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5월의 연회 시작 (84/128)


#84화. 5월의 연회 시작
2022.08.18.


등에 익숙하고도 딱딱한 책장이 닿았다.

재희는 그때처럼 책장을 사이에 두고 무혁과 등을 맞대어 기대앉았다.

그때처럼 불투명한 유리문은 그대로였다. 곧 해가 지려는지 유리문 너머로 울긋불긋한 빛이 번졌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등을 맞대고 앉는 거.”

“그래.”

“이 노을 서점, 무혁 씨가 아버님과 거래를 하면서까지 지켰다고 들었어요.”

“…… 민석이에게 들었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나에게 신나서 전화를 했었어.”

방패가 되어달라고 하더니, 그 사이에 무혁에게 전화한 모양이었다.

못 말려.

재희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무혁 씨. 이 서점 왜 저한테 주려고 한 거예요?”

“…….”

“서점 할아버지는 무혁 씨의 종조부시니까, 당연히 무혁 씨 건데요.”

완전한 남인 재희에게 이 서점의 소유권 따위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무혁이 왜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에게 노을 서점을 주려고 한 것인지, 무혁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언젠가 네가 돌아올 곳을 지키고 싶었어.”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무혁은 책장에 머리를 기대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흘렸다.

왜 그 생각을 안 했을까.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수없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대로 재희를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이 노을 서점을 스쳐 갔던 수많은 사람처럼 재희 역시 그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설령 네가 이 노을 서점을 잊더라도.”

“…….”

“나이가 들어 우연히 한 번이라도 이곳에 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노을 서점을 지켜낸 건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을 테니까.”

노을 서점을 스쳐 지나갔던 이들은 한 번씩은 돌아왔었다.

어떤 이들은 연인과 함께, 아이와 함께, 배우자와 함께, 손자와 함께, 노부부가 되어 손을 꼭 잡고, 그렇게 다들 한 번씩은 노을 서점에 돌아왔었다.

그렇다면 재희도 한 번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무혁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일까.

그때처럼 이렇게 재희와 책장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재희는 유리문에 시선을 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공부하고 취직하고 그렇게 사느라 잘 오지 못했지만, 가끔 왔었어요.”

오늘은 불 꺼진 노을 서점에 불이 켜지지 않았을까, 돌아가신 노을 서점 할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어서 오렴. 재희야.’라고 불러주지 않을까, 그리고 혹시나 비밀 친구를 만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졌고, 수없이 실망했었다.

그래도 재희는 꾸준히 노을 서점을 찾아 왔었다.


“어떻게 잊겠어요. 여기를.”

재희는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책장 사이로 무혁의 손이 보였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무혁이 재희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크고 따뜻한 남편의 손.

재희의 시선이 유리문으로 향했다.

서서히 유리문에 노을이 들이차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 무혁 씨가 비밀 친구인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났고 실망도 했었어요.”

그래서 무혁이 자신을 속인 게 아니길 바라며 스스로 비밀 친구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었다.


“그땐 진심이 아니었어요.”

무혁의 말대로 자신이 비밀 친구임을 부정한다면, 그때 그 서점 할아버지와 비밀 친구와 함께했던 그 시간마저도 부정을 하게 되는 거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무혁 씨는 항상 저에게 진심이었어요.”

감추는 게 많았어도 비밀 친구는, 무혁은 항상 저에게 진심이었다.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진실을 말하기까지 무혁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고심했는지 재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무혁은 자신이 다치더라도 재희가 상처를 입지 않길 바랐음을.

그래서 더 입을 열기 힘들었을 거란 걸.


“고마워요. 무혁 씨. 비밀 친구임을 부정하지 않아 줘서.”

“다른 건 다 들어줄 수 있지만,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어.”

“알아요. 무혁 씨가 그때 부정했다면 우리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재희 역시 다시는 이 노을 서점에 돌아올 일 또한 없었을 터였다.

무혁이,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이 노을 서점을 부정했다면 행복했던 추억은 최악으로 남아 감히 발걸음조차 하기 힘들었을 거니까.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무혁이 선물한 노을 서점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덧 유리문 가득 채워진 저 노을조차도.


“무혁 씨. 저에게 또 미안한 일이 있죠?”

“……그래.”

“뭔데요?”

“곧.”

무혁은 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5월의 연회가 끝난 뒤, 무혁은 곧바로 출장을 갈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재희의 생일날 말했어야 할, 출장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강진과의 마지막 거래인 중동 초고층 빌딩 사업.


“초고층 빌딩 사업 관련으로 출장을 갈 예정이야.”

“언제부터요?”

“5월의 연회가 끝나면 바로.”

“언제 와요?”

“무사히 일을 마친다면 아마 겨울쯤.”

5월의 연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무혁이 한 말은 재희로서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런 중요한 얘기를 지금에서야 하는데도 재희는 실망도, 화도 나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해도 무혁 씨는 갈 거죠?”

“마무리를 위해선 가야 하니까.”

“저도 가야 해요?”

“난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에게 강요할 순 없어. 난 네 선택을 존중할 테니까.”

“바로 대답해야 해요?”

“아니.”

재희는 크고 따뜻한 남편의 손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무혁 씨. 부탁이 있어요.”

“뭐든지.”

“5월의 연회 때 어머님이 갤러리 직원들 앞에서 절 며느리라고 소개하시겠대요.”

“…….”

“저, 그때 미셸이 찾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미셸과 만날 예정이에요.”

짧은 말이었지만, 무혁은 재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책장 너머로 무혁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희가 고개를 들자, 책장을 넘어온 무혁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가 별말씀은 안 하셨고?”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재희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오히려 고마워하셨는걸요. 유라 씨의 거짓말도 다 들통나고.”

“…….”

“무혁 씨 덕분에 우리 추억이 유라 씨의 거짓말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재희는 시야 가득 무혁의 얼굴을 담았다.


“그러니까 무혁 씨. 5월의 연회 때 나랑 같이 참석해 줘요.”

노을로 음영진 무혁의 얼굴. 처음엔 무섭기만 했던 얼굴. 이젠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비밀 친구이자, 남편의 얼굴.


“내 대답은 5월의 연회가 끝나면 그때 할게요.”

 

 

* * *

5월의 연회.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며,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참석하는 명망 높은 행사였다. 극소수의 VVIP만 참석하기 때문에 TV가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얼굴도 여럿 볼 수 있었다.

이날만큼은 라윤 갤러리 직원들도 모두 참석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혜란이 두둑이 성과급을 챙겨주는 것과 별개로, 인맥을 쌓을 기회인 데다 라윤 갤러리 직원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매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어째 이번 5월의 연회는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그야, 관장님이 공을 들이던 미셸이 참석한다고 하니까요.”

“올해 관장님 가족분들도 참석하신댔나.”

“KJ 그룹 회장님이랑 그 아드님과 며느님도 참석하신대요.”

“와, 올해 5월의 연회는 더 긴장되네요.”

“그나저나 재희 씨는 어디로 간 거람. 이런 중요한 날에.”

“그러게. 아까 출근하는 것도 못 봤는데. 누구 재희 씨 봤어요?”

“아뇨. 관장님은 지각하는 거 딱 질색하시는데.”

대기실에서 직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 비서가 들어왔다.

수다를 떨던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한 비서에게 집중됐다.


“아시다시피 오늘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관장님의 배우자 되시는 KJ 그룹 회장님도 참석하시고, 그토록 공을 들였던 미셸도 참석하는 날입니다. 오늘 일로 미셸의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 참여 여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혜란이 줄곧 추진해 오던 일이 결정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 만큼 모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관장님께서 미리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한 비서가 말을 마치자 대기실 문이 열리며 연회복을 입은 혜란이 들어왔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던 직원들은 뒤따라 들어온 재희를 보곤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어떻게 된 거야?’

5월의 연회에 맞춰 주문 제작한 직원용 유니폼을 입고 있어야 할 재희가 연회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살짝 틀어 올리고, 희고 긴 목덜미를 강조한 원피스를 입은 재희의 모습은 마치 5월의 연회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혜란은 직원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행사가 시작되기 전, 여러분들에게 먼저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모이라고 했어요.”

혜란이 살짝 몸을 틀어 재희를 직원들 앞에 선보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죠. 내 며느리이자 미셸이 찾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신재희예요.”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들의 반응에 민망해진 재희가 볼을 붉혔다.


“자. 재희야. 인사해야지.”

항상 도도하고 서늘한 표정을 유지하던 혜란이 재희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직원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다.

유라가 왔을 때, 밝은 얼굴로 맞이해 주던 혜란의 모습은 간간이 봐왔지만, 마치 딸을 대하는 듯한 다정한 모습은 몇십 년간 혜란을 보좌해온 한 비서조차 처음 본 모습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미처 밝히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아는 신재희는 변함이 없으니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기실에 정적에 깔렸다.

한 비서가 헛기침을 하자 어색한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나중에 찬찬히 설명하도록 하고.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내 며느리인, 재희예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리 알고 오늘 행사에 만전을 기해주세요.”

말을 마친 혜란을 몸을 돌려 먼저 걸음을 옮겼다.

혜란을 뒤따라 가며 재희가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곤 대기실에서 나갔다.

직원들은 보고 말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좀처럼 볼 수 없는 혜란의 장남이자 딱딱하기로 소문난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소중하게 감싸는 모습을. 그리고 웃음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무혁이 재희를 보며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띤 모습까지.


 
탁, 문이 완전히 닫히자 대기실 여기저기서 직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관장님 며느리? 누가? 그 신재희 씨?”

“그보다 일러스트레이터라니. 한유라 씨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니, 가만있어 봐요. 방금 문틈으로 본 남자……. 관장님 아드님 맞죠? 우리가 알던 그?”

그야말로 혼란 상태인 직원들이 웅성거릴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미경이 한 비서에게 다가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올해 5월의 연회가 참 스펙터클하네요. 실장님.”

다들 동요하는데도 여전히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미경에게 한 비서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혜란에게서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유라가 아닌 재희인 걸 들었을 때도 충격이었지만, 5월의 연회에 강진 회장은 물론 강무혁과 강우진까지 참석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한 비서는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미경의 말에 한 비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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