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재희와 신채근 (102/128)


#102화. 재희와 신채근
2022.10.20.



“재희 너를 위해서지.”

“저를 위해서요?”

재희는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혁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도산한 회사가 진행하던 공사를 KJ 건설이 인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반대는 있었다. 그래도 무혁은 바쁜 상황에서도 빠르고 우직하게 일을 처리했다.

처음엔 반대했던 목소리도 점차 작아진 것은 중단된 공사 건을 인수하고 손해보단 이익을 보면서부터였다.

하마터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도시의 흉물로 남을 뻔한 걸 KJ 건설에서 진행한다고 하니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협조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다 제외하더라도.’

무혁은 팔을 뻗어 모니터 화면을 꺼버렸다.

힐끗힐끗,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재희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었다.

제게 향했어야 할 재희의 시선을 뺏어가던 화면이 꺼지자 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에 더 이상 재희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재희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와 시간을 보내기에도 모자라.”

무혁의 말에 재희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의중을 눈치챈 재희가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무혁에게 기댔다.


“재혁이가 아직 그 집에 있죠.”

“그렇지.”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면 전 어쩔 수 없이 재혁이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했겠죠.”

재희는 살짝 고개를 돌려 가만히 제 뺨을 무혁에게 비볐다.


“걱정하지 마요. 무혁 씨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전 더 이상 그 집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예요.”

“아니.”

무혁은 재희를 들어 책상에 앉혔다.

그러곤 양옆 책상에 손을 짚으며 재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진중한 얼굴을 한 무혁을 바라보았다.

낮은 조도의 조명 때문일까.

유독 이 남자가 거대하고 위험해 보였다.

이젠 익숙하다면 익숙한 남편의 얼굴이었지만 가끔 이 남자가 무서웠다.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불려서 자신의 삶에 커다랗게 자리를 차지한 이 남자가.

곧 몇 달간 헤어져 있어야 한다.

그 생각만 하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도 이상하게 계속 보고 싶었다.

가끔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하는 이 격한 감정이 낯설고 무섭다.


“단번에 끊어낼 수 있었다면 이렇게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겠지.”

그런 재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내 아내 재희는 그런 여자니까.”

정곡을 찌른 무혁의 말에 재희가 힘없이 웃었다.


“정말 돌려 말할 줄 모르네요.”

무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런 재희를 사랑하고.”

무혁이 한 손으로 재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말 비밀 친구였을 때도 그랬지만, 무혁 씨는 누구보다 절 잘 아는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보다 잘 모르지.”

“무혁 씨.”

“앞으로도 더 많이 알고 싶어.”

“…….”

“재희, 너조차 몰랐던 모습을, 생각을.”

“저도 알고 싶어요.”

재희가 무혁의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무혁 씨조차 몰랐던 모습을, 생각을요.”

“재희도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뭘까.”

“음, 글쎄. 잘 모르겠어요. 모르니까 더 알고 싶은 거겠죠.”

제법 농담이 늘은 재희를 보며 무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밀 친구로서 책장을 사이에 두고 재희와 앉아있을 때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나날이 떠올랐다.

사소하고 별거 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 안에서 간혹 진심을 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겉도는 얘기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던, 가장 순수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혁이 재희의 손가락에 가만히 입 맞추며 말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알아가자. 그러기 위해선.”

“…….”

“지금 이 시간을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저도 그래요.”

묘한 시선이 오고 갔다.

이 시선의 끝에는 항상 참지 못하고 커다란 존재감을 끼치며 격하게 입술을 맞부딪치는 무혁이 있었다.

무혁의 품과 체온을 고스란히 느끼며 재희는 정신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단순히 그 집과 인연을 끊겠다고 말한 것으로 모든 인연이 끝난 게 아님을.

* *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 자리에는 무혁과 재희 외에 한 사람이 더 껴 있었다.


“벌써요?”

맛있겠다 외치며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재혁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다름 아닌 무혁이 재혁과 함께 두바이에 갈 절차를 모두 마쳤다고 통보한 것이다.

막상 가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약간 고민이 남아있었던 터라 재혁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하루 정도는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마음이 바뀌었다고 내빼지도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출장 준비가 끝나자 재혁은 그 흐름을 쫓아가지 못했다.


“어, 너무 빠른데요.”

“시간이 별로 없어.”

무혁이 재혁의 고민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지금은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이미 재혁의 일로 일정에 차질이 생겼고, 그만큼 무혁은 숨 가쁘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요한 사업이기도 했고, 아버지와의 마지막 거래였다.

그런 만큼 무혁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인제 와서 싫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희가 못마땅하게 물었다.

싫다고 말하면 재희가 먼저 혼을 낼 기세였다.


“아니야! 간다고, 가!”

아주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던 재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처남도 정리할 건 정리해.”

짧지만 그 안에 내포된 뜻을 읽은 재혁이 일말의 망설임도 날려버린 채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내일쯤 집에 가려고요.”

흡사 큰일을 치르러 가는 사람 같았다.


“잘됐군.”

그러나 관심 없다는 듯 무혁이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재희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재희가 웃으며 받아들자 무혁이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무혁 씨도 얼른 식사해요. 늦어요.”

“지금 이 일보다 급한 일은 없어.”

“못 말리겠다니까.”

마치 재혁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떨떠름한 얼굴로 보던 재혁이 고개를 푹 숙이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얼른 나가야겠다.’

누나 집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 * *

무혁이 출근하고 재혁은 친구 집에 두고 온 짐을 정리하러 간다며 나갔다.

재희는 재혁이 또 가출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순순히 보내주었다.

이번 가출 일로 재혁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요즘은 철부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주변 일을 정리하는 재혁의 표정도 달라 보였다.

서재에 들어온 재희는 한 비서가 보내준 인사 서류를 확인했다.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를 기획하고 꾸려갈 팀원을 추려내기 위한 명단이었다.

함께 일할 사람을 뽑는 일까지도 혜란에게 맡겨버린 이상 재희도 그만큼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스펙이 짱짱한 이들로 라윤 갤러리 내에서 인사평가도 최고인 사람들이었다.

재희는 자신보다 스펙이 좋은 사람들을 데리고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잠깐 고민되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잘해야지.’

어쨌든 미셸이 자신과 일하길 원했고, 혜란은 재희를 믿고 지지해주었다.

재희는 미셸과의 인연에 노을 서점이 관련된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싶었다.

지잉.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표정이 설핏 어두워졌다.


‘아버지?’

아버지 신채근이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희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오늘 시간 되니.

“무슨 일이세요.”

-오늘 같이 점심을 하고 싶구나.

단 한 번도 아버지는 이렇게 갑자기 자신과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

어색했지만 재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장소 알려주세요. 그리로 나갈게요.”

 

* * *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인 한옥으로 지어진 한식당.

재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서울 내 적당한 식당에서 볼 거란 예상과 다르게 아버지가 고른 식당은 의외였다.

식당은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낡았지만 더럽지 않았고, 세월의 흔적이 덧대어진 흙과 나무로 만든 건물은 멋스러웠다.

흡사 노을 서점을 연상시키는 식당은 맛 또한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분위기도 맛도 소박한 멋이 어떤 건지 보여주는 식당이었지만 재희의 신경은 내내 아버지에게 쏠려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이 나오자 신채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출한 재혁이 찾았다고 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재혁이가 먼저 내게 연락하더구나. 집에 들어갈 테니 누나를 그만 괴롭히라고.”

흥분한 재혁의 모습을 떠올리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그런 재희의 웃음을 놓치지 않고 본 신채근이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다.”

“저도 신경 끄고 싶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재희가 입을 꾹 다물자 어렴풋이 그 이유를 눈치챈 신채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고생했다.”

“아니에요.”

어색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불편한 적막이 이어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신채근이었다.


“이렇게 너와 단둘이 앉아서 밥 먹는 건 처음이구나.”

“…….”

신채근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사각형으로 난 창문 밖으로 펼쳐진 푸른 숲이 시야에 담겼다. 신채근이 다시 시선을 돌리자 재희가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

어김없이 그 눈동자에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 신채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네 생일 때 할머니와 많이 싸웠다고 들었다.”

‘생일…….’

아버지 입에서 생일이란 소리를 들으니 왠지 새삼스러웠다.

항상 그 날이 되면 외출해서 저녁 늦게까지 오지 않으시더니.


“어머니께서 네게 벼루를 던지셨다지.”

“…….”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제게 무관심한 아버지였지만, 할머니와 다투다 일어난 일이니 분명 저를 탓할 거로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든 담담하게 흘려 넘기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다치진 않았니.”

재희가 눈을 크게 뜨고 신채근을 바라보았다.

신채근의 눈에는 화가 담기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내보이지 않았던 어설픈 걱정만이 담겨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하던 재희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재혁이가 막아준 덕분에요.”

“그래. 그러면 됐다.”

할머니가 재희에게 벼루를 던졌다는 소리를 듣고 신채근은 그날 내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재희에 대한 적의는 신채근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적의가 아니지. 일방적인 미움이지.’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로서 잘 막아주지 못한 주제에 지금에 와서 걱정한다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은 없었다.

무혁 앞에서는 내 딸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해놓고선 이렇게 단둘이서 식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

신채근이 재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 할머니가 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단속하도록 하마.”

재희는 신채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사 일로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신채근은 무척 지쳐 보였고 예전보다 많이 늙어 보였다.


‘그래서 마음도 약해지신 걸까.’

어설프게나마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새삼스러우면서도 재희는 그 걱정이 참 싫었다.


“인제 와서요.”

신채근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가 아는 재희라면 ‘네’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면서.”

재희는 원망을 담은 눈으로 신채근을 바라보았다.


“왜 지금까지 묵인하셨어요?”

단 한 번도 원망을 한 적이 없던 재희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신채근은 가슴이 커다란 바위가 얹힌 것처럼 무거워졌다.


“재혁이가 가출했을 때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어요.”

“…….”

“재혁이 꼬드겨서 가출하게 만든 게 저 아니냐고 따지셨어요.”

할머니가 재혁이가 사라졌다며, 재희 탓으로 돌렸지만 신채근은 그럴 리 없다며 묵살했다.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어머니를 말렸다면 재희에게 찾아갈 일도 없었을 터였다.

변명일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신채근의 머릿속에는 온통 회사 생각뿐이었다.


“재혁이가 멋대로 집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요.”

“네가 그럴 리가 없다.”

재희는 아버지를 말없이 응시했다.

신채근은 무심했다.

더없이 무심했어서 재희는 그런 아버지가 어색했고 어려웠다.

집안일에도, 재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무심했지만 신채근은 재희가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많이 드는데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땐 단순히 집안이 시끄러워지니까 그냥 하게 내버려 두자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셨을 거야.’

무혁과 사랑을 하고 그에 대해 알게 되어가면서 조금은 깨달았다.

신채근은 재희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나름만의 표현 방법이었을 것이다.

무혁과 다른 의미로 표현할 줄 모르는 아버지였으니까.

애정이든 원망이든 미움이든 무엇이든.


“그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어릴 적 재혁이가 집 밖으로 나갔다가 길 잃어버렸을 때, 저를 탓하지 말라고.”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때 그 한마디가 얼마나 어린 마음에 와닿고 힘이 나는 말이었는지.


“그 한마디 때문에 전 지금까지 할머니는 미워해도 아버지를 미워할 수는 없었나 봐요.”

“…….”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왜 절 결혼 시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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