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이 그림. 제가 그렸으니까요. (80/128)


#80화. 이 그림. 제가 그렸으니까요.
2022.08.04.


장제우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듣고 귀가하던 무혁은 문득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날 전해주지 못한 노을 서점의 열쇠.

재희는 무혁에게 비밀 친구가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바랐다.

그때 진심도 아닌 말을 하며 재희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생일날, 소중한 비밀 친구를 부정하는 그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재희는 무혁이 자신을 속인 게 아니었음을, 거짓말한 게 아니었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재희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좀 더 좋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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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해도 부정할 수 없었어.’

재희에게 비밀 친구가 소중했듯 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겨울을, 그 노을 서점을 부정한다는 건, 재희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무혁은 혹독한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 겨울의 노을 서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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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새끼.’

무혁이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생일 이후로 재희는 더 이상 무혁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마주치기는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재희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게 단 며칠뿐인데도 무혁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혁은 자신에게 보여주던 웃음이 사라지고 버석한 표정을 한 재희를 볼 때마다 소리 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재희가 처음으로 박정수와 한유라에 대해 입에 올렸을 때 듣지 않았었다.

재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재희 입으로 힘든 말이 나오지 않길 바랐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그 때문에 정작 재희가 상처 입었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일을 떠올리자 무혁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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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에 재희가 기다려주니까 기뻐하다니.’

가끔 늦은 시간에 귀가하면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재희를 볼 때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무혁은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묘한 기쁨이 은근하게 퍼졌다.

아직 재희가 완전히 자신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드물게 무혁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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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

무혁은 시선을 들었다.

결혼하고 재희와 함께 처음으로 둥지를 튼 소중한 신혼집이 보였다.

무혁은 삽화와 노을 서점 열쇠를 매만지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설사 재희가 자신을 완전히 외면한다 하더라도 무혁이 돌아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재희의 곁.

무혁이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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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혜란과 쇼핑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고 귀가한 재희는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1시.

아직 무혁은 귀가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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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늦는 걸까.’

무혁을 외면한 지 며칠째.

그래도 재희는 매일 무혁을 기다렸다.

항상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어 버린 적도 종종 있었다.

이른 아침 불편한 잠자리에서 설핏 눈을 뜨면 무혁이 가만히 흐트러진 재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출근을 했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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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무혁 씨도 한결같았지.’

눈가가 전보다 짙어진 무혁을 떠올리자 재희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일도 일이지만, 무혁 역시 편치 않을 터였다.

피로가 그대로 누적되어 전보다 더 딱딱해진 무혁을 떠올리자 재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자마자 이혼을 바랐던 혜란과 유라의 등장. 그리고 바퀴벌레처럼 끈덕진 박정수.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재희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도 자신에게 헌신하는 무혁에 대한 사랑과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믿음에 금이 간 이상 재희는 자신이 없어졌다.

아직 무혁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 무혁이 자신에게 숨기고 거짓말했던 사실이 상처로 남았다.

그것도 재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비밀 친구와의 추억을.

아무리 지워 내려 해도 상처는 선명해질 뿐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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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는데.’

혜란의 말을 들으면서 재희는 그동안 무혁의 태도를 되새길 수 있었다.

무혁은 비밀 친구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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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무혁 씨는 내 생일 때 말해주려고 했었을지도 몰라.’

무혁에 대한 실망감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부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무혁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감추었으나, 재희는 그와 다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무혁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번에야말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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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어떤 얼굴로 무혁 씨를 봐야 하지.’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와중에 현관문이 열렸다.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자 막 귀가한 무혁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재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눈치챈 무혁의 걸음이 멈췄다.

며칠 만에 제대로 보는 남편의 얼굴.

막상 이렇게 마주치자 재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소파에 앉은 채로 굳어버렸다.

짧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무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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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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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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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혁이 재희의 팔목을 잡았다.

흠칫, 놀란 재희는 자기도 모르게 무혁의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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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리어 당황한 건 재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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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칠 생각은 없었는데.’

무혁은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다시 재희에게 두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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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얘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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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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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야. 부탁이야. 10분만 시간을 내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덤덤했지만, 그 안에 섞인 간곡한 부탁에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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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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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고맙다니.

무엇이? 시간을 내준 게?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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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쁜 표정을 짓는 거야.’

아주 잠깐이지만 기쁜 표정을 짓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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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무혁이 낡은 동화책과 열쇠를 테이블에 올리고는 재희에게 밀어주었다.

재희가 낡은 동화책과 열쇠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무혁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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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미셸이 찾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유라라고 들었어.”

무혁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자 재희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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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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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뭔가 물어볼 게 있어서 갤러리에 들렀다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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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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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지. 일러스트레이터는 유라가 아니야.”

줄곧 동화책과 열쇠에 시선을 둔 채 무혁과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던 재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무혁은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찰나지만 재희와 잠시라도 시선을 마주친 것이 그로서는 기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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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렇게 웃어.’

당황한 재희가 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전속력으로 달린 것처럼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혁은 그런 재희를 잠시 보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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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내가 어머니에게 말하려고 했어. 중간에 일이 생겨서 말은 못 했지만.”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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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전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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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단 재희, 네가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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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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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페이지 펼쳐봐.”

재희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낡은 동화책을 펼쳤다.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던 재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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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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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자율 주제로 그렸다면서 보여줬던 그림이야.”

처음 학원에서 자율 주제로 그리라고 했을 때 재희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잘 몰랐다.

다들 각자 그리고 싶은 걸 거침없이 그리는데, 당시 재희는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어려웠다. 항상 할머니의 말대로만 움직였고 뭔가 원해서 한 적이 별로 없었기에 하얀 스케치북이 아득한 산처럼만 보였다.

막막한 기분에 선뜻 연필을 가져갈 수 없을 때, 비밀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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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 봐. 네가 원하는 세상.”

 
당시 재희에게 가장 편안하고 소중했던 장소.

서점 할아버지와 비밀 친구라는 소중한 사람이 있는 곳.

보글보글 양은 주전자에서 끓는 물, 묵은 책 내음, 낡은 소파 가죽 냄새와 오래된 나무만이 갖는 기분 좋은 감촉, 책장을 사이에 두고 기대앉아 조곤조곤 비밀 친구와 나누었던 별거 아닌 소소한 대화들.

해가 질 때면 불투명한 유리문에 가득 고였던 노을빛.

밤이 되면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서점 할아버지가 처마 등을 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 유리문은 다시 노을로 가득 채워졌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었던 눈물 나도록 따뜻했던 그 겨울날, 그 노을 서점.

추웠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비밀 친구가 있는 노을 서점.

소중한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으며 그렇게 완성한 그림이었다.

미숙한 실력이나마 서점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또 비밀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선 하나 그을 때도, 채색을 할 때도 어느 것 하나 허술함 없이 정성을 다해 그렸던 첫 작품.

태블릿 PC로 옮겨 서점 비밀 친구에게 보여줬을 때, 잘했어. 그 한마디에 너무나도 행복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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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을 서점. 내 비밀 친구.’

그렇게 소중한 그림이었는데, 출판사에서 무단으로 도용해서 책에 실었을 때도 재희는 한마디 항의도 하지 못했다. 소란을 일으키면 할머니가 저를 더 미워할 것 같아서, 혼날까 봐 무서웠었다.

그래도 재희는 자신의 그림이 어느 아이에겐 희망이 되길 바라며 SNS를 닫아버렸다.

그렇게 잊힌 그림이 되나 했는데.

이 그림을 어떻게 미셸이 알고 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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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유라 씨가 자신이 그렸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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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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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요. 자기 그림이 아닌데, 왜 내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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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겠지.”

재희는 동화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낡은 동화책 특유의 묵은내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온 마음이 들어간 그림이 유라의 거짓말에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무혁은 고개를 숙인 재희에게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차마 무혁은 재희를 쓰다듬어 줄 수 없었다. 재희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기에.

결국, 무혁은 재희에게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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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용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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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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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이 네게 고통스러운 계절이었을까 봐 겁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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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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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때 기억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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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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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네가 그 겨울이 힘들었다고 말했었다면, 난 평생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혁의 말에 재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무혁은 그런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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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밀 친구란 걸 부정할 수도 있었어.”

동화책을 쥔 재희의 손에 힘이 들었다.

무혁은 작은 재희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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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 겨울날, 재희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노을 서점.

재희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놨던 비밀 친구.

재희가 소중히 여겼던 만큼 무혁 역시 노을 서점이, 재희가 소중했다.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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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친구임을 부정하는 건 노을 서점을, 그리고 재희 너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으니까.”

재희는 동화책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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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재희, 너를 부정할 수 없었어.”

무혁은 약하게 흔들리는 재희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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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내가 너를 부정할 수 있겠어.”

무혁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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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쇠도 언젠간 써줬으면 좋겠다.”

무혁은 재희를 착잡한 눈으로 잠시 응시하다 걸음을 옮겼다.

재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무혁이 했던 말이 내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재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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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어떻게 그 겨울이 나에게 고통스러웠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마침내 듣게 된 무혁의 진심.

재희는 복잡한 눈으로 삽화를 보다 열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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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남자.”

무슨 열쇠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재희는 결심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열쇠를 손에 쥐었다.

* * *

다음날.

혜란은 무혁이 가져간 삽화와 함께 홍차를 들고 관장실에 들어온 재희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예전에 유라가 찾아왔을 때 잠깐 홍차 타는 일을 시켰지만, 이후로 재희에게 그 일을 시킨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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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있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선뜻 가까이 오지 못하는 재희를 보며 혜란이 물었다.

재희가 홍차를 앞에 내려놓으며 머뭇하자,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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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 그렇게 머뭇거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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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미셸이 찾던 일러스트레이터, 한유라 씨라고 하셨죠.”

뜻밖의 말에 혜란의 얼굴이 의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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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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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러스트레이터, 한유라 씨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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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도 무혁이가 그 소릴 했는데, 이번엔 너니?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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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가 누군지 제가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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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네가 어떻게 알아?”

삽화를 혜란에게 내민 재희는 잠시 머뭇했다.

어젯밤부터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혜란은 미셸이 찾아달라고 했던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서 기뻐했다.

미셸은 어차피 일러스트레이터의 얼굴을 모를 테고, 이대로 재희가 눈 감고 모른 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재희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한유라 때문에 소중한 자신의 추억이, 그 추억이 담긴 그림이 더럽혀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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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큼은 용서 못 해.’

비밀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까지 한유라의 손에 놀아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삽화의 존재를 끝까지 감춘다는 건 노을 서점을, 비밀 친구를, 그리고 무혁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재희가 또렷한 눈으로 혜란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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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제가 그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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