둘러싸인 재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신채근이 막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신채근은 홍연화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발걸음을 멈췄다.


“여보! 이게 무슨 일에요?”

큰소리에 고개를 든 재희가 신채근과 홍연화를 발견하곤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채근은 애써 그런 재희를 돌아보지 않고 홍연화의 어깨를 위로하듯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홍연화가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홍연화 옆에서 신채근이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정 교수가 나왔다.


“선생님. 우리 재혁이 상태 어떤가요?”

다들 반응하기도 전에 홍연화가 급하게 물었다.

정 교수가 허락을 구하듯 강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 교수가 홍연화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몇 바늘 꿰맸지만 활동엔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재희가 안도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려 거의 쓰러지려는 재희를 무혁이 꽉 끌어안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홍연화가 주저앉으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신채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역시 크게 다치지 않으셨습니다. 가벼운 타박상뿐이니 운신은 문제없으실 겁니다.”

재희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로 미약하게 떨리던 손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정 교수는 곤란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다 신채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할머님의 아드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잠시 저와 이야기를 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 교수와 함께 걸음을 옮기는 신채근에게 강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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