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방문 (95/128)


#95화. 방문
2022.09.26.


KJ 건설 상무실.

무혁은 심각한 얼굴로 윤 비서가 보고한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믿기지 않는 듯 살폈지만,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무혁이 착잡한 목소리로 윤 비서에게 물었다.


“네. 최근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엎어지면서 어음을 막지 못해 자금난이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 중이던 공사도 멈췄고요. 아마도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정도면 단기간에 벌어진 일이 아닐 텐데.”

“아마도 상무님과 사모님께서 맞선을 볼 때부터 사정이 아슬아슬했던 것 같습니다.”

무혁은 미간을 좁히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재희의 아버지, 신채근의 회사 재정 보고서였다.

무혁이 신채근의 회사에 대해 알아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같은 건설업 쪽이다 보니 알음알음 정보가 귀에 들어왔었는데, 최근 재정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혁은 곧바로 윤 비서에게 확인해 보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아무리 재희를 그런 취급한 집안이어도 어쨌든 장인어른이었다.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재희에게 해가 갈까 봐 미리 알아두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할 정도야.’

길면 두어 달, 짧으면 한 달.

신채근의 회사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집안끼리 맺어진 결혼이니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오고 가는 금전적인 거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재희의 아버지 신채근은 단 한 번도 자금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신채근은 재희가 딱 한 번 그 집에 갔을 때를 제외하고 마치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왜?’

신채근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점점 더 깊은 의문이 들 무렵 무혁은 뜻밖의 손님 방문 소식을 들었다.

한유라의 아버지 한진근이었다.


“자네 대체 우리랑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건가!”

대뜸 상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한진근이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웬만해서는 직접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한 한진근 회장이었다.

그만큼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었지만, 한유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온 듯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진근이 몸소 찾아올 거라 예상하였던 무혁은 윤 비서를 내보낸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태연한 그 태도에 더 화가 난 한진이 버럭 고함을 쳤다.


“시치미 떼지 말게! 우리 유라가 검찰에 송치됐어! 자네 짓인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원한이라.”

무혁이 새삼스러운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한진근에게 시선을 두었다.


“한유라 씨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나 봅니다.”

“뭐야?”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출력해두었던 자료를 한진근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뭔가.”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시는 게 더 확실하여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한진근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종이를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종이를 빠르게 넘기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이걸 나더러 믿으란 건가.”

“따님을 많이 믿으셨나 봅니다.”

한진근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다시 종이를 넘겼지만, 몇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종이에는 한유라의 그간의 행태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눈 뜨고 보지 못할 클럽 하데스에서의 모습은 물론, 부모의 눈이 닿지 않는 해외에서 저지른 온갖 갑질과 사고를 돈으로 무마해온 것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믿지 못할 내용은, 유라가 의도적으로 무혁과 재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계략을 짜왔다는 것이었다. 5월의 연회에서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악랄한 딸의 행동에 한진근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클럽 하데스 관련으로 기사가 나갔을 겁니다.”

“…….”

“대비책을 세우셔야 할 겁니다.”

“강 상무! 우리 이럴 사이가 아니잖나. 고작 그 5월의 연회에서 장난쳤다는 이유로…….”

“장난?”

무혁의 기세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언론에 조작한 사진을 제보하여 내 아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행동이 장난입니까.”

한진근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 사이 무혁이 화를 한껏 누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사태 파악이 안 되시나 봅니다.”

“강 상무.”

“한유라는 감히 내 아내를 건드렸습니다. 그것도 악질적인 방법으로.”

“그건…….”

한진근은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자료에는 한유라가 일강 방송사에 제보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딸을 믿어보려고, 증거가 너무 확실했기에 한진근은 할 말이 없었다.


“미리 자료를 넘겨 드린 것도 많이 양보해 드린 겁니다.”

“미안하네. 내 딸자식을 잘못 키웠네.”

결국 한진근은 자존심도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나 무혁은 냉정했다.


“사과는 따님이 제 아내에게 해야 했습니다.”

“……!”

“따님은 그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 버렸고.”

한번 말을 끊은 무혁이 힘주어 말했다.


“이제 그 대가를 돌려받아야 할 겁니다.”

“강 상무!”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한진근이 돌아간 뒤 무혁은 갑갑하다는 듯 타이를 조금 풀었다.

클럽 하데스 사건으로 뉴스에선 회사명이 대대적으로 뜰 예정이었다. 클럽 하데스에 드나든 이들 역시 문책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가 아는 한진근의 성격이라면 뉴스에 한유라의 이름이 뜨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징역살이는 불가피할 터였다.

회사 주식을 지키기 위해 한진근은 자식 한 명쯤은 기꺼이 내칠 성격이었다.

더불어 유라에겐 그간 저지른 행적이 꼬리표처럼 붙게 되었으니, 한진근은 그녀를 평생 감시할 터였다.

생각 정리를 끝내고 막 일에 집중하려던 차에 내선이 울렸다.


“무슨 일입니까.”

-상무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그게…….

윤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답지 않게 다급하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자, 재희가 보였다.

복도에 걸린 명화를 감상하며 무혁을 기다리던 재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혁 씨.”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그냥, 유라 씨 만나고 집에 가려다가 생각이 바뀌어서요. 문득 오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혁 씨 보고 싶기도 해서요.”

무혁이 말없이 바라보자 재희가 머뭇거리다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약속 없이 찾아와도 된다고, 예전에 그래서. 저라면 상관없다고 해서요.”

두서없는 말에 무혁은 대답 대신 재희를 안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재희가 문에 등을 기댄 채 무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혁은 엄지로 재희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이윽고 손을 입술로 옮겼다.

평소에 쓰던 립스틱과 다른 짙은 색의 립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옅게 발랐지만 선명한 붉은색이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무혁의 시선이 한참을 재희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의 시선이 부끄러워진 재희가 슬쩍 무혁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무혁은 다시 재희의 입술을 문지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 바르던 거랑 다른 색이네.”

가라앉은 목소리에 무혁의 갈증이 한껏 담겨 있었지만, 재희는 눈치채지 못한 듯 웃어 보였다.


“생일 때 희수가 선물해 줬어요.”

“잘 어울려.”

재희는 립스틱이 옅게 묻은 무혁의 엄지를 매만지며 예쁘게 웃었다.


“몰랐으면 조금 화낼 뻔했어요. 오늘 처음 발랐거든요.”

“모를 리가.”

이렇게 입 맞춰 달라고 유혹하는 입술인데.

무혁은 그 말은 삼켰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제어가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출장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무혁은 틈만 나면 재희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매일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보는 얼굴이지만 사소한 움직임 하나 놓치기 아까웠다.

무혁은 재희를 받쳐 들어 자신과 시선을 맞추도록 했다.

재희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하니 한진근과의 기분 나쁜 대화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운 듯 살짝 볼이 발그레해진 재희가 무혁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시발점이었다.

오래된 갈증을 털어내듯 무혁이 단번에 맹수같이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평소보다 진득하고 눅진한 입맞춤에 재희가 무혁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남편의 뜨거운 숨결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훑는 듯했다. 숨 막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입맞춤에 재희는 속절없이 무혁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무혁의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당황한 재희가 입술을 떼려 하자, 무혁이 경고하듯 더 깊게 입을 맞췄다.

마치 이 품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듯, 더 깊고 진한 입맞춤이었다.

무혁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넓은 소파에 재희를 눕혔다.


“저, 무혁 씨. 여긴 사무실인데요.”

“알아.”

무혁이 타이를 완전히 끌어 내리고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재희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낮이기도 하고요.”

“응.”

무혁이 자잘하게 입맞춤을 흩뿌리며 대충 대답했다.

그의 숨결에 닿은 곳마다 피부가 화끈거렸다.

시선을 내리자 살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남편의 너른 가슴 근육이 보였다. 재희가 조심스럽게 근육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CCTV도 있을 텐데.”

“내가 있는 동안은 돌아가지 않아. 오래전부터 그렇게 일해왔어.”

사무실이 비어 있을 땐 CCTV를 켜 두었지만, 무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땐 꺼두었다.

무혁의 오랜 습관이었다.

문득 재희가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무혁이 이해되지 않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또 이렇게 무혁 씨에 대해서 하나 알아서요.”

“…….”

“또 말해줘요.”

같이 돼지껍데기를 먹었을 때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직도 재희는 무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별 것 아닌 작은 부분이라도 알게 된 게 진심으로 기쁜지, 재희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무혁을 바라봤다. 무혁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리며 재희의 귓가에 가볍게 입 맞췄다.


“직접 현장을 살펴보는 걸 좋아해. 내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

뺨에 살짝 닿았다가 사라지는 감촉에 재희가 간지러운 듯 살짝 움츠리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요?”

“이렇게 업무를 뒤로 미루고 누군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어.”

무혁이 가만히 재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재희여서 가능한 거야.”

이 자리에 재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약속을 잡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무실에 방문해도 되는 사람은 재희, 단 한 사람뿐이란 것.”

재희는 무혁조차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참 많이도 알게 해 주었다.


“소중한 사람을 이 품 안에 두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우면서도 벅찬 감정인지 알게 해 준 게 재희라든가.”

그래서 소중하고 또 소중한 사람, 단 하나뿐인 나의 아내.

나의 재희.


“이 모든 게.”

무혁은 잠시 말을 끊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듯 무혁의 말을 듣던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부르려다 이어진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재희여서 가능했구나. 재희니까, 재희여서, 그 누구도 아닌 재희니까.”

무혁이 몸을 조금 일으켜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무혁은 놀란 듯 굳어버린 재희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쓰다듬었다.


“사랑해.”

어쩌면 식상한 이 말조차도 무혁이기 때문에 이다지도 달콤하게 들리는 게 아닐까.

재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말이 입속을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재희는 반드시 무혁에게 해줘야 할 말은 알고 있었다.


“사랑해요. 세상 누구보다 더.”

화답하듯 무혁이 입 맞춰왔다.

오랫동안 무혁과 재희는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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