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미셸의 대답 (90/128)


#90화. 미셸의 대답
2022.09.08.


계획되어 있었던 5월의 연회는 결국 해가 질 무렵에 끝을 맺고 말았다.

한유라와 박정수는 체포되다시피 끌려나갔고 강진과 우진이 자리를 정리했다.

재희는 무혁과 함께 혜란 대신 세라와 케빈을 배웅했다.


“오늘 안 좋은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재희가 차분한 얼굴로 말하자 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다시 재희 씨를 봐서 저도 우리 도화도 반가웠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리가 되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시회 관련해서는 한번 더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죠. 오해가 있었으니 다시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시회 논의를 하지 않겠다는 확답이 아닌, 여지가 있는 말에 재희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엉망진창이 된 5월의 연회에 조금이지만 볕이 조금 보이는 듯도 했다.

세라의 옷자락을 잡고 번갈아 보던 도화가 활짝 웃었다.


“언니! 나중에 도화 보러 와야 해.”

“응. 꼭 도화 보러 갈게.”

재희가 도화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접었다.

도화와 시선을 맞추곤 재희가 예쁘게 웃으며 라윤 갤러리 로고가 새겨진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자. 이건 도화 선물.”

“우와아!”

냉큼 쇼핑백을 열어본 도화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건 버드나무 조형물을 꾸몄던 도화 손바닥만 한 작은 샹들리에였다.


 


“엄마! 이거 봐! 도화가 갖고 싶어 하던 거야!”

“도화야. 이건 안 돼.”

선물을 확인한 세라가 놀란 얼굴로 돌려주려 하자, 도화가 쇼핑백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재희 뒤로 숨었다.


“재희 씨.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너무 비싸요.”

“어머니께서 도화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재희가 도화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긋 웃었다.


“오늘 좀 엉망진창이 됐지만, 적어도 5월의 연회는 도화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어요.”

세라는 도화와 시선을 마주치며 웃는 재희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도화야.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

세라가 선물을 뺏지 않자 안도한 도화가 크게 꾸벅거리며 인사했다.

재희가 그런 도화를 귀엽다는 듯 보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세라. 이제 가야지.”

케빈이 재촉하자 세라가 재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악수를 한 세라가 차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세라 씨에게 할 얘기가 있어. 잠시 다녀올게.”

“알았어요.”

재희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무혁은 재희 뺨에 가볍게 입 맞춘 뒤 걸음을 옮겼다.

* * *



“잠시 시간 좀 내주십시오.”

케빈이 열어주는 차에 타려던 세라는 무혁을 발견하곤 다시 내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먼저 차에 올라타서 야무지게 안전벨트와 씨름하던 도화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아까 소동을 봐서 아시겠지만, 한유라는 미셸이 찾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닙니다.”

“그건 저도 아까 봐서 알아요. 오해였단 것도 알았고.”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땐 미셸로서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무혁의 말에 케빈과 세라가 얼어붙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케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근거로 지금 그런 말을 하십니까.”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두 분이 하시던 대화를 들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케빈이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우리 목소리가 컸나요?”

흥미로운 얼굴로 세라가 묻자 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제 귀가 지나치게 좋았다고 대답해 두겠습니다.”

“뭐. 좋아요. 우리도 우리 도화의 은인에게 계속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럼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세라 일행을 보낸 뒤 무혁이 돌아왔을 때, 재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잘 돌아갔을까요.”

“다행히 썩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어.”

“다행이에요. 다음엔 세라 씨가 아닌 미셸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역시 눈치채고 있었군.”

“그럼요. 모를 리가요.”

처음엔 재희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미셸은 나타나지 않았고, 세라와 케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못 보던 얼굴이 있을까 살폈지만,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은 한 번씩 본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어렴풋이 세라가 미셸이 아닐까, 짐작했었다.


“미셸도 참석한다고 했는데, 행사 시작하고 나서도 미셸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유라가 방해를 하지 않고 예정대로 만나게 된다면 당연히 알게 될 사실이어서 굳이 묻지 않았을 뿐이었다.

비록 유라의 난입과 박정수의 행패로 엉망이 되었지만, 다행인 건 미셸이 전시회 논의를 완전히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이번 5월의 연회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하지만 이내 재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머니. 괜찮으실까요.”

5월의 연회에서 혜란이 무너지던 모습을 본 재희는 충격에 빠졌다.

항상 자긍심이 넘치던 혜란이었다. 이 소식을 알려드리면 분명 좋아하실 거지만, 그 전에 혜란이 기대를 걸었던 5월의 연회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아서 걱정이 컸다.


“미셸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온다면 기운 차리시겠지. 만약 거기서 한유라가 계속 거짓말하고 우겼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테고.”

걸음을 옮기던 재희가 멈춰 서더니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오늘 터뜨리게 만든 거예요?”

“…….”

“그 상황에 너무 침착해서, 무혁 씨가 계획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부정은 하지 않을게.”

“왜 하필 오늘이었어요?”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무혁의 말은 이러했다.

오늘 일은 유라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나서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재희와 미셸의 만남이 무사히 이루어졌더라면 박정수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터뜨리지 못하도록 사람까지 붙여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라는 무혁의 예상대로 행동했고, 자칫하면 정말로 엎어질 수 있었던 전시회 논의를 다시 고려하도록 돌려두었다.


“유라 씨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오늘 완벽했을까요.”

“글쎄.”

무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언제든 벌어졌을 거야.”

시기만 앞당겨졌을 뿐, 곧 터질 일이었다는 그의 말에 재희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5월의 연회가 엉망진창이 돼버렸어요.”

혜란뿐만 아니라 재희도 공을 들였던 5월의 연회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재희는 무혁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무혁이 아니었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행사가 엉망진창이 될 뻔했다.


“하지만 역시 미셸이 한 말이 어머니에게 더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애초에 이번 5월의 연회의 핵심은 미셸을 영입하는 것이었다.

박정수의 폭로로 엉망진창이 되는 것보다 유라의 거짓말로 미셸이 전시회 논의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말이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당시 혜란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재희는 마음이 내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오해였단 걸 미셸이 알게 되었으니 작은 희망 정도는 걸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셸이 정말 긍정적으로 답을 줄까요?”

“그래. 설사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마.”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감싸며 가볍게 뺨에 키스하려 하자 재희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무혁 씨를 믿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무혁이 대답 대신 가볍게 재희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때 재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가 눈에 띄게 화색이 도는 얼굴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재희 씨. 나예요.

세라였다.

***

라윤 갤러리 관장실.

혜란은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5월의 연회가 엉망진창이 된 건 둘째치고, 당장 이번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부터 막막해졌다.

재희와 미셸을 만나게만 한다면 모든 일이 술술 다 풀릴 거로 생각했고 그만큼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한유라와 박정수의 난입, 적나라하게 드러난 유라의 실체와 박정수. 그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미셸과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하고 파하게 되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미셸의 에이전시 측이랑 잘 얘기해 볼게요.”

 
혜란 대신 재희가 미셸을 배웅하러 나가며 한 말 덕분이었다.

다행히 재희는 에이전시 측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 보였기에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혜란은 유라의 실체를 알게 되어 더 머리가 복잡해졌다.


‘유라가 날 그렇게 생각했었다니.’

어릴 때부터 저를 따르던 아이였다.

거기다 유라는 혜란이 라윤 갤러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5월의 연회 따위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유라의 더러운 속마음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혜란은 더 충격을 받았다.


“가만 넘어가지 않을 거야.”

혜란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 따위 없었다.

박정수가 녹음본으로 폭로한 내용은 둘째치고, 그 이전에 유라가 한 행동으로 인해 미셸과의 전시회 논의도 물 건너갈 뻔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박정수가 증거를 수집해서 폭로했다고 하기엔 그는 너무 어리숙했다. 거기다 뒤 내용은 미처 듣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아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신경성 두통이 다시금 엄습했다.

혜란은 이마를 짚고 소파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댔다. 한 비서를 부를까 고민하던 차에 테이블에 물과 두통약 한 알이 놓였다.


“……?”

혜란이 고개를 돌리자 뒷정리를 하고 온 강진이 보였다.

혜란이 단번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강진이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


“두통 심하잖나. 더 심해지기 전에 얼른 먹어.”

“내가 알아서 해요.”

“고집은 그만 피우고.”

강진이 물과 두통약을 내밀자 혜란은 마지못해 약을 삼켰다.

약 기운이 돌길 기다리고 있던 혜란이 입을 열었다.


“말해두지만 나 이 일 그만둘 생각 없어요.”

“…….”

“나한테 내조나 하라고 속 뒤집는 소리나 할 거면 지금 나가요.”

미리 벽을 치는 혜란을 보던 강진은 대답 대신 관장실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관장실은 혜란의 애정과 자부심, 그리고 성격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오늘 일은 유감이야.”

“…….”

“만약 미셸과 얘기가 잘 안 된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뭐요?”

예상과 다른 강진의 말에 혜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혜란은 농담하나 싶어 강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강진의 얼굴에선 농담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마. 당신답지 않아.”

“하.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 하니 얼떨떨하네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오늘부터 하나씩 알아가면 되잖나.”

강진이 혜란 옆에 조금 더 곁에 붙어 앉았다.

혜란이 ‘이 양반이 미쳤나’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강진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 시집올 때부터 당신은 나를 낯설어했고 영 마음을 붙이지 못했지.”

“예전 일은 왜 갑자기 꺼내요?”

“들어. 그때 당시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바르다고 생각했어.”

“그래서요?”

“당신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어. 굳이 말하자면 내조를 하라고 말한 건 당신을 위해서였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얼마나 여길 아끼는지 알면서!”

“일이 잘 안되면 스트레스받으면서 이렇게 두통을 앓는데 어떻게 계속하라고 말하나. 차라리 마음 편하게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지.”

“그것참 안 고마운 마음 씀씀이네요.”

혜란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자 강진이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남편의 손이지만, 혜란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누구라도 옆에서 위로해 주길 바라서였다.


‘겨우 이깟 일로 마음이 약해지다니.’

강진은 관장실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떤가.”

“무슨 말이에요, 그건 또.”

“라윤을 이미 훌륭한 갤러리로 키워낸 당신이지만, 나 역시 당신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단 소리야.”

예상치 못한 강진의 말이지만, 혜란은 못 믿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뭘 해줄 수 있다고.”

“적어도 미셸 말고도 여러 아티스트들과 연을 만들 순 있지. KJ 그룹에서 후원하는 예술가 중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아티스트들도 많고.”

KJ 그룹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재단에선 걸출한 예술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도 많았고 그중 몇몇은 혜란과 일한 적도 있었다.

라윤 갤러리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저명한 갤러리였지만, KJ 그룹과 손을 잡는다면 더 몸집을 불리고 더 많은 아티스트들을 영입하기에 유리했다.


“좋아요. 나야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래서 거래조건으로 라윤 갤러리한테 뭘 바라요? 계약서 쓰기 전에 미리 먼저 말이나 들어보죠.”

잠시 머릿속으로 득과 실을 계산해 보던 혜란이 사업가로서의 눈을 빛내며 바로 앉아서 강진을 바라보았다.

불리한 조건을 내세우면 가차 없이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진의 입에서 나온 건 혜란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는 나와 시간을 보내.”

“뭐라구요?”

“아침에도 별일 없으면 같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휴가도 같이 가고.”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늦었지만 우리도 여느 부부처럼 살아보잔 소리야.”

“정말 그게 다예요?”

“그래. 사업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부부로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큰놈 부부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달리 생각하게 됐다고 해두지.”

혜란은 강진이 거짓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늘 그랬듯 남편의 얼굴만 보고서는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적어도 강진은 사업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건 혜란도 알고 있었다.


“……좋아요. 나야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강진은 군소리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자 민망해진 혜란은 괜스레 투덜거렸다.


‘저 양반이 정말 뭘 잘못 먹었나.’

그때 관장실 내선이 울렸다.

한 비서 외에는 모두 퇴근했고 공식 일정도 없는데 내선이 울리자 혜란이 의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관장님. 지금 미셸 에이전시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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