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몰락 (89/128)


#89화. 몰락
2022.09.05.



 


<김혜란, 그 잘나신 라윤 갤러리 관장을 말하는 거지, 누굴 말하는 거겠어!>

악에 받친 목소리에 정원 가득 부드럽게 퍼지던 선율이 뚝 멎었다.

장제우와 나눈 대화에서 중간 부분이 통으로 잘렸지만, 틀림없는 유라의 목소리였다.

그러는 사이 5월의 연회가 열리는 정원에 표독스러운 유라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그래. 5월의 연회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지금 멍하니 서서 뭐 하나! 당장 범인을 잡아 오지 않고!”

극대노한 강진이 정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시큐리티가 서둘러 방송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스피커에서는 연신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줌마, 5월의 연회가 아주 중요한 모양인데, 내가 더 빛나게 해주면 그 재수 없는 마음 나한테 다시 돌리겠지.>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유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국내외 VVIP만 참석한 행사에, 그동안 포장해 왔던 자신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것이다.


“잠깐. 이건…….”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스피커에서는 가차 없이 유라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일러스트레이터가 누군지 알 게 뭐야. 선수 치는 사람이 먼저 아니겠어?>

뚝.

시큐리티가 조처했는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던 목소리가 끊겼다.

행사가 열리는 정원에 적막이 깔렸다. 경악한 모두의 시선이 유라에게 쏠렸다.

개중에는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도 섞여 있었다.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유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라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며 칭찬했던 인사들의 시선이 무서워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가운 시선.


‘장제우!’

분명 장제우와 단둘이 있을 때 한 말이었다.

장제우가 자신과의 대화를 녹음해서 누군가에게 넘긴 사실을 눈치챈 유라의 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그제야 장제우가 불참한 이유를 알게 된 유라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죽여버릴 거야. 장제우!’

이번 일을 수습하면 반드시 장제우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유라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혜란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유라, 너…… 네가 감히!”

“아니에요. 어머니. 오해예요. 이건 다……!”

유라가 서둘러 뭐라고 항변하려 하려 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철썩.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라의 고개가 홱 꺾였다. 어찌나 힘이 셌던지 유라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뺨을 감싸며 감히 저를 때린 이를 노려보던 유라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엄마…….”

유라의 뺨을 친 유화연은 화가 난 얼굴로 제 딸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유화연이었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제 딸의 목소리에 충격과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국내외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망신이라니.

오늘 재밌는 일이 있을 거라며, 기대하라고 말했던 유라였다.


“유라야. 이게 네가 말한 그 재밌는 일이니?”

그런데 이게 그 재밌는 일이라면, 유화연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끔찍했다.


“너 대체 지금까지 우리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유화연의 호통에 유라가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다.


“엄마. 그게 아니야! 이건 누가 모함한 거야. 조작한 거라고!”

“이렇게 똑똑하게 네 목소리가 들리는데 모함이라고?”

“엄마. 내 말 못 믿는 거야? 왜 날 못 믿어. 엄마만큼은 날 믿어줘야 하잖아!”

유라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가짜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쌌다.


“한유라!”

고함에 유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빠…….”

유라는 대노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 한진근을 두려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목소리 정말 너냐?”

“그게 아니라.”

유라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한진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집안 망신도 유분수지. 오늘 이 일, 집에 가서 낱낱이 다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한진근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었다.

한번 수가 틀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유라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아빠. 설명할 것도 없어. 요즘 목소리쯤이야 조작하기 쉽잖아.”

유라는 그런 아버지의 눈을 피해 해외로 돌았다.

한국에 와서 굳이 독립한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잘못되면 유라는 영영 아버지의 눈을 벗어나기는커녕 평생 감시받으며 살 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빠. 알잖아.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얌전히 살았는지. 그런데 어떻게 이거 하나 때문에 날 의심해?”

유라가 열심히 설명하려 했지만, 한진근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거 안 놔?”

유라가 열심히 변명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거 놓으라고!”

방송실에 갔던 시큐리티가 거칠게 반항하는 누군가를 끌고 왔다.

끌려 온 남자를 본 사람들의 눈이 다른 의미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시큐리티의 손에 끌려 온 남자는 바로 박정수였다.


“박정수.”

재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의 참석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저 방송을 튼 범인이 박정수란 사실을 재희는 믿을 수 없었다. 재희가 한걸음 나서려 하자,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짚었다.

재희가 돌아보자 무혁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사태를 지켜보라는 그의 생각을 읽은 재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혁 씨. 설마.”

“쉿.”

무혁이 눈짓을 하자 재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박정수가 우악스럽게 시큐리티의 손을 뿌리치고 있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것들이 말이야.”

욕설을 내뱉으며 허겁지겁 구겨진 정장을 펴던 박정수의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바닥에 주저앉은 유라가 들어왔다.

박정수의 입꼬리가 실룩샐룩 떨리며 쭉 올라가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꼴좋다. 한유라. 너 서프라이즈 좋아하잖아. 내 선물 어때? 마음에 드냐? 어?”

뭐에 쓰인 사람처럼 박정수는 주변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듯했다.

유라가 박정수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박정수. 네가 감히.”

자신을 엿 먹인 범인이 바로 박정수라는 걸 알자마자, 이성이 날아간 유라가 벌떡 일어났다.

유라는 박정수의 멱살을 쥐며 소리 질렀다.


“박정수! 네가 감히 날 엿 먹여?”

“그래! 내가 그랬다!”

박정수가 우악스러운 힘으로 유라를 떨쳐냈다.


“지금 내 딸에게 이게 무슨 짓인가!”

그 힘을 못 이긴 유라가 바닥에 쓰러지자, 한진근 회장이 박정수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박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화연의 부축을 받고 있는 유라를 보며 벌게진 눈으로 소리쳤다.


“무혁이랑 재희를 헤어지게 만들라고 나한테 그랬잖아! 어? 난 네 말대로 했는데 결국 나만 망했어. 그러니까 너도 같이 망해야지. 안 그래? 그게 공평한 거 아니냐?”

누가 봐도 박정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저와 유라, 둘만의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박정수는 적나라하게 웃었다.


“미친 새끼.”

유라는 그런 박정수를 보며 처음으로 등골이 섬뜩해졌다.


“미쳤어. 너 진짜 미쳤다고!”

“그래. 나 미쳤다. 그러니까 여기서 네 실체를 다 까발려 주겠다고!”

박정수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미리 저장해 두었던 음성 파일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리 휴대전화에 저장까지 해두었다.


“내가 너 이대로 곱게 끝내줄 것 같아? 기대하라고. 한유라.”

“박정수! 그거 안 내놔?”

유라가 휴대전화를 뺏으려 하자 박정수는 그 손을 피하며 녹음본을 재생시켰다.

휴대전화에서는 박정수가 미처 듣지 못했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냐?>

<뭐?>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신재희랑 강무혁이 이혼하면 날 받아주겠다며. 그래서 내가 일부러 신재희까지 만나서 그런 사진까지 찍었는데!>

클럽 하데스에서 둘이 나눴던 대화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앞부분만 듣고 뒤 내용까지 듣지 못했던 박정수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어, 어. 이상한데. 이, 이게 아닌데.”

박정수가 허겁지겁 녹음 파일을 끄려 했지만, 손이 덜덜 떨려서인지 자꾸만 어긋났다.


<내가 온 언론사에 네 이중적인 모습 다 제보해 버릴 거라고! 어?>

<그럼 정수 오빠도 무사할 것 같아?>

<뭐야?>

<이 클럽 하데스에 나만 왔어? 정수 오빠도 수시로 드나든 거 모를 줄 알아? 같이 죽고 싶으면 해 보던가.>

클럽 하데스.

클럽 이름을 똑똑히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경멸이 떠올랐다.

자신의 자녀가 드나들었다가 이미 호되게 곤욕을 치른 몇몇 사람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박정수!”

뻐억!

고함과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기 무섭게 박정수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박정수의 머리를 후려갈긴 그의 아버지 박금호가 그대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녹음 파일은 재생이 끝나있었다.

불같은 성정의 박금호가 눈을 부라렸다.


“이 새끼가 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휴대전화를 치켜 올려 박정수를 내려치려던 박금호가 마음을 바꿔 그대로 구둣발로 박정수를 걷어찼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박정수가 얻어맞은 곳을 감싸며 바닥을 구르면서도 비굴하게 싹싹 빌었다.

박정수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박금호가 인내하며 봐주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사라졌다는 걸.

이대로 집으로 끌려가면 끝장이었다.

후일이 두려워진 박정수가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박금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장소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추한 아들의 모습에 더 화가 난 박금호가 다시 걷어차기 위해 발을 들자 곁에 있던 비서가 재빨리 뜯어말렸다.


“그만!”

날카로운 혜란의 목소리가 정원을 갈랐다.

혜란이 비틀거리며 강진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혜란이 유라와 박정수를 차례로 훑었다.

혜란의 눈이 혐오가 깃들었다.

가장 고대하고 기대했던 5월의 연회가 엉망진창이 되자 혜란은 머리를 짚었다.

고질병인 신경성 두통이 몰려왔다.


“넌 내 말을 무시하더니 결국 이렇게 돌려주려고 왔구나.”

“어머니! 그게 아니에요. 제가 다 설명을……!”

유라가 혜란에게 다가가려 하자 우진이 그 앞을 막았다.


“감히 어디라고. 다가오지 말지?”

평소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우진에게 숨길 수 없는 혐오가 가득했다.


“김 관장님. 저기,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유 사모님.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더 들으란 건지 모르겠네요.”

뭐라고 하려던 유화연은 혜란의 냉정한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의 자비도 깃들지 않은 혜란의 시선에 유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서던 유라가 주변을 돌아봤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제게 호의적이던 시선들은 이젠 더는 없었다.

유라는 깨달았다.

여기서 끝임을.


‘이건 말도 안 돼.’

유라의 시선이 재희에게 멎었다.

유라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


‘저년만 아니었으면!’

무혁과 함께 서 있는 재희를 보던 유라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다들 너무 순진하네요. 지금 저걸 다 믿어요? 요즘 세상에 목소리쯤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잖아요.”

“유라야. 제발 그만해! 언제까지 이 엄마 얼굴에 먹칠을 할 거니?”

“난 억울하다고!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유화연이 뜯어말렸지만, 유라는 막무가내였다.

유라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차가운 시선만 날아들 뿐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왜 다들…….”

유라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보다 못한 재희가 다가왔다.


“유라 씨. 그만 해요.”

“뭐?”

“지금 유라 씨의 모습을 봐요. 얼마나 보기 흉한지.”

“흉하다고? 내가?”

평소의 느긋한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유라를 재희는 잠시 응시했다.

곧 재희는 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당장 나가요. 여기서. 오늘 있었던 일은 다시 책임을 물을 테니.”

“신재희! 너!”

유라가 손을 치켜들려 하자, 무혁이 그 손목을 잡았다.


“무혁 오빠.”

애달픈 얼굴로 무혁을 올려다보던 유라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조금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무혁이 유라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말에 책임져라.”

4월 23일.

백화점 앞 공원에서 무혁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주장하는 자신에게 무혁이 지금 한 말을 책임져야 할 거라고.


‘그럼 지금 이 모든 일 전부 다…….’

그제야 무혁이 했던 말뜻을 이해한 유라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상이 모두 제 아래로 보였는데, 이제는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밑바닥 끝까지 추락한 기분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 유라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예쁘게 단장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

유라의 히스테릭한 비명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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