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마지막.
(103/128)
103화.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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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마지막.
2022.10.24.
신채근은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재희를 바라보았다.
보기 괴로워서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딸이었다.
여전히 재희의 얼굴 위로 죽은 아내가 겹쳐 보였다.
예전 같으면 그런 딸아이의 시선을 피했을 신채근이었다.
‘그런데 왠지 피하기 싫군.’
신채근은 얕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신채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은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숲에선 맑은 풀냄새가 진동했다.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었다.
“여긴 네 엄마가 좋아하던 식당이었다.”
재희의 어깨가 약하게 움찔했다.
재희에게 친모는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주제였다.
그 집에서 할머니에게 모진 소리를 듣는 것보다 친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더 괴로웠었다. 한 번도 안긴 적도 없는 친모여서 그런지 그립진 않았다.
다만 친모가 어떤 분이길래 아버지가 못 잊는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림을 잘 그렸고, 식물도 좋아했다.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었지.”
딱히 특출나지 않은 여자였다.
그래도 신채근은 조용한 아내를 참 많이도 사랑했었다.
할머니는 외동아들인 신채근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당연히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집안이 뒤집혔었다.
신채근이 아무리 감싸주어도 그가 출근한 사이 벌어진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모질었다.
분가하기로 결심했을 때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
그와 동시에 모진 시집살이도 끝났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그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 않았다면.’
아내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재희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채근은 끝내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너는 네 엄마를 많이 닮았어.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조용한 그 성격도. 심지어 외모마저도.”
“…….”
“그래서 난 너를 보기 힘들었다.”
재희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말아쥐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신채근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네 엄마를 담고 너를 담기엔 내가 너무 그릇이 작고 약하며 비겁했다.”
“…….”
“네가 7살 때 눈이 오던 날 기억하냐.”
“기억해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는데.
“네가 정원에서 놀고 있을 때 난 너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네 엄마가 눈을 아주 많이 좋아했는데, 그 눈이 내리는 날에 가버렸다고.
술에 취한 신채근은 어린 재희를 껴안고 그런 말을 했다.
“아버지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에게 그런 말은 해선 안 되었다.”
신채근은 아직까지도 그 말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어린 재희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한 자신이 비겁하고 환멸이 났다.
재혁이 재희를 만만하게 보고 심술을 부릴 때 신채근이 크게 혼낸 것도 그 이유였다.
재혁이만큼은 재희에게 그래선 안 되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름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너를 안아줄 수 없지만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재희는 원하는 걸 내색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노력을 할 뿐이었다.
나중에 재혁의 성적을 올려주면 학원에 보내주겠다는 할머니와 재희의 약속을 들은 신채근이 화를 내며 뒤늦게 학원에 보내주었다.
재희가 미술을 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바라는 걸 말했을 때, 신채근은 내심 기뻐했지만 해주라며 무심하게 말했을 뿐이다.
사랑하지만 보기 힘들었고 다가갈 수 없는 딸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구나. 네가 취업해도 결국 어머니 뜻에 따라 회사를 그만두는 걸 보고, 이 집에 있으면 계속 이렇게 묶여 있겠다 싶었다.”
신채근이 담담한 얼굴로 저를 보는 재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독립까지 시도한 네가 결국 집에 다시 들어왔을 때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바싹 마른 입안을 찻물로 적셨다.
나름 그 집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신의 반항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고, 어머니에게서 보호해 줄 수 있는 남자와 결혼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선…….”
“결혼이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되겠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요.”
“어머니는 아들이나 사위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무혁과 결혼한 뒤 할머니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재희에게 모질게 굴지 못했다.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둘을 결혼시킨 보람이 있었다.
“결혼을 한다면 어머니도 너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제 앞에 앉아 있는 재희를 보니 더 확신할 수 있었다.
항상 기가 죽었던 재희가 또렷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데다, 이번에 라윤 갤러리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고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그 행사의 주인공이 바로 재희였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비록 축하한다는 말은 전해주지 못했지만 신채근은 더없이 뿌듯했다.
예전이라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결혼시켰다. 적어도 네가 여기서 벗어나길 바랐으니까.”
재희가 한약을 받으러 집에 들렀을 때 신채근이 더 이상 집에 오지 말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더 이상 이 집안과 엮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네 인생을 살라는 재희를 향한 신채근의 마지막 바람이자 사랑이었다.
신채근의 진심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 재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저한테 진심을 말씀하시는지 궁금해요.”
재희는 잔을 쥔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고 낯선 아버지의 손.
몇 번이나 저 손으로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사랑해주길 원했던 날도 있었다.
이제 그런 걸 바라기엔 너무 늦어버렸지만.
“어머니가 네게 벼루를 던졌다는 소리를 네 남편에게 들었다.”
신채근은 그 일을 곱씹으며 분노했다가도 허탈해했고, 또 분노했다가도 걱정했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할머니의 행동은 정도를 넘어섰다.
“그런 일까지 벌어진 건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다.”
계속 신채근이 외면한다면 할머니는 더 큰 일도 저지를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신채근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사람이 세상에 남겨준 딸이었다.
더 이상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정리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네게 진심을 전해주고 싶었다.”
신채근의 말에 재희가 푸스스 웃었다.
어렴풋이 신채근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채근은 저를 완전히 놓아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을 끊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이 집 안에 얽매이지 말라는 마음.
재희를 결혼시킬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많이도 돌아왔네요. 이렇게 쉽게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재희야.”
“아버지의 진심을 들으면 가슴 아프고 슬플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을 때 어렴풋이 눈치챘다.
오늘을 기점으로 신채근과의 관계가 달라질 것을.
그리고 재희 역시 신채근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저를 놓을 생각을 하고 계셨고, 저 역시 아버지를 놓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신채근의 전화에 응한 것도 그의 진심을 듣고 싶어서였다.
자신에게 그렇게 무심했음에도 단 한 번도 자신을 탓하지 않는 아버지의 진심이.
“그거 아세요? 아버지는 참 비겁해요.”
“…….”
“어쩌면 전 그 비겁한 사랑도 좋아서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가끔씩 아버지가 툭, 던지는 그 모래알 같은 애정이 좋아서 미워하지 못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저를 대놓고 미워했다면 조금은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언젠가 자신을 돌아봐 줄 거란 작은 희망조차 품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절 위해서였겠지만 그게 정말 절 위해서였는진 잘 모르겠어요.”
재희가 쓰게 웃었다.
“전 큰 걸 바라지 않았어요. 그저 한 번만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했어요.”
‘그렇게 했다면 아버지랑 저의 사이는 어땠을까요.’
아버지가 내밀지 못했던 손은 서점 할아버지가 먼저 내밀어주었다.
크고 주름진 따뜻한 손.
조부의 사랑이 이런 걸까, 막역하게 생각하게 했던 인자한 서점 할아버지.
‘그리고 내 비밀 친구.’
욕심내지 않고 속마음을 꾹 눌러 참는데 익숙한 재희가 비밀 친구인 무혁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질 수 있었고, 작게나마 욕심도 내 볼 수 있었다.
노을을 머금은 낡고 오래된 서점.
오래된 세월의 냄새가 담뿍 묻어나는 그 서점에서 재희는 온전한 자신만의 추억을 담을 수 있었다.
“저는 돌아가신 엄마가 아니에요. 전 재희예요. 신재희.”
재희는 식당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랑 저 단둘이서 식사하는 건데 이렇게 엄마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에 절 데리고 오셨네요.”
식당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신채근은 재희에게 뭘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추억을 더듬어 죽은 아내가 좋아하던 식당으로 정해버렸다.
“저 그래도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어요. 이 시간을요.”
실망이 역력한 목소리에 신채근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와 딸로서 처음 하는 식사인 만큼 온전한 부녀간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건 욕심이었을까. 아버지는 아직도 재희가 아닌 그 너머의 죽은 아내를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무혁 씨라면 뭘 좋아하냐고 묻거나 아니면 가장 근사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겠지.’
아버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저를, 신재희라는 여자를 온전히 바라봐 주는 강무혁.
아버지인 신채근은 아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죽은 아내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아갈 터였다.
그렇다면 재희는 그런 아버지의 추억에 동참해줄 생각 따위 없었다.
“전 비록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이 결혼을 시켜 준 아버지에게 감사해하고 있어요.”
“…….”
“조금, 아니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무혁 씨랑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온전한 제 가족이 생겼으니까요.”
단 한 번도 신채근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이상하게도 시아버지인 강진에게서 느꼈다. 저를 믿어주는 애정 어린 어머니의 눈빛을 시어머니인 혜란에게서 느꼈다.
친하진 않지만 필요하다면 제 편이 되어줄 시동생.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인.
‘무혁 씨. 내 소중한 비밀 친구.’
선을 보지 않았다면 비밀 친구인 무혁을 만나지 못했을 터였다.
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가도 따뜻한 가족의 울타리를 못 느꼈을지도 몰랐다.
재희는 이것만큼은 신채근에게 감사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신채근과 있을 의미가 없어지자 재희는 이만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재혁이, 이번에 무혁 씨랑 같이 초고층 사업으로 두바이로 갈 거예요.”
“재혁이가 고집을 부리더냐.”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혁 씨가 먼저 권했어요. 재혁이가 같이 가겠다고 했고요. 아마 재혁이가 곧 할머니에게 그 말씀을 드리겠죠.”
신채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혁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어머니의 반응이 어떨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요? 재혁이가 두바이 가는데 반대하시는 거예요?”
“그 철부지 녀석은 한번 크게 고생해 봐야겠지.”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아마 할머니가 그 일 때문에 저를 한 번 더 찾아오실 거예요.”
“내가 막아주마.”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아마 그때면 저와 할머니가 마주치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요.”
재희는 후식으로 놓인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알싸한 계피맛과 향이 신채근에게 남아있던 조금의 감정도 씻어주는 듯했다.
“이만 일어나요. 아버지. 시간이 늦었어요.”
아마 오늘 이후로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신채근을 볼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신채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려던 재희의 동작이 멈췄다.
신채근은 한숨을 내뱉듯 연이어 말했다.
“미안하다. 재희야. 내가 너에게 너무…….”
진심이 어린 아버지의 한숨 섞인 사과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감정을 갈무리한 재희가 담담하지만, 희미하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사과는 저를 통해서 더 이상 엄마를 떠올리지 않게 되시면 그때 받을게요.”
신채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는 그런 신채근을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볼게요.’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아마 오랫동안 저에게 사과하지 못할 테지만요.’
어머니의 그림자를 걷어내기엔 아버지인 신채근은 유약한 사람이다.
문득 재혁의 어머니인 홍연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재희는 이내 걱정을 지워버렸다.
그건 아버지인 신채근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지잉.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혁 씨]
남편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무거웠던 감정이 사르르 녹는다.
재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무혁 씨.”
전화를 받는 재희의 목소리는 밝았다.
5월의 날씨는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