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유라의 실체 (81/128)


#81화. 유라의 실체
2022.08.08.



“이 그림. 제가 그렸으니까요.”

혜란은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란은 제 사람이라면 끝까지 품고 가는 성격이었다.

그런 혜란이, 무혁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고 유라에게 전화해 다시 한번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확인했어도 내심 찜찜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번엔 재희가 그 삽화를 자신이 그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혜란은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짚었다.


“재희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그 삽화를 네가 그렸다니.”

5월의 연회가 제게 무슨 의미인지 유라도 잘 알고 있었다.

혜란은 어릴 때부터 봐온 유라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혜란은 선뜻 재희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재희는 삽화를 혜란에 책상에 올려두며 말했다.


“이미 한유라 씨가 일러스트레이터인 것으로 알고 계시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당황하실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어요.”

“좋아. 다 그렇다 쳐도 네가 그렸다는 증거는?”

혜란은 팔짱을 끼고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의 맑고 올곧은 눈동자를 보니 도무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다만, 둘 다 자신의 그림이라고 하니 혜란은 어느 쪽 말이 맞는 건지 헷갈렸다.

삽화의 화풍을 생각한다면 유라보단 재희가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화풍만으로 재희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유라는 이 삽화가 가진 스토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재희는?


‘넌 나에게 어떻게 증명할 거니?’

재희는 시험하듯 자신을 보는 혜란을 잠시 마주 보았다.

혜란의 성격상 쉽게 자신을 믿어줄 거라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직접 보여드릴 수밖에.’

잠시 고민하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한유라 씨를 불러주세요.”

 

 

* * *

갑자기 혜란이 불러서 라윤 갤러리에 오게 된 유라는 관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때마침 장제우가 그림도 완성했다고 하니 오후에 가지러 갈 예정이었다.


‘그림이 완성됐다고 말씀드리면 그 아줌마도 좋아할 거야.’

5월의 연회 때 일강 방송사에 제보한 기사가 터지면 신재희는 분명히 시부모님 눈 밖에 나고 둘은 이혼하겠지.


‘그럼 강무혁은 내 거야.’

그 생각을 하자 짜릿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한 비서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바로 관장님에게 안내하겠습니다.”

부드럽게 웃던 평소와 다르게 딱딱한 한 비서의 태도에 유라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순순히 뒤를 따랐다.


“어머니. 저 왔…….”

관장실에 들어서며 인사하던 유라의 말끝이 흐려졌다.

당연히 혜란이 있어야 할 관장실에 재희가 창밖을 보며 주인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잘 어울려서 순간 재희가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신재희?”

5월의 연회가 열릴 예정인 정원을 보던 재희가 유라에게 다가갔다.

곧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재희를 보자 기분이 나빠진 유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님은 잠시 자리 비우셨어요.”

“그래요? 그런데 재희 씨가 왜 여기 있죠?”

비서실 가장 구석 자리가 재희의 자리였고, 그 자리는 재희에게 잘 어울렸다.

그런데 재희가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있자 무척이나 거슬렸다.


“유라 씨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자고 하지 않았어요?”

유라가 기가 막힌 듯 팔짱을 꼈다.


“사적인 일은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중요한 얘기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유라를 보며 재희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라 씨. 왜 거짓말했어요?”

“뭐?”

“그 삽화. 유라 씨가 그린 거 아니잖아요.”

재희의 말에 순간 유라가 굳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거짓말은 이쯤 해요. 이번엔 도가 너무 지나쳤어요.”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유라가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유라는 전혀 잘못한 게 없는 사람처럼 당당했다.


“이번 5월의 연회, 아시다시피 어머님에게 중요한 행사예요.”

“그건 나도 알아. 너보단 내가 어머니를 더 오래 봐왔으니까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그래?

마치 유라는 재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희는 흔들림 없는 담담한 얼굴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행사를 유라 씨의 거짓말로 망치게 둘 수 없어요. 미셸이 찾는 일러스트레이터, 유라 씨가 아니잖아요.”

재희가 무혁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자 유라는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곧 5월의 연회였다. 유라가 목표로 하는 날이 바로 코앞이었다.


“지금 어디서 뭘 듣고 이러는 거야? 증거 있어? 내가 아니라는 증거?”

“그럼 한유라 씨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증명을 해봐요.”

“뭐라고?”

“유라 씨가 정말 그 일러스트레이터라면 그 삽화와 똑같이 그릴 수 있을 거예요. ”

재희는 황당해하는 유라에게 미리 준비한 연필과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려봐요.”

파악.

유라의 손에 내쳐진 스케치북과 연필이 바닥을 굴렀다.


“지금 어디서 건방지게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재희가 담담한 얼굴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저를 보는 재희의 맑은 눈동자에 유라는 더 화가 올라왔다.

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니까 유라 씨는 못 그린다는 소리죠?”

“뭐?”

재희는 바닥에 떨어진 스케치북과 연필을 주워들었다.


“전 그 삽화와 똑같이 그릴 수 있어요.”

“신재희.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를.”

연필을 쥔 재희의 손이 스케치북 위에서 능숙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단 몇 초 만에 밑그림을 그린 재희가 유라에게 스케치북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그 일러스트를 그렸으니까요.”

그림을 본 유라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밑그림이지만, 그 더러운 동화책에 실린 삽화와 똑같았다.

본인이 아니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림이었다.


‘무혁 오빠가 그때 한 소리가 이거구나. 무혁 오빠도 신재희가 일러스트레이터란 걸 알고 있었어.’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유라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유라는 스케치북을 빼앗아 재희가 그린 그림을 찢어버렸다.


“이까짓게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

아직은 혜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재희가 사실대로 말한다 한들, 혜란은 자신의 말을 더 믿어줄 게 분명했다. 자신을 어릴 때부터 예뻐했으니까.

재희는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림을 보다 유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유라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다보는 듯한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유라 씨. 전 지금 유라 씨에게 기회를 드리고 있는 거예요.”

“뭐?”

“거짓말을 바로 잡을 기회 말이에요.”

“이게 정말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순간 울컥한 유라가 손을 치켜들었다.

재희의 뺨을 그대로 내려치려던 유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재희가 유라의 손목을 잡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거 안 놔?”

잡힌 손을 빼내려고 발버둥 치던 유라는 재희가 내팽개치듯 손을 놓자, 순간 중심을 잡지 못고 비틀거렸다.


“이게 정말!”

다시 손을 치켜들던 유라의 동작이 재희의 말에 멈췄다.


“얼마 전에 유라 씨가 무혁 씨가 나에게 줄 반지 같이 골라줬다고 말했었죠. 그리고 선물로 무혁 씨에게 같은 반지 받았다고.”

“설마 지금 그 말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지만, 제가 직접 무혁 씨에게 확인했어요.”

“뭐야. 무혁 오빠의 말을 믿어? 순진하네, 신재희. 거짓말이라고 생각은 안 하나 봐?”

“무혁 씨는 나에게 그런 거로 거짓말할 리가 없으니까요. 유라 씨와 다르게.”

흔들림 없는 재희의 말에 유라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유라는 속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래. 거짓말 맞아. 무혁 오빠는 나에게 반지 같은 거 사준 적 없어.”

“왜 그런 거짓말 한 거죠? 저한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우리가 이혼하길 바라서인가요.”

“맞아. 애당초 그 자리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어. 난 나에게 왔어야 할 그 자리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요. 그렇다 치고.”

재희는 힐끗, 어느 한 곳에 아주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어들였다.

찰나인지라 유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 거짓말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유라 씨가 스스로 어그러뜨린 진실을 바로 잡는다면 그것까지 다 눈감아주겠어요.”

“신재희. 뭔가 착각하나 본데.”

더 이상 유라는 민낯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 그 일러스트 내가 그린 게 아니야. 그런데 인제 와서 뭘 어쩔 거지?”

팔짱을 끼며 진한 미소를 띤 얼굴엔 전과 다른 독기가 서려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라고? 늦었어. 어머니는 이미 내가 일러스트레이터인 것으로 믿고 계셔. 그런데 내가 멍청하게 사실대로 말할 것 같아?”

“정말 어머님을 생각한다면 유라 씨는 거짓말을 해선 안 돼요.”

“아니. 어쨌든 결과가 좋은 거면 된 거야. 5월의 연회 때 난 미셸이 찾고 있던 일러스트레이터로 알려질 거고, 신재희. 넌 내가 빛날 준비만 잘해주면 돼. 알겠어?”

마지막 기회를 걷어찬 유라를 보며 재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라가 쉽게 거짓말을 인정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유라 씨. 잘 생각해요.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요.”

유라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사 내가 가짜라 해도 그 일러스트레이터는 나야.”

말을 마친 유라가 가만히 서 있는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곤 몸을 돌렸다.


“어머니는 안 계신 것 같으니 다시 오겠…….”

유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충격으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혜란이 서 있었다.


 


“어, 어머니.”

“지금 내가 들은 게 모두 사실이니?”

“어머니. 그게 아니라.”

혜란이 성큼 다가오자 유라가 드물게 당황한 모습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유라야. 왜 그랬어? 지금까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혜란이 실망과 분노, 충격으로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재희가 유라를 불러 달라고 했을 때, 미심쩍어하면서도 혜란은 기꺼이 불러주었다.

재희의 말만 듣기보다는 유라의 말도 직접 듣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재희가 자신에게 거짓말할 리도 없었고, 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중간에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재희는 혜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달라 요청했고, 혜란은 기꺼이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숨어서 들은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대체 내가 뭘 들은 거지?’

유라가 재희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도 모자라, 똑같은 반지를 무혁이 사줬다고 거짓말까지 했다니. 무혁이 재희와 결혼을 밀고 나가는 바람에 혜란이 유라에게 직접 사과까지 했었다.

그때 분명 착한 유라는 괜찮다고 웃어주기까지 했었다. 진심으로 둘을 축하한다고 말까지 해주었는데.

그런데 지금 제가 본 독기 서린 유라는 혜란이 전혀 모르는 모습이었다.


“지금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그런데 이게 전부 다 내 오해라고?”

제게 5월의 연회와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미셸을 잡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잘 아는 유라가 자신을 속인 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정말 네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니? 유라야. 정말 그래?”

“아니에요, 어머니. 전부 다 오해예요.”

“네 입으로 거짓말이라고 인정했어. 그런데도 오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니?”

“제가 그 일러스트레이터 맞아요. 당장 증명할 수 있어요.”

유라가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한테 말씀하셨던 그림 완성했거든요. 원하신다면 당장 가져와서 보여드릴 수 있어요.”

“그래. 그림을 완성했다면 지금은 그릴 줄 안다는 거겠지. 이 자리에서 그려보렴. 지금 당장.”

전과 달리 혜란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유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혜란은 자신을 속이거나 눈 밖에 난 사람에게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눈치챈 유라는 초조하게 입속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두고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그렇다고 방금 그 대화를 혜란이 다 들었다면 더 이상 속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유라가 서럽게 울었다.


“저, 전 그냥 어머니가 일러스트레이터를 찾는 데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혜란은 어릴 때부터 유라를 봐왔다.

혜란은 당찬 유라를 꽤 예뻐했고, 어릴 때부터 영악했던 유라는 혜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잘못을 뉘우치면 혜란의 마음이 약해질 거란 것 역시 유라는 전부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니?”

혜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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