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신채근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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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신채근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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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신채근의 진심
2022.10.17.
“재희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네.”
제 자식을 부정하는 신채근의 표정은 여상했다.
“진심입니까.”
한낱 종이 찢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자식을 부정하는 아비를 보며 무혁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되물었다.
무혁이 보기엔 신채근은 기업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해 보였다.
성정이 강직한 이였다면 애초부터 재희에게 그런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미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태도.
‘그러니 재희를 방관했겠지.’
결혼하고 재희가 그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 무혁은 신채근이 그동안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어렴풋하게 눈치챘었다. 누가 보더라도 할머니는 재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신채근은 줄곧 미적지근한 태도였다.
‘회피.’
명백하게 신채근은 재희를 피했다.
그리고 그 결과 재희가 그 집에서 상처를 받을 때도 방관했다.
그런데 이젠 자식까지 부정했다.
마치 더 이상 엮이기 싫다는 듯이 우유부단한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다르게 단호했다.
“진심이네.”
신채근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재희가 싫어서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큰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속 시원하고 후련해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까지 대답해야 하나.”
그렇게 말했지만 신채근은 싫지 않은 눈으로 무혁을 응시했다.
자신과 다르게 듬직하고 남자다운 무혁이 신채근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억지로라도 선을 보게 해서 재희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끌어모아서 어렵게 만든 자리였다.
선을 보게 될 집안의 남자는 비록 그렇게 뛰어나진 않아도 그럭저럭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혜란이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처음 선을 보려던 남자 대신 무혁이 나왔지만, 전화위복이란 말을 신채근은 몸소 깨달았다.
후에 그 남자가 망나니였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재희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지.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알아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평소의 신채근이라면 무혁에게조차 제 본심을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무혁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재희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왜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결혼을 시켰는지, 무혁도 조금은 알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신채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제 어미를 너무 닮았어. 크면 클수록 더 닮아갔지. 난 그걸 지켜보는 게 괴로웠네.”
“…….”
“처음엔 그 아이가 미웠네. 그런데도 난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어.”
차라리 온전히 미워만 할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사랑해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으나, 신혼의 단꿈을 누리기도 전에 아내가 먼저 눈을 감고 말았다.
저를 닮은 딸아이 한번 보지 못하고, 울음 한번 터뜨리지 못한 재희의 쌍둥이 동생과 함께.
그래서 신채근은 재희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보는 게 괴로웠다.
“그런 기분 아나?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 전 아내가 생각나 괴롭네. 괴로운데 또 사랑스러워.”
애증.
신채근이 재희에게 느끼는 감정은 딱 이것이었다.
“난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도 마찬가지야.”
“…….”
아이를 낳다 유명을 달리한 아내였다.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를 낳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되돌릴 수 없다는 건 안다.
아는데도 그때의 후회는 진득하게 한쪽 구석에 남아 지금까지 신채근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무혁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알고 있네. 재희가 무슨 죄가 있겠나. 그저 내 속이 좁아서 생긴 일인 것을.”
신채근 역시 알고 있다.
재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아내의 핏줄.
마음껏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웠다.
홍연화와 재혼한 뒤 재혁을 얻었다.
재혁 역시 사랑스러웠으나 유약한 신채근은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내가 눈을 감았던 4월의 눈이 내리던 그때 그 과거 그 자리에.
그 딜레마에 신채근은 끝내 재희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난 아마 끝까지 그 아이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네.”
“…….”
“독립시키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어머니 성정이 어디 가만두고 볼 성정이던가.”
할머니의 성정은 신채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채근도 가끔 질릴 정도로 외고집에 말이 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니 재희가 독립을 했어도 괴롭힐 양반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가정을 만들어준다면 어머니도 쉽게 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네.”
선 자리에 무혁이 나오기로 한 것을 듣고 신채근은 내심 만족했다.
집안 자체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무혁에 대해서라면 신채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재계에서 사윗감으로 눈독 들이기로 유명한 무혁이었다.
성정이 무겁고 진중하니 자신과 다르게 재희를 아껴주지 않겠나 싶어서, 무혁이 결혼을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채근 역시 밀어붙였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한번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신채근이 마지막으로 재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이었다.
신채근의 바람대로 어머니는 재희를 예전처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니 결혼한 그 아이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네. 아니, 내 딸이 아니어야 하네.”
유일하게 재희의 발목을 잡는 이 집안과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선 결코 자신의 딸이 아니어야 했다.
신채근은 앞으로도 제 딸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다.
평생 그렇게 대해왔는데 인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아비랍시고 나서겠는가.
입안이 썼다.
목을 축이려던 신채근의 손이 멈춘 건 그때였다.
“비겁하시군요.”
“…….”
“결국 자기 연민에 빠져서 딸을 제대로 보지 못하셔 놓고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시는군요.”
신채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무슨 심정으로 재희를 급하게 결혼시켜야 했는지, 그 심정을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무혁의 반응에 화가 났다.
“자기 연민이라고 했는가.”
“아닙니까.”
무혁이 차갑게 말하며 신채근을 바라보았다.
경멸이 담긴 시선이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아무 죄 없는 재희에게 풀지 마십시오.”
“…….”
“정말로 재희를 아끼셨다면 이러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
“재희의 편이 없는 그 집에서 아버지로서 중심을 잘 잡으셨어야 했습니다.”
“말했잖나. 난……!”
“그랬다면.”
무혁이 신채근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적어도 재희는…….”
‘겨울에 그런 모습으로 노을 서점에 오지 않았겠지.’
무혁은 신채근에게 굳이 노을 서점에 대해 말해줄 생각 따위 없었다.
무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화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무혁이 말을 이었다.
“재희를 결혼시킨 것도 이 정도 했으니 아버지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건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말게!”
“한 번이라도 재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보셨습니까.”
“……!”
신채근이 입을 다물자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지금 저한테 하시는 말씀, 그건 제가 들어야 할 게 아닙니다.”
“…….”
“재희가 들었어야 했습니다.”
“내가 왜 그 아이에게.”
“이유도 모른 채 선 자리에 끌려 나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라고 할 게 아니라.”
“…….”
“단 한 번이라도 그 진심을 말씀하셨어야 했습니다. 아니, 말하지 못하셨더라도.”
무혁이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할머니가 재희에게 벼루를 던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혁은 그대로 그 집으로 쳐들어갈 뻔했다. 재희가 말리지 않았다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을 터였다.
상상력이 풍부하진 않지만, 그때 그 상황이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그려진다.
재희가 관련돼서 그렇다.
그래서 무혁은 화를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할머님이 재희에게 벼루를 던지는 일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집안 단속을 잘하셨어야 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어머니께서 재희에게 벼루를 던졌다고?”
신채근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무혁은 대답해줄 마음 따위 없었다.
신채근이 아직도 재희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의 선에서 그 집을 정리해야 한다.
“직접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신채근의 본심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무혁이 문득 멈췄다.
“이번에 중단된 공사, KJ 건설에서 진행할 겁니다.”
“……KJ 건설에서 말인가.”
순간 신채근의 눈이 빛났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유약한 눈빛이 아닌 사업가로서의 눈빛이었다.
시공사가 갑작스럽게 도산하면서 하청이었던 신채근의 회사가 한순간에 휘청했다.
그 어느 낌새도 없었다.
신채근은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런데 KJ 건설에서 진행한다고 하니 정말로 방법이 없어져 버렸다.
아무리 장인이라도 이런 비겁한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사위인 무혁이 같이 일 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하청을 물색하겠지.
무혁은 눈빛부터 변한 신채근을 묵묵히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청은 그대로 안고 갈 생각입니다.”
그 말에 신채근이 뭐라 할 말이 있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신채근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내가 장인이어서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말게.”
“신경 안 씁니다.”
“…….”
“그런 것 때문에 허술한 업체를 안고 갈 정도로 전 성격이 좋지 못합니다.”
“그런 왜.”
“여러 업체를 살펴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일에 있어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그런 무혁이 신채근이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신채근의 회사만큼 실력 있는 회사는 없었다.
신채근은 무혁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아가기 위해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던 무혁이 문득 멈춰섰다.
“저라면 조금이라도 진심을 전하겠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던 무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과를 할 겁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재희를 위해서였다곤 하나 결국 말하지 않으면 진심은 닿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 누구도.”
그걸 무혁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재희에게 애정이 있고 위한다면 그래야 합니다.”
탁.
대표실의 문이 무심하게 닫혔다.
신채근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 *
달칵.
서재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던 재희가 한 기사를 훑었다.
시공사가 갑자기 도산하는 바람에 대규모 공사가 멈췄다는 기사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 자투리에 하청 업체가 받은 피해도 만만치 않다는 내용이 단 한 문장으로 축약되어 있었다.
“하아.”
인연을 끊었다고 하나 그건 할머니였지 아버지는 아니었다.
거기다 재희는 단번에 끊어버릴 만큼 성격이 모질지 못했다.
결국, 저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이렇게 기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기사 자투리에 적힌 한 문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재희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재희의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무혁이 보였다.
재희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왔어요?”
“방금. 노크했는데도 못 들었길래.”
무혁이 성큼 걸음을 옮겨 재희에게 다가갔다.
힐끔, 무혁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무혁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기사였다.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모니터를 끄려고 하자, 무혁이 부드럽게 그 손을 제지했다.
“신경 쓰이는가 보군.”
“조금은요.”
“조금?”
“사실은 많이.”
무혁이 의자에 앉으며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리자 재희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가 원하는 걸 눈치챘지만 부끄러워서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았다.
무혁이 그런 재희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한 재희는 결국 뻣뻣하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무릎 끝에 걸터앉았다.
무혁이 재희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얹었다.
재희는 무혁의 팔을 매만지며 말했다.
“할머니는 미워도 아버지는 미워할 수 없는걸요.”
“그래.”
“기억나요? 재혁이가 사라졌을 때 해준 얘기요.”
애정을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였다.
7살 겨울. 아버지가 저를 껴안고 친모를 부르며 울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도 재희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했다.
재희 탓하지 마.
재혁이 사라졌던 그 날 신채근이 한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아버지는 그냥 하신 말씀이시겠지만, 그 말이 그렇게 좋았어요. 모두 내 탓이라고 할 때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으니까.”
재희를 끌어안은 무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작 재희는 사소한 그 한 마디 때문에 당신을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었는데, 당신은 자신의 딸이 아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무혁은 신채근을 더 용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회사가 파산을 하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인연을 끊었다고 재희 스스로 말했지만, 이렇게 기사를 찾아보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아버지의 일이 재희의 마음 한쪽 구석에 가시처럼 남아 있겠지.
무혁은 그것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장인어른 일은 신경 쓰지 마.”
“그래야겠죠. 제 일도 아닌데.”
재희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혁이 조심스럽게 재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중단된 공사 건은 KJ 건설에서 진행하기로 했어.”
“네? 그게 무슨.”
아버지의 회사가 위태롭다는 걸 들은 건 며칠도 되지 않았다.
출장 준비를 하면서 언제 그런 일까지 처리하고 있었는지.
재희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무혁이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장인어른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야.”
“…….”
“재희 너를 위해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