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일러스트 한 장의 인연 (93/128)


#93화. 일러스트 한 장의 인연
2022.09.19.


라윤 갤러리 앞에 대형 세단이 멈춰 섰다.차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갤러리 직원들은 세단을 힐끔힐끔 보며 출근을 서둘렀다.

갤러리 직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차주, 무혁은 재희의 안전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다.


“갤러리 바로 앞에 세우면 눈에 띌 텐데.”

사람들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재희가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팅때문에 밖에선 내부는 보이지 않아.”

평소처럼 아래쪽에 세워달라고 했으나, 무혁이 고집스럽게 갤러리 바로 앞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재희가 어머니 며느리인 걸 다 알게 된 마당에 상관없어.”

“그래도요.”

툭, 안전벨트가 풀리자 무혁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눈을 살짝 내리뜬 무혁의 얼굴을 보던 재희는 순간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다.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무혁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 그게.”

순간 당황한 재희와 달리 무혁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답지 않게 이성보단 감정이 먼저 앞섰다.

커다란 몸을 깊게 숙여 아래에서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당황과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재희를 빤히 보며 무혁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곤 자신의 볼을 감싼 재희의 손목에 가볍게 입 맞췄다.

흰 손목에 옅게 보이는 푸른 핏줄을 따라 수 없이 입 맞추면서도 무혁은 재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비스듬한 남자의 짙은 시선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재희는 어느 때보다 짙은 그 시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무혁 씨.”

제 볼을 감싼 재희의 손을 쥐고 손가락 하나하나 무혁은 소중하게 입 맞췄다.

손가락 키스일 뿐인데도 가슴이 뻐근해져 재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먼저 시작한 건 재희, 너야.”

재희는 잡아먹어 버릴 것처럼 제 위로 드리워진 무혁을 긴장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무혁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자, 재희가 약하게 어깨를 떨었다.

무혁의 너른 어깨너머 하얀 건물의 라윤 갤러리가 보였다.

왠지 죄를 짓는듯한 묘한 기분에 재희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의자 가죽 시트가 남자의 무게를 못 이겨 뿌드득 소리를 내었다. 몸 위로 남자의 묵직한 무게가 실리고, 커다란 손이 여자의 작은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남자의 숨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긴장한 여자가 움츠렸다. 남자가 부드럽게 뺨을 만져주며 여자의 입술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

부드러운 손길, 부드럽게 다가온 입술, 그리고…… 절대 부드럽지 않은 남자의 입맞춤.

거친 입맞춤에 여자의 살짝 숨이 차오를 때쯤 남자가 먼저 입술을 뗐다.

막 잠에서 깬 듯한 눈으로 저를 보는 재희를 보며 무혁이 가만히 속삭였다.


“다녀와.”

재희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 * *

라윤 갤러리에 들어설 때부터 재희는 자신을 보는 시선이 좀 달라졌음을 느꼈다.

직원들이 어색하게나마 먼저 인사를 해 왔고, 거기다 안 보는 척 힐끔대는 시선까지. 재희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오셨습니까. 작은 사모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한 비서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곧바로 관장실로 모시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대답은 했지만, 재희는 더 이상 비서실에서 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비서실에 들어가자 5월의 연회 전까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재희는 어색하게 마주 인사하곤 도망치듯 관장실로 들어갔다.

관장실로 들어가자마자 혜란이 반겼다.


“재희야. 어서 오렴.”

“간밤에 편히 주무셨어요?”

“물론이지. 자, 여기 앉으렴.”

테이블엔 미리 준비된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다.


“아침에 무혁이가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었더구나.”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네가 내 며느리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뭐. 무혁이가 눈치 봤으면 내가 화냈을 거야.”

시원한 혜란의 말에 재희는 웃음으로 답했다.

혜란은 손수 재희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오늘 미셸과 만나기로 했다고?”

“네. 전시회 관련으로 논의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정리할 일이 있나 봐요. 출국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해서요.”

전시회 논의를 수락하고 며칠 뒤, 세라가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미셸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용건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 미셸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너였으니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

혜란은 일러스트 한 장으로 어떻게 이런 인연이 이어지는지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재희라는 사람 한 명이 새로 들어왔을 뿐인데, 남편과도 아직은 어색하지만 전처럼 가시를 세우며 싸우지 않았다.

오늘은 몇 마디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강진과 아침 식사를 했다.

심지어 아침 먹기 전에 강진이 물을 먼저 따라주었다. 따로 먹었던 지난 몇십 년간의 아침을 생각한다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참 신기한 인연이지.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아이가 우리 집을 바꾸고 내 평생의 숙원을 이뤄주다니.’

만약, 맞선 자리를 중간에 가로채지 않았더라면, 재희가 자신의 심술 때문에 정말 무혁과 헤어졌다면, 유라를 며느리로 삼았다면……. 생각만으로도 혜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확실한 건 재희는 혜란에겐 커다란 복덩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무혁이는 잘해주고 있고?”

“네. 잘해주고 있어요.”

“속 썩이면 언제든 말하렴. 내가 버르장머리를 고쳐둘 테니.”

혜란의 장담에 재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려워하는 기색이 사라진 솔직한 웃음에 혜란이 마치 딸 보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자 혜란은 본론을 꺼냈다.


“오면서 느꼈겠지만, 널 더 이상 비서실에 두지 않을 거란다.”

“네. 알고 있어요. 어머니.”

“서운하니?”

“아뇨. 제가 비서실에 있으면 직원들이 불편할 테니까요.”

말을 끝맺으며 재희는 찻잔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전시회가 끝나면 라윤 갤러리를 다니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기획팀을 하나 새로 꾸릴 거야.”

“기획팀이라 하면…….”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전시회를 전담할 팀이야.”

미셸이 수락한 이상 혜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전담 기획팀은 반드시 필요했다.


“앞으로 재희, 네가 힘들어질 거야.”

미셸이 전시회를 재희와 진행하고 싶다고 직접 언급까지 한 터였다.

그러니 이 일에선 재희는 결코 빠져선 안 되었다.

재희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혜란은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재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신 팀장.”

팀원으로서 일할 생각이었던 재희는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얼떨떨한 얼굴로 혜란을 바라보았다.

혜란은 그런 재희를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말해두지만, 내 며느리여서 너에게 그 자리를 맡기는 게 아니야. 미셸이 원하기도 원했지만, 난 네 능력을 높이 사는 거야.”

“…….”

“다시 말해서 네 능력이 부족했다면 아무리 미셸이 그렇게 말해도, 또 내 며느리라 해도 이런 자리에 앉히지 않아.”

“어머니.”

“한 비서에게 각 팀별로 우수한 직원 명단을 추려두라고 말해두었어. 그러니 함께할 직원들은 재희, 네가 직접 고르도록 해.”

혜란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새로운 팀이 꾸려지면서 재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숙제였다.


“그렇게 알고 오늘부터 일주일간 휴가를 줄 테니 푹 쉬고 와.”

일주일 뒤면 무혁이 출장을 가는 날이었다.

둘을 배려한 혜란의 마음 씀씀이에 재희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렇게 좋을까.’

며느리가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혜란은 뿌듯했다.

* * *

관장실에서 나오자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재희가 주춤거리다 용기를 내 다가갔다.


“저,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비서실 직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신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다분한 직원들을 이해한 재희가 이만 나가려 할 때 미경이 입을 열었다.


“우리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존대하고 있지만,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미경은 평소와 같았다.

비서실 직원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잘 부탁드린다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제야 불편함과 어색함이 사라진 재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 * *

라윤 갤러리에서 나온 재희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재희가 도착한 곳은 룸이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카페와 한정식 둘 다 운영하는 곳으로, 도화가 있어서인지 세라가 식당에서 보길 원했다.


“언니!”

직원의 안내를 받아 커다란 방으로 들어가자 한쪽에서 그림 그리며 놀고 있던 도화가 화색을 띠며 달려왔다.


“도화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오늘도 공주님 같아!”

재희가 반가운 얼굴로 품에 달려든 도화를 안아주고 있는데, 차를 마시던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화야. 인사부터 해야지.”

품에 안긴 채 애교 많은 웃음을 지으며 도화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오.”

“응. 도화도 안녕?”

재희는 그런 도화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며 화답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이쪽에 앉을까요.”

세라의 권유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도화가 쪼르르 재희 바로 옆에 앉으며 그리고 있던 그림을 보여주었다.


“언니. 이거 내가 그렸어. 어때?”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재희는 깜짝 놀랐다.

도화가 그린 그림은 도용당했던 자신의 그림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그린 거였다.

거기다 자신이 표현하길 원했던 느낌과 분위기를 절묘하게 캐치한 7살 아이의 실력에 재희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잘 그렸어. 도화가 그린 거야?”

“응!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에 있는 그림이야.”

“동화책?”

“응. 동화책!”

도화가 스케치북을 다시 가져가더니 마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흥얼거리며 그림에 집중하는 도화를 보며 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화가 아주 많이 아팠어요.”

“도화가요?”

“프랑스에 넘어간 지 얼마 안 돼서 갑자기 아팠죠. 할 수 있는 치료는 모두 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는지 나중엔 잘 걷지도 못하더라구요.”

그때 생각만 해도 세라는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이혼을 뜯어말리며 모진 소리를 한 할머니에게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프랑스로 갔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으로 아이까지 아픈 것 같아서 죄책감에 하루하루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때 도화가 봤던 게 동화책에 실린 그 그림이었어요.”

많은 동화책이 있었지만, 도화는 유독 그 그림을 좋아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 그림을 보고 또 보고 따라 그리기도 했다.

도화가 점차 웃을 줄 알게 되고 건강을 되찾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왜 좋아하는지 물어봤는데, 그냥 좋다고 하더라구요. 이유 없이 그냥.”

그래서 세라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간절히 찾았다.

병원 생활에 지친 도화가 다시 기력을 찾을 수 있게 해준 건 모두 그 그림 한 장 덕분이었으니까.


“…… 도화가.”

재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이 도용당해서 가슴이 아팠지만, 자신의 그림이 어디서든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의 그림이 한 아이에게 희망이 되었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오르며 목이 멨다.


“에이전시에다 요청도 했지만, 찾기 힘들었죠. 그 그림 하나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만난 거죠.”

“몽마르트르.”

재희가 답하듯 말하자, 세라의 웃음이 진해졌다.


“맞아요. 그날, 도화와 당신이 만난 거예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세라는 충동적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너무 기뻤어요. 우리 도화의 은인과 만났다는 사실이. 다시는 한국에 발 디딜 생각은 없었지만, 은인을 찾아만 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고작 그림 한 장 때문에…….”

“고작 그림 한 장이 아니에요.”

세라는 목이 마르는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그림 한 장은 저와 도화의 삶을 바꿨고 커다란 기적을 가져다주었어요. 도화가 건강해졌으니까요.”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화에게 시선을 두며 세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라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니에요.”

“그럼…….”

“재희 씨가 일러스트레이터 본인이었어도, 그 여자처럼 우리 도화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절대 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유라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했을 때, 세라는 지체 없이 전시회 논의 자체를 거절했다. 그런 여자를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찾은 라윤 갤러리와 일하고 싶지 않았다.


“5월의 연회를 마치고, 재희 씨가 도화에게 선물을 주며 말했죠.”

선물 받은 작은 샹들리에는 도화의 보물상자 속에 모셔져 있었다.

도화는 매일 밤 자기 전에 행복한 얼굴로 보물상자를 열어 샹들리에를 구경하다 잠들곤 했다.


“5월의 연회는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적어도 도화에겐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5월의 연회에서 유라 때문에 넘어졌어도, 재희의 바람대로 도화는 그 일을 싹 잊었다.

5월의 연회는 어땠냐는 질문에 도화는 재희와 무혁을 다시 만나서 너무너무 좋았다고 대답했었다.


“그 말 듣고 결심했어요. 재희 씨와 함께 일한다면 적어도 내 선택에는 후회는 없을 거라고.”

“…….”

“화가인 미셸이기 전에 도화의 엄마예요. 내 딸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사람과 어떻게 일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세라가 고개를 숙였다.

놀란 재희가 만류하려다, 이어진 세라의 말에 멈칫했다.


“고마워요. 재희 씨. 내 딸이 건강을 되찾게 해줘서.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어서.”

비밀 친구였던 무혁과 소중한 노을 서점, 그리고 서점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이어준 귀한 인연. 재희는 자신의 그림 한 장이 이뤄낸 작은 기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겨울에 도화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재희의 말에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보여주고 싶은 곳?”

“제가 그 그림을 그리게 된 곳.”

“…….”

“겨울에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재희의 말에 세라의 눈가가 조금 발개졌다.


“꼭 갈게요. 겨울이 기다려지네요.”

새로운 손님이 오게 될 겨울의 노을 서점이 재희 역시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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