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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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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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노을 서점
2022.08.15.
재희는 노을 서점 앞에 서 있었다.
혜란은 5월의 연회가 열릴 정원의 마무리 작업은 미술팀과 디자인팀에 맡기고 재희를 먼저 퇴근시켰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미셸과 만날 때를 생각해 준비하고 있으란 이유였지만, 아무래도 한유라의 본모습을 본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재희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노을 서점.’
변함없이 허름하고 낡은 노을 서점.
손때가 묻은 낡은 문도, 처마 끝에 달린 등도, 곳곳에 묻은 세월의 흔적조차 그대로인 건물.
종종 왔었지만,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노을 서점.
‘이 열쇠가 정말 여기 거라면.’
낡은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재희는 무혁이 준 열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물쇠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재희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덜컥, 무거운 자물쇠가 풀렸다.
재희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옆으로 밀었다.
덜컥, 낡아서 비틀어진 문지방에 문이 걸렸다.
한때 수없이 여닫았던 문이었다.
재희가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아.”
노을 서점 내부는 재희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굳어있던 재희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서늘한 공기와 낡은 책의 묵은내가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재희는 낡은 책장을 손으로 짚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아.’
서점 안을 채우는 높은 책장.
당시 재희는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얼굴조차 몰랐던 비밀 친구, 그러니까 무혁은 항상 재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책을 꺼내어 재희 전용 자리에 몰래 두곤 했었다.
‘그런 무혁 씨한테 마치 키다리 아저씨 같다고 말하곤 했지.’
서점 할아버지가 간식을 가져다주면 무혁은 재희에게 제 몫까지 주었다.
날이 추울 땐 무혁은 재희에게 따뜻한 담요를 주었다.
‘저건.’
재희는 서점 한쪽에 놓인 작은 액자를 들어 바라보았다.
서점 할아버지와 그 부인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재희의 눈동자는 금세 그리움에 물들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서점 할아버지는 종종 재희가 책을 읽어주면 좋아했었다.
가끔 비밀 친구가 무심한 소리를 하면 서점 할아버지가 혼내주기도 했었다.
재희의 성적이 잘 나오면 서점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주름진 커다란 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조부의 사랑을 서점 할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 자주 올게요.”
재희는 액자를 내려놓고 책장 뒤를 돌았다.
제법 넓은 공간엔 낡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서점 할아버지가 종종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발길이 끊어졌지만, 주변의 갈 곳 없던 아이들이 와서 공부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었다고.
가난한 문인들이 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종종 토론도 벌였으며, 교수며 과학자며 공무원이며, 회사원이며 사회적으로 어엿한 구성원이 된 이들도 대학생 시절 여기서 공부를 하곤 했었다고.
수많은 이들과 시간이 스쳐 지나간 노을 서점.
재희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재희는 낡은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삐걱 소리를 내었다.
본래 적갈색이었을 소파는 여기저기 색이 벗겨져 하얀색이 점점이 번져있었다. 재희는 낡은 소파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옛 기억이 떠올랐다.
추운 겨울.
오랜만에 비밀 친구보다 일찍 노을 서점에 온 재희는 서점 할아버지가 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잠시 소파에 누웠다.
찬 바람에 유리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타닥타닥 나무 장작이 타는 소리,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다니면서 내는 낡은 나무 소리, 보글보글 양은 주전자에서 끓어오르는 물소리…….
어쩐지 포근한 기분이 들어 재희는 깜박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재희의 몸 위에 담요가 덮어져 있었다.
재희는 누가 담요를 덮어준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비밀 친구, 무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필요할 때면 언제나 비밀 친구가 곁에 있었던 것처럼 무혁은 언제나 재희 곁에 있었다.
‘무혁 씨도 거길 알까.’
문득 궁금해 졌다.
언젠가 비밀 친구와 함께 올라가고 싶었던 다락방.
꼭 비밀 친구와 함께 보고 싶었던 풍경이 있었다.
끝내 같이 올라가지 못하고 헤어져 버렸지만.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뭐야. 이게 왜 열려 있지?”
민석의 목소리였다.
흠칫 놀란 재희가 서둘러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재희 씨?”
때마침 서점 안으로 들어오던 민석이 재희를 발견하곤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의외의 장소에서 민석을 만나자 재희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재희가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민석은 개의치 않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혁이랑은 같이 안 왔어요?”
“아, 네. 무혁 씨가 좀 바빠서요.”
“하긴. 그 녀석이라면 많이 바쁠 겁니다. 이크, 여기 흠이 있네. 일전에 봤을 때에는 없었는데.”
재희는 갈라진 책장을 살피는 민석을 바라보았다.
노을 서점을 둘러보는 민석은 꽤 익숙해 보였다.
“여기 오신 적 있나 봐요.”
흠이 난 곳을 심각한 얼굴로 보던 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 자주 왔었죠. 무혁이가 여길 사들이고 나서 리모델링할 때요.”
“……리모델링이요?”
“무혁이가 거기까지 말 안 해줬나 보네요. 하긴 말이 없어도 너무 없는 녀석이죠.”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하는 민석에게 재희가 조금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얘기 자세히 듣고 싶어요.”
주변을 둘러보던 민석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진지한 얼굴을 한 재희를 보며 민석은 속으로 아이고야,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녀석 또 제대로 이야기 안 했구만. 내 입도 문제지만.’
괜히 자기 입을 탓하며 민석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 음. 무혁이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텐데요.”
“지금 듣고 싶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단호한 재희의 말에 민석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무혁이 나한테 뭐라고 하면 제대로 방패 역할 해주셔야 합니다.”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망설이던 민석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게…….”
* * *
재희는 노을 서점의 소파에 가만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낡은 가죽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손때묻은 낡은 테이블을 가만히 보던 재희는 눈을 감았다.
“사실 이 노을 서점. 종조부께서 돌아가시자마자 무혁이 아버지가 먼저 이 노을 서점을 사들였고, 무혁이는 그런 아버지와 거래를 했어요.”
“어떤 거래요?”
“뭐,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는 거였죠. 공부든 일이든 뭐든. 전 진심으로 무혁이가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진짜 뭔가에 씐 사람처럼 공부와 일에만 몰두했으니까요. 그러다 몇 년 전에 노을 서점을 겨우 얻어내고 계속 두더니, 어느 날 갑자기 리모델링 작업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무혁에게 시달렸던지라 민석은 잠시 진저리를 쳤다.
그러다 민석이 재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정확히는 재희 씨랑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부터요.”
“저랑요……?”
“네. 결혼이 확정되자마자 무혁이가 직접 설계하고 작업을 추진했어요. 이 서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강하는 정도였지만, 그 어느 사소한 부분 하나 지나치지 않았어요. 작업하는 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죠.”
“어째서요?”
민석은 흐음, 콧소리를 내며 책장 한 곳을 가리켰다.
재희의 시선이 민석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순간 재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민석이 가리킨 장소는 바로 재희가 항상 앉았던 곳이었다.
“저 자리의 주인에게 이 서점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
“무혁이는 서점이 조금도 훼손되면 안 된다고 말했었어요. 저 자리의 주인이 언젠가 돌아왔을 때, 이곳을 낯설어하면 안 된다면서요.”
덜컹.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저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걸음 소리의 주인은 이미 서점 내부를 훤히 다 안다는 듯 망설임 없이 재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재희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굳이 눈을 뜨고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희야.”
저를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에 재희는 눈을 떴다.
“무혁이는 최선을 다해 여기를 지켜왔어요. 재희 씨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더라도, 돌려주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어요.”
재희의 시선이 닿은 맞은 편에 무혁이 서 있었다.
재희가 몸을 일으키자, 무혁이 조심스럽게 재희에게 다가왔다.
재희는 바로 앞에 선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내부가 어두워서 무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재희는 알 수 있었다.
무혁은 드물게 그녀를 앞에 두고 긴장하고 있었다.
“재희 씨가 여기 있는 걸 안다면, 무혁이 녀석은 기뻐할 겁니다. 진심으로요.”
민석이 돌아간 뒤 재희는 곧바로 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무 중에는 전화를 받지 않던 무혁이었지만, 이번엔 곧바로 받았다.
재희가 노을 서점으로 와달라고 하자, 무혁은 단번에 와주었다.
“여기였어요?”
“…….”
“생일 때 나에게 주고 싶다고 한 것이.”
무혁은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남자.’
재희에게 노을 서점은 소중했다.
하지만, 그 노을 서점이 소중했던 건 서점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였지만, 무엇보다 비밀 친구가 있어서였다.
‘바보같이 눈치도 못 채고.’
노을 서점이 있어도 이곳에 무혁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고마워요.”
무혁의 커다란 몸이 잠시 굳었다.
재희는 무혁의 커다란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러자 무혁이 깍지를 끼며 재희의 손을 꼭 쥐었다.
크고 따뜻한 내 남편, 내 남자의 손.
언젠가 비밀 친구의 손을 딱 한 번 잡았을 때도 그랬다.
비밀 친구의 손은 무혁의 손처럼 크고 따뜻했다.
같은 사람인데, 재희는 알아채지 못했다.
비밀 친구의 얼굴은 몰랐지만, 목소리만큼은 비슷했을 건데 왜 눈치를 못 챘을까.
비밀 친구와 이렇게나 똑같은데.
“평생 잊지 못할 생일선물이에요.”
무혁은 소파에 앉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짓 한점 없는 맑은 얼굴.
4월 23일, 그때처럼 괴로운 순간을 묵묵히 견디는 얼굴이 아니었다.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노을 서점.
겨우 재희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그때 받았던 실망과 상처 한 점 없는 기색으로 이제 자신의 아내가 된 재희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 무혁의 목덜미에 힘줄이 불거졌다.
“받아줘서 고맙다.”
노을 서점을 받아주어서.
이런 나를 다시 받아주어서.
“미안하다.”
너에게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재희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무혁을 보며 웃어 보였다.
“우리, 좀 앉을까요?”
그때처럼 책장을 사이에 두고.
우리,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대화를 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