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노을 서점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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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노을 서점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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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노을 서점 다락방
2022.09.15.
어긋난 문지방에 걸린 낡은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어 서점 안은 캄캄했다.
항상 불이 켜진 노을 서점만 봐왔던 재희로서는 이렇게 불이 꺼진 내부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일까.
어쩐지 불이 꺼져있어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구분이 되었다.
“조심.”
무혁이 혹시라도 재희가 걸려 넘어질까 봐 미리 주의를 시키며 탁, 스위치를 켰다.
순식간에 적당한 조도의 조명이 서점 안을 가득 채웠다.
“처마 등도 켤까.”
해가 지고 서점 할아버지가 처마 등을 켤 때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희였다.
무혁은 재희의 그 사소한 시선 하나조차도 기억하고 있었다.
재희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켜줘요.”
무혁이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재희는 서점 안에서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무혁이 처마 등을 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기저기 손을 보긴 했지만, 재희가 기억하는 옛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노을 서점은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 처마 등을 켜는 남자의 그림자를 그려냈다.
어두운 바깥은 처마 등으로 인해 환하게 밝혀졌다.
정말로 노을 서점에 돌아왔단 생각에 재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재희는 서점 안으로 들어온 무혁의 손을 잡았다.
“무혁 씨. 저 무혁 씨랑 꼭 가고 싶은 장소가 있어요.”
“나 역시.”
“혹시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마도.”
재희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삐걱, 두 사람의 발자국을 새기듯 마룻바닥이 걸음을 따라 낡은 소리를 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일전에 민석 때문에 재희는 미처 이 다락방에 올라가지 못했다.
“기억나요? 예전에 제가 무혁 씨는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던 거.”
“기억나.”
“전 처음 올라간 이 다락방이 너무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 무혁 씨랑 꼭 같이 오고 싶어서 물어본 거였어요.”
재희의 말에 무혁이 보일 듯 말 듯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무심했군.”
“맞아요. 무혁 씨는 너무 무심했어요.”
재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두어 걸음 먼저 올라갔다.
무혁이 재희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
재희가 돌아보자 무혁이 진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재희는 이렇게 몽마르트르 계단에서 무혁과 마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무혁에게 비밀 친구에 대해 말했었던 몽마르트르 계단.
그때와 같은 상황에 재희는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밀 친구, 무혁이 입을 열었다.
“어디든 상관없었어.”
“무혁 씨?”
“재희가 있는 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으니까.”
“…….”
“설령 그곳이 폐가라고 하더라도.”
무혁의 말에 눈을 크게 뜬 재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재희가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몽마르트르에선 재희가 먼저 계단을 올라갔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희가 살짝 손을 당기자 무혁의 커다란 몸이 이끌리듯 계단에 한걸음 올라섰다.
“전 폐가는 무서워서 싫은걸요. 그렇지만 더 멋진 곳을 알아요.”
계단은 좁았지만, 나란히 무혁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다락방 앞에 다다른 재희가 기대에 찬 얼굴로 손으로 문을 짚었다.
옛날, 처음 다락방에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났다.
좁고 낡았지만 정성스럽게 손질된 내부. 왠지 안락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종종 잠들곤 했던 다락방. 가물가물 눈이 감기려 할 때 본 작은 창 너머 하늘이 무척이나 예뻤었다.
언젠가 꼭 비밀 친구에게 이 다락방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잠들곤 했었다.
언젠가 함께 보고 싶었던 다락방 너머의 세상을 드디어 무혁과 본다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기대해요. 정말 멋진 곳이거든요.”
정작 무혁보다 더 기대에 찬 재희가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기름칠이 된 다락방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
다락방 안을 본 재희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다락방을 처음 본 그때처럼 재희는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무혁이 뒤에서 재희의 허리를 안아 귓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손잡이를 쥔 재희의 손에 힘이 풀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재희가 중얼거렸다.
“이건.”
좁고 낡은 다락방.
다락방은 그때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다락방에서 딱 하나 변한 게 있다면, 지붕을 따라 비스듬하게 나 있는 창문이었다. 언제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예전보다 더 넓어진 창문 너머로 달이 보였다.
“…….”
재희가 조심스럽게 다락방 안으로 들어갔다.
몸집이 큰 무혁까지 들어서자 다락방은 더 좁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재희는 천천히 다락방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등받이 쿠션과 재희가 좋아하는 책, 간단한 색연필과 스케치북 등 미술용품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고 있었어요?”
“내가 없을 때면 여기서 시간을 보냈었다고 작은할아버지께 들었어.”
한번은 재희가 보이지 않자 무혁이 서점 할아버지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재희는 다락방에서 자고 있다. 방해하지 말아라.”
서점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혁은 재희가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렸다.
재희의 휴식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재희가 깨서 내려오면 다시 평범한 대화를 나누던 나날.
“여길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다고.”
“맞아요.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많이 좋아하셨던 장소라고 말씀하셨어요. 왜인지 알 것 같았어요.”
그 집에서도 유일하게 숨을 틔울 곳은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엄마가 좋아하셨다는 자신의 방이었다.
그러나 재희에게 이 다락방은 그 방과 다른 의미로 편안했다.
아마 노을 서점 자체가 주는 안락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 지금 재희는 다른 의미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남자를 끌어안기엔 재희는 작고 버거웠지만 그래도 힘껏 무혁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무혁이 재희의 허리와 머리를 감싸고는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깨끗한 러그가 깔린 나무 바닥은 푹신했다.
재희는 무혁의 팔을 짚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노을 서점처럼 자신을 품는 커다란 남자.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그의 어깨너머로 다락방의 넓은 창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이 보였다.
재희의 시선이 다시 무혁에게 닿았다.
무혁이 가볍게 재희의 눈가에 입 맞췄다.
“전해주기까지 너무 늦었어.”
“아니에요. 전혀 늦지 않았어요.”
무혁의 코끝이 재희의 코끝에 닿았다.
짧은 거리를 두고 서로의 숨결이 닿았다.
당장이라도 덮칠 듯 말 듯 했지만 남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남자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분 좋은 숨 막힘에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엄지로 가만히 쓸었다.
여자의 도톰한 입술이 남자의 손길에 따라 쓸렸다.
“사랑해.”
남자는 여자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희고 긴 목덜미를 강조한 드레스는 처음 볼 때부터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아무리 눈에 담아도, 아무리 목덜미에 코를 박고 마음껏 여자의 향기를 들이마셔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남자는 도톰한 여자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옅은 립스틱 향과 보드라운 입술이 남자를 자극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의 입술, 코끝, 뺨, 이마 등 내키는 대로 자잘하게 입맞춤을 흩뿌렸다.
여자가 눈을 꾹 감고 남자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움찔 몸을 떨었다.
마치 남자와 처음 닿는 것처럼 부끄럽고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남자의 날것 그대로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물어뜯어야 좋을지, 천천히 먹잇감을 탐색하는 짐승처럼 남자는 여자를 그렇게 하나하나 맛보았다.
충돌.
이내 어디서부터 잡아먹을지 결정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여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뜨거운 숨결이 오가며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빠져들어 쉴 새 없이 서로를 느끼고 빠져들었다.
여자의 손에 남자의 까슬하고 커다란 손이 얽어 들었다.
여자의 손을 꾹 쥐는 남자의 손에 결코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핏줄이 투둑 불거졌다.
서로에게 집중한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달은 다락방 창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지쳐서 눈을 감고 있던 재희의 몸 위로 포근한 담요가 덮어졌다.
남편의 향수가 그윽하게 묻어나오는 담요. 재희는 그 담요를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한 시간에 졸음이 절로 몰려왔다.
이대로 남편과 함께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재희는 5월의 연회가 끝나면 무혁에게 대답해 주기로 한 게 있었다.
“무혁 씨. 저 할 말이 있어요.”
등 뒤에서 무혁이 재희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작은 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재희야. 내가 먼저 말할게.”
언제나 재희의 말을 먼저 들어주던 무혁이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혁이 가만히 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어쩐지 중독될 것 같았다.
“이번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면 아버지와의 거래는 완전히 끝난다.”
“알아요.”
“그리고 재희, 너 역시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
“겨울.”
재희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가 이 노을 서점에 찾아왔던 그때처럼.”
“…….”
“겨울까지 돌아올게.”
겨울까지는 긴 시간이었다.
무혁은 그 긴 시간을 자신 없이 견딜 수 있는 걸까.
‘난 안 될 것 같은데.’
재희는 무혁의 손을 가만히 쓸었다.
“약속할 수 있어요?”
“그래. 반드시.”
“나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하면요?”
무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혁이라고 왜 재희와 같이 가고 싶지 않겠는가.
사실 속으로는 몇 번이고 재희에게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래도 무혁이 선뜻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노을 서점을 지켜왔던 건 너를 위해서였어. 네가 행복해지길 바랐으니까.”
깊은 울림이 담긴 무혁의 진심에 재희는 슬프게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재희가 무혁의 손을 풀며 돌아누웠다.
“왜 내 삶에서 무혁 씨를 빼요?”
채도가 낮은 다락방의 불빛 아래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왜 무혁 씨와 함께 있어야 제가 행복하다는 걸 생각하지 못해요?”
비밀 친구도 그랬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재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비밀 친구.
재희가 아무리 얼굴을 보고 싶어 해도 보여주지 않던 비밀 친구.
비밀 친구 나름대로 딱 이 정도 선이 좋다고 말했었다.
재희는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는 비밀 친구가 내심 서운했고 가끔은 미웠다.
“왜 내 행복을 무혁 씨가 멋대로 정하는 건데요.”
재희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남편의 사랑이었다.
서러움이 담긴 재희의 목소리에 무혁이 가만히 이마에 입 맞췄다.
그 다정한 입맞춤에 재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린 부부예요. 그때처럼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그런 친구 사이가 아니라구요.”
“그래. 우린 부부지.”
그때와 달리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재희가 있었다.
그래도 무혁은 재희가 너무 소중해서 선뜻 손을 대기도 두려웠다.
재희가 상처를 받길 원치 않았고 힘든 일은 몰랐으면 했다. 과도한 그만의 방식이 결국 재희에게 상처를 주었고,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었단 걸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 삶에서 재희를 너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 없어.”
“……그런데 왜 저를 두고 가려고 해요.”
사실 재희는 혜란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아직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무혁을 따라가고 싶었으나, 라윤 갤러리 일도 있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자신조차도 어떤 걸 원하는지 모르는데 무혁이 먼저 혼자 가겠다고 하자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부부니까. 재희,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건 당연한 거야.”
“말했잖아요. 왜 내 행복에서 무혁 씨를 빼버리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아.”
“…….”
“노을 서점을 그려와서 나에게 보여줬던 그날 네 목소리를 난 아직도 기억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처음으로 그렸다며 수줍게 보여주었던 노을 서점 일러스트.
그때 무혁은 잘 그렸다는 말 밖에 할 줄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부부니까, 남편으로서 무혁은 누구보다 재희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때 생각했어. 정해진 길만 살아온 내게 처음으로 일탈을 알려준 네가 좀 더 웃었으면 좋겠다고.”
“…….”
“지금이 기회란 건 재희,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맞아요. 기회는 맞아요. 그렇다고 무혁 씨 혼자 보내긴 싫어요.”
“난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너를 사랑하고 싶다.”
“…….”
“그렇다면 오랫동안 끌어왔던 이 거래를 매듭짓는 게 맞겠지.”
무혁은 대답 없는 재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약속할게. 빨리 돌아올 테니까.”
“…….”
“돌아오면 항상 같이 있으면서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더 많은 걸 하자.”
재희는 괴로운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또렷한 눈으로 무혁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약속할 수 있어요?”
“그래. 이젠 숨기는 것 없이 온전히 사랑하자.”
“무혁 씨는 비겁해요.”
재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출장 가기 전까지 저랑 최대한 시간을 보내요.”
다시 돌아올 무혁이지만, 그래도 재희는 최대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 무혁 씨를 기다려줄 수 있어.’
무혁은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 홀로 긴 시간을 이곳을 지켜왔었다.
그러니까 재희는 기다려줄 수 있었다.
이곳 노을 서점에서, 무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