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한유라와 박정수 (79/128)


#79화. 한유라와 박정수
2022.08.01.


클럽 하데스.

박정수가 험악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며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신음이 한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끊겼다.


“한유라. 네가 감히 내 번호를 차단해?”

사진만 넘겨주면 데이트해 주겠다더니 유라는 입을 싹 닦고 줄곧 연락을 씹고 있었다,

메시지를 수시로 보냈지만, 유라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박정수는 유라가 수시로 드나드는 클럽 하데스까지 오게 되었다.


“다신 오기 싫었는데.”

자신을 낮잡아 보는 무리가 있어서 영 내키지 않았지만, 유라를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씩씩대는 박정수에게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팀장님.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즘 팀장님이 업무 중 자리를 수시로 비우셔서 회장님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유라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박정수의 손가락이 멈췄다.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서 오시는 게 어떻겠…….”

“야.”

박정수가 험악한 얼굴로 운전기사를 노려봤다.


“어디서 건방지게 감히 내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간섭이야. 야, 네 월급 누가 주는지 잊었어? 어?”

안 그래도 번드르르한 임원직이 아닌, 팀장이란 직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박정수였다.


‘무혁이 그 자식은 상무인데, 난 고작 팀장이 뭐냐고.’

이대로 가면 무혁은 무리 없이 대표직에 앉을 판이었다.

자기는 한직에 계속 처박혀 있는데.

승승장구하는 무혁과 비교하자 속에서 더 천불이 났다.


“그리고 내가 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박정수가 휴대전화로 운전기사의 이마를 꾹꾹 밀어대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모욕적인 행위에도 운전기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박정수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도 회장님 눈 밖에 나면…….”

“누가 너한테 그런 걱정 하랬냐고!”

퍽.

박정수가 운전기사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운전기사가 허리를 숙이자,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박정수가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윽. 그게 아니라, 전 걱정이 돼서……!”

힘없는 운전기사는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운전기사가 흙바닥에 주저앉자 박정수가 퉤,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재수 없게. 아버지한테 고자질하면 그땐 너 죽고 나 죽고다. 알겠냐?”

박정수가 클럽 하데스 안으로 들어가자, 한참 뒤 운전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나니 새끼.”

운전기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금호 회장은 최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진 박정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최근 박정수를 잘 감시하라는 명령까지 받은 터였다.

그런데 박정수가 소문이 좋지 않은 클럽 하데스까지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박금호 회장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후폭풍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그 후폭풍이 두려워 박정수를 말리면 이런 식으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또 뭐라고 둘러대나. 휴. 못해 먹겠네. 사표 써야 하나.”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옷에 묻은 흙을 털던 운전기사의 시야에 깔끔하게 손질된 남성용 구두가 보였다.


“이명수 씨 맞습니까.”

운전기사가 고개를 들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남자, 강우진이 호감 가는 웃음을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을 확인한 운전기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벼, 변호사께서 제게 무슨 일로…….”

“잠시 저와 대화하시겠습니까.”

 

* * *

클럽 하데스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복도.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복도에도 꽝꽝 울렸다.

그 복도를 씩씩대며 걷던 박정수가 한 룸 앞에 섰다.

터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망나니들의 집합소였다.


“야! 한유라!”

박정수가 버럭 소리 지르며 문을 꽝 열었다.

안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고가의 술이 굴러다녔고, 이미 흠뻑 취한 몇몇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상스러운 말로 떠들어대던 10여 명의 시선이 박정수에게 몰렸다.


“아씨. 뭐야. 박정수냐.”

한창 흥이 오를 때였는지 김이 팍 식자 한 명이 짜증을 냈다.

그러나 박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유라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박정수가 쿵쿵거리며 다가오자 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유라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자 더 화가 난 박정수가 팔목을 홱 낚아챘다.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가서 얘기해.”

유라가 박정수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라가 룸 밖으로 나가자 박정수도 뒤를 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복도에 멈춰 선 유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유라가 팔짱을 끼고 박정수를 쳐다보았다.


“다짜고짜 와서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냐?”

유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신재희랑 강무혁이 이혼하면 날 받아주겠다며. 그래서 내가 일부러 신재희까지 만나서 그런 사진까지 찍었는데!”

박정수는 무혁에게 얻어맞았던 일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해줬더니 유라가 나 몰라라 하니 박정수는 억울했다.


“어이가 없어서.”

유라가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유라의 입가에 비웃음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둘이 이혼했어?”

“뭐라고?”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어? 둘이 이혼한다면 정수 오빠 받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너, 너어.”

“근데 둘이 이혼 안 했잖아? 그럼 내가 정수 오빠 만나줄 이유가 있어?”

말문이 막힌 박정수가 부들부들 떨었다.


“너, 내가 찍은 그 사진 주면 한번은 데이트해 주겠다고 분명!”

“그 말을 믿었어?”

“뭐?”

“생각해 봐.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정수 오빠와 데이트 하고 싶겠어?”

“야! 너!”

박정수가 거칠게 유라의 팔목을 잡아챘다.


“너 날 이용했냐? 어? 네가 어떻게 나한테!”

박정수를 노려보던 유라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정수 오빠. 머리가 나쁘고 주제도 모르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뭐…….”

짝!

갑자기 유라가 다른 손으로 박정수의 뺨을 후려쳤다.

박정수는 뺨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박정수의 손에 힘이 풀렸다.

유라가 불쾌한 듯 박정수에게 잡힌 팔목을 흔들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유라에게 뺨을 얻어맞은 박정수가 충격받은 얼굴로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박정수가 확 열이 뻗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한유라! 네가 감히 날 쳐? 너, 너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두면?”

“내가 온 언론사에 네 이중적인 모습 다 제보해 버릴 거라고! 어?”

“그럼 정수 오빠도 무사할 것 같아?”

“뭐야?”

“이 클럽 하데스에게 나만 왔어? 정수 오빠도 수시로 드나든 거 모를 줄 알아? 같이 죽고 싶으면 해보던가.”

“이…… 이……!”

유라가 비웃음을 띄우며 손톱자국이 새겨진 박정수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들어, 정수 오빠. 그 사진 내가 잘 사용했어. 그러니까 정수 오빠는 더 이상 쓸모없어. 알아들어?”

“야! 한유라!”

“안녕. 정수 오빠. 이제 좀 정신 차리고.”

분노에 차올라 소리 지르는 박정수를 두고, 한유라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둘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복도에 둘만 있는 게 아님을.


 

* * *

장제우가 그의 전화를 받은 건 오전이었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상대는 라윤 갤러리를 입에 올렸다.

찔리는 게 있던 장제우는 상대의 만남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우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정식집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정식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일행이 있습니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 종업원이 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 들어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장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커다란 덩치와 강렬한 인상에 장제우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남자가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반갑습니다. 강무혁입니다.”

무혁이 명함을 내밀자 장제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반갑습니다. 장제우입니다. 저, 그런데 제 명함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앉으십시오.”

무혁이 자리를 권하자 장제우가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고는 물러났다.

먹음직한 음식이 바로 앞에 있지만, 장제우는 도무지 먹을 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가 누군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른 채 장제우가 억지로 식사를 다 마치자 무혁이 입을 열었다.


“5월의 연회 때 선보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풉!”

수정과를 마시던 장제우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장제우는 물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미 장제우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장제우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유라와 혜란과의 통화 내용을 들은 뒤 장제우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5월의 연회, 라윤 갤러리 관장과 끈을 만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리면 앞으로 미술학도로서의 장제우의 앞길은 창창했다.

오늘 아침에 막 그림을 완성했고, 조만간 유라에게 전해줄 예정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장제우는 일단 시침을 딱 떼기로 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 들으신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한유라의 미술 과외 선생으로 고용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는데 손이 굳었다고 해서 제가 가르쳐 주고 있…….”

“장제우 씨. 삽화를 흉내 내어 그리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 그리고 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끝까지 시침을 뗐지만, 무혁은 미동조차 없었다.

장제우는 그 모습에 더 불안감을 느꼈다.


“그 삽화. 그린 이가 누군지 전 알고 있습니다.”

“네?”

장제우의 몸이 굳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라윤 갤러리 관장님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가.


‘잘 아는 사람이라.’

무혁은 잠시 의문이 들었다.

4월 23일, 그날 재희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자 심장이 갈라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다.

잔을 든 무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작 재희를 제일 모르는 이는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재희를 잘 아는 사람이라 말하니 무혁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혁은 굳어있는 장제우에게 묵직한 시선을 두었다.

강우진은 이미 박정수의 운전기사와 만났다고 했다.

더불어 무혁이 시킨 일도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고 전해왔다.

많은 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우진은 이유도 묻지 않고 순순히 무혁의 말을 따랐다.

이제 장제우만 남았다.


“이대로 한유라에게 그림을 넘겨준다면 장제우 씨는 그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미술을 전공했다면, 라윤 갤러리가 학계에 미치는 영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

“제 어머니인 라윤 갤러리 관장님은 자신을 속인 사람에겐 가차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아니.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 또 무슨 소리입니까.”

“장제우 씨가 해줄 일은 간단합니다.”

“…….”

“내 말대로 해준다면 이번 일로 인해 장제우 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해 주겠습니다.”

무혁의 말에 장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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