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장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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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장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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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장제우
2022.07.28.
D 백화점.
혜란은 재희를 데리고 5층에 위치한 명품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연락을 받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혜란의 퍼스널쇼퍼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그래요. 잘 지냈어요?”
“네. 사모님 덕분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퍼스널쇼퍼가 프라이빗룸으로 안내했다.
매장 뒤쪽에 마련된 프라이빗룸은 VVIP를 위한 공간으로, 예약 없이 방문해도 매장에 공개되지 않는 한정판 물건을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었다.
프라이빗룸에는 혜란의 취향을 맞춘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을 둘러보던 혜란이 어색하게 서 있는 재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앉자꾸나.”
혜란과 재희가 소파에 앉자 퍼스널쇼퍼가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카탈로그를 꺼냈다.
“마침 이번 시즌에 맞는 신상이 나왔습니다. 사모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거로 몇 개 추려봤습니다.”
“오늘은 내 걸 고르려고 온 게 아니에요.”
혜란이 무심하게 말하며 조용히 앉아 있던 재희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 걸 고르러 온 거예요. 5월의 연회에 어울리는 거로 맞춰줘요.”
당연히 혜란의 물건을 구매하러 온 줄 알았던지라 재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 며느님이신가 봐요.”
평소 아들을 대동하고 왔던 혜란이었다.
퍼스널쇼퍼는 재희가 며느리인 걸 빠르게 눈치챘다.
“그래요. 내 며느리. 그러니 어딜 가도 돋보이게 잘 해줘요.”
“네. 물론입니다. 5월의 연회에 어울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천천히 얘기 나누십시오.”
퍼스널쇼퍼가 자리를 비켜주자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혜란을 바라보았다.
“관장님. 저, 지금 이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라윤 갤러리에서 직원으로서 대하겠다고 했는데, 혜란이 먼저 자신의 말을 먼저 어겼다.
혜란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팔짱을 꼈다.
“무혁이가 속 썩이니?”
직설적인 질문에 재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안 그러면 네가 종일 실수할 이유가 없잖니.”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야.”
“…….”
혜란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들었다.
혜란의 취향을 고려하여 딱 알맞게 우려낸 홍차였다.
“너도 아마 알겠지만, 우리 집은 그렇게 화목한 집이 아니야.”
“…….”
“정략으로 지금 남편과 결혼했어. 내 눈엔 네 시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워 보였지.”
재희는 강진을 떠올렸다.
혜란의 말대로 강진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무혁처럼.
“그렇잖니. 네 시아버지, 말도 없고 무뚝뚝한데다 가정보다는 사업이 우선인 사람이야.”
“……네.”
“그래서인지 무혁이와 우진이를 낳았지만 난 도통 그이에게 정을 줄 수 없었어. 무혁이와 우진이에게도 정을 주기가 어려웠어.”
재희는 시선을 들어 서늘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혜란을 바라보았다.
“뭐, 굳이 내가 신경 안 써도 유모도 있었고 두 녀석 다 잘 컸지.”
재희는 잠깐 어린 시절의 무혁을 떠올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무혁을 떠올리자 한쪽 가슴이 서늘해졌다.
“난 라윤 갤러리 일에만 몰두했고, 갤러리의 위치를 이 자리까지 올렸어. 한시름 놓게 됐을 때 정신 차리고 보니 무혁이와 우진이는 이미 성인이 되어있었고 서먹한 사이는 지금까지 이어졌어.”
“…….”
“그러니 네 고충을 모르는 게 아니야.”
“어머님.”
“그렇잖니. 무혁이는 제 아버지를 똑 닮았어. 말 없는 게. 내 아들이지만 나도 그놈 속을 몰라.”
혜란이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무혁이는 KJ 그룹 후계자로서 정해진 길대로 살아왔어. 흔히 말하는 FM 타입이야.”
“…….”
“그렇다 보니 무혁이는 말이 없는 만큼 성격도 진중하거든. 좀처럼 제 속을 드러내지 않아.”
“…….”
“무혁이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랐어.”
“어머님.”
“솔직히 놀랐어. 무혁이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밀어붙였을 때.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어. 기가 막혀서.”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기가 막힌지 혜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렇잖아. 무슨 문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 한 번도 여자를 쳐다도 보지 않던 놈이 갑자기 결혼하겠다는데 부모로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지.”
“한 번도요?”
“그래. 너랑 선본 게 처음이란 게 믿어지니? 그 자리에서 그놈이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야.”
혜란의 말을 들으며 재희는 버릇처럼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거기다 너희 둘이 저녁 먹으러 왔을 때 무혁이가 그렇게 남을 챙기는 건 처음 봤어. 가족한테도 안 그러던 놈이야.”
“가족한테도…….”
재희는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무혁.
때론 그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만 보여줬던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럼 그날 나에게 주고 싶다고 했던 건…….’
결국, 그날 재희는 무혁이 주기로 했던 선물을 받지 못했다.
새삼 재희는 선물이 궁금해졌다.
혜란은 생각에 잠긴 재희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둘이 서툴러서는.’
혜란이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아마 그 성격 때문에 분명 너도 속앓이 했을 거야. 오해도 했을 거고.”
재희가 부정하지 않자 혜란은 그럼 그렇지,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뭐, 그놈을 이해하라곤 안 해. 그놈이 속 썩였다면 그놈 잘못이야. 용서하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일이고.”
무혁의 편을 들 거란 생각과 다르게 혜란은 가차 없었다.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5월의 연회 때 널 내 며느리라고 말할 생각이야.”
재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전 직원으로 라윤 갤러리에 들어왔습니다.”
“뭐, 그랬지.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
“어머님.”
“5월의 연회엔 라윤 갤러리 직원들도 참석할 거야. 그런데 이제 와 내가 널 며느리라고 밝히려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잘 모르겠습니다.”
“난 너를 제대로 가르쳐볼 생각이야. 라윤 갤러리 차기 관장으로 부족하지 않게.”
“……!”
최근 혜란이 제게 마음을 조금 연 것 같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고 생각했던 재희였다.
그런 혜란이 갑자기 엄청난 발언을 하자 재희는 얼어붙었다.
“처음에 널 오해했던 건 맞아. 내 아들 놈을 꼬신 여자로 보였으니까.”
“…….”
“하지만 아닌 걸 알게 됐잖니. 해박한 지식도 좋고 네 눈썰미도 마음에 들어. 무엇보다 난 라윤 갤러리만큼 가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어머님. 전…….”
재희는 엄청난 말을 들어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마치 현실감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혜란이 테이블에 있던 벨을 누르자 곧 자리를 비켜주었던 퍼스널쇼퍼가 돌아왔다.
“그러니 잡생각은 버리고 지금은 이 일에만 집중해.”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혜란 나름대로 생각해준 것임을 어렴풋이 알아챈 거였다. 재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어머님.”
* * *
무혁은 삽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그림 돌려줘야겠지.’
재희가 생각하는 노을 서점이 고스란히 녹아든 삽화는 색이 바래졌지만, 여전히 따스했다. 무혁은 가만히 검지로 삽화를 쓸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당시 노을 서점의 따스함과 묵은 책내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했던 그 겨울이 느껴지는 듯했다.
“후.”
무혁은 피곤한 눈을 누르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남들보다 훨씬 더 좋은 체력을 자랑하는 무혁이었지만, 그의 눈가에는 평소보다 더 짙은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왜 빨리 솔직해지지 못했을까.’
이런 식으로 재희가 비밀 친구에 대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을 서점을 돌려주며 자신이 비밀 친구임을 재희에게 밝히고 그동안 왜 숨겼는지 차근차근 대화를 할 생각이었다.
‘재희가 힘들길 바라지 않았어.’
그 집에서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던 재희여서 더 과보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혹여 재희가 힘든 일을 겪게 된다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재희를 힘들게 만든 건 나였어.’
무슨 일이든 거침없는 무혁은 유독 재희의 일에 대해선 조심스러웠다.
처음 맞선 자리에서 재회했을 때도 그녀를 놓치기 싫어서 결혼을 밀어붙였고, 다시는 재희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무혁은 똑같이 행동했을 터였다.
재희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무혁은 노력했다.
중동 초고층 빌딩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내고 아버지와의 거래가 모두 끝난다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혁은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가끔 그도 지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재희를 만났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잠시라도 재희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다면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얼굴이라도 한번 본다면 조금 더 견딜 수 있었다.
‘아버지와 마지막 거래만 끝낸다면 완전히 재희와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층 더 짙어진 눈가를 누르며 무혁이 서랍에 열쇠를 집어넣을 때였다.
내선이 울렸다. 윤 비서였다.
“상무님. 일전에 말씀하셨던 박정수와 한유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리 주십시오.”
허락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온 윤 비서에게 서류를 넘겨받아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던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사실입니까.”
“네. 한유라와 박정수는 클럽 하데스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박정수가 한유라를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쫓아다녔다?”
“네. 그리고…….”
“뭡니까.”
잠시 망설이던 윤 비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한유라가 박정수에게 상무님과 사모님이 헤어지게 만들라고 부추겼던 모양입니다.”
윤 비서의 보고에 와그작, 무혁 손에 쥐어졌던 서류가 무참하게 구겨졌다.
“확실합니까.”
단번에 살벌해진 기색에 윤 비서가 대답 대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퇴사한 박정수의 개인 비서의 증언입니다.”
“비서라.”
“박금호 회장님이 박정수 감시역으로 심어둔 자로 그 사진을 찍은 남자입니다.”
“하.”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새어 나왔다.
“이유는?”
“그게…….”
“아니. 대답 안 해도 됩니다. 짐작 가는 게 있으니.”
재희와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맞선 상대였을 한유라.
재희와 결혼한 후부터 라윤 갤러리 관장실에 자주 드나들던 한유라, 라윤 갤러리 사교 모임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얼마 전부터 참석하기 시작한 한유라.
가족의 힘을 빌려 갑자기 대한 백화점 리모델링 사업에 팀장 대신 나타난 한유라.
별다른 교류조차 없던 한유라가 라윤 갤러리에 접근하고 갑자기 자주 마주치게 된 것도 모두 무혁이 재희와 결혼하고 나서부터였다.
“박정수가 내가 했던 경고를 무시하고 재희에게 접근했던 것도 한유라와 만난 이후부터군.”
무혁은 친해지려 근처에서 맴돌던 박정수에게 청담동의 한 바에서 다시는 재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박정수가 무혁의 경고를 무시하고 재희에게 접근했었다. 그 와중에 찍었던 게 그 사진이었다.
‘직간접적으로 모두 한유라가 관여되어 있다.’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을 보는 무혁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혀졌다.
첨부된 사진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기자에게 제보하면 사회 1면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클럽 하데스에서의 박정수와 한유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고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한유라와 박정수에게 사람을 붙이십시오. 최대한 많은 증거를 모으십시오.”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조금의 도망갈 틈조차 만들지 못하도록. 강우진 변호사도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서를 훑던 무혁의 시선이 한 곳에 멎었다.
“이건.”
한유라에 대한 보고서에서 걸리는 부분이 발견되었다.
장제우.
S 대학교 서양학과 재학 중.
그리고.
“장제우. 한유라의 미술 과외 선생.”
한유라가 왜 갑자기 미술 과외 선생을 구했을까.
하필 5월의 연회가 다가온 이 시점에. 결론은 간단했다.
“5월의 연회에서 보여줄 그림을 대신 그려줄 사람이 필요했단 소리군.”
재희의 그림을 흉내 낼 사람을 구하는 건 유라로서는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장제우의 연락처를 확인한 무혁은 피로해진 미간을 누르며 보고서를 내려두었다.
“고생했습니다.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상무님. 곧 중동 초고층 빌딩 입찰이 시작됩니다. 입찰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윤 비서가 머뭇하며 말을 꺼내자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갑니다.”
“네. 알겠습니다.”
윤 비서가 나가자 무혁은 의자에 커다란 몸을 묻었다.
중동 초고층 빌딩 입찰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첫 삽을 뜰 때까지, 무혁은 몇 달간 출장이 예정되어있었다. 이것만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무혁과 아버지 강진 사이의 거래는 끝나게 된다.
처음엔 재희를 두고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중동 그 멀고 낯선 나라에서 재희가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
문득 재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면서.”
무혁은 항상 혼자 생각하고 판단했고 행동했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그의 성격은 노을 서점에서 재희의 비밀 친구로 있을 때도 같았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무혁은 틀림없이 재희의 생일이 지나고 나서 출장에 대해 말했을 터였다.
무혁이 아는 재희라면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대답했겠지.
어리석은 무혁은 미련하게도 그 말을 그대로 믿었겠지.
“젠장.”
벌써 몇 날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던 무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4월 23일, 재희가 생일에 지었던 표정이 아른거렸다.
재희를 지켜주고 싶었다.
재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그렇게 해주지 못했다.
진작 치워 버렸어야 할 쓰레기들을 치우지 못했고 재희는 홀로 감당했다.
‘이번에 확실하게 정리해야겠지.’
무혁의 턱과 목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