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벌어진 사이 (77/128)


#77화. 벌어진 사이
2022.07.25.



 
딩동-

일요일 오전부터 초인종이 울렸다.


“네에. 나가요. 나가.”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희수는 비척비척 현관으로 향했다.

꿀 같은 주말 늦잠을 방해받은 터라 살짝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아침부터 누구……. 재희야.”

뻗친 머리를 정리하며 문을 열던 희수가 재희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연락 없이 찾아온 적이 없었던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안녕. 희수야.”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그냥.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얼른 들어와.”

자주는 아니었지만, 학부생 시절 과제 할 때마다 왔었던 집이었다.

인테리어는 조금 달라졌지만,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어쩐지 그리운 기분에 재희는 오랜만에 방문한 희수의 집을 둘러보았다.


“희수야. 여전하구나.”

재희의 웃음기 머금은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았다.

건조대로 용도가 바뀐 실내 자전거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빨랫감이었다.


“어……. 아하하. 요즘 정신없이 바빴거든. 기다려. 세탁실에 두고 올게.”

민망한 얼굴로 빨랫감을 챙겨 세탁실로 향하며 희수는 재희를 힐끗 돌아보았다.

이윽고 빨래통에 빨랫감을 넣고 돌아온 희수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재희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서 뭐 해?”

“밥 아직 안 먹었지? 오랜만에 볶음밥 해줄까?”

재희의 말에 희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응. 또 귀찮다고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을 것 같아서.”

“나야 좋지! 오랜만에 재희가 만들어주는 볶음밥 먹어보겠네.”

“앉아 있어. 금방 만들어줄게.”

희수는 식탁 앞에 앉아 바지런히 움직이는 재희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인데.’

이윽고 재희가 반숙된 계란후라이를 얹은 김치볶음밥을 희수 앞에 놓아두었다.


“오랜만에 해서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

김치볶음밥을 한입 먹은 희수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떠올랐다.


“으음. 역시 재희 표 김치볶음밥이 최고라니까.”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자신이 좀 없었거든.”

“무슨 소리야. 엄청 맛있어.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집밥인지.”

김치볶음밥을 말끔하게 비운 희수가 설거지를 한 뒤 커피를 내려 재희에게 건네주었다.

둘은 대학생 때처럼 컵을 쥐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오늘 같은 일요일에. 남편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컵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재희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오늘도 출근을 했거든. 오랜만에 희수도 보고 싶었고.”

“나야 반갑지만.”

희수는 커피를 마시며 재희를 힐끗 바라보았다.

재희는 늘 약속을 하고 왔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적은 없었다.

틀림없이 무슨 일 있을 것으로 생각한 희수가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TV를 틀었다.

때마침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적막한 거실이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희수야.”

“응?”

“나, 그 집에 이제 영영 안 가기로 했어. 어제 연 끊고 왔어.”

커피를 마시던 희수가 놀란 얼굴로 재희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뭐? 정말? 갑자기 왜?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냥 더 이상 할머니 손에 휘둘리기 싫었어.”

놀라움으로 가득 찼던 희수의 얼굴이 곧 걱정으로 물들었다.


“괜찮아? 너 어제 생일이었잖아.”

“생일이어서 더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내 가정도 있고.”

“재희야.”

“근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 왜 진작 못 했을까 싶고.”

“그래. 잘했어. 그 집에 계속 얽매여 있을 필요 없어.”

등을 다독이는 희수를 보며 재희가 웃음 지었다.


“너한테는 이 말 해주고 싶어서 왔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고마워. 10년 묵은 체증이 싸악 내려가는 기분이야.”

정말 속이 후련한지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희수를 보던 재희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볼게. 너 피곤한데 이제 방해 안 해야지.”

“벌써 가? 온 김에 나랑 놀아주고 가.”

“그럼 우리 오랜만에 같이 놀까?”

“그럼 그럼. 기다려봐. 내가 얼마 전에 산 게임이 있거든. 우리 그거 하자.”

재희는 거의 반나절을 아무 생각 없이 희수와 게임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희수와 소리 내어 웃고 떠들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만 들어가. 내가 알아서 갈게.”

“너 무사히 가는 거 보고.”

“응. 다음에 또 연락할게.”

괜찮다는 재희를 아파트 1층까지 데려다준 희수는 손을 흔들었다.

재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던 희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희수는 차마 재희에게 무슨 일인지 물을 수 없었다.

재희가 마냥 즐거운 생일을 보내지 못했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재희야.”

일전에 무혁과 어떤 여자가 같이 앉아 있던 장면이 불현듯 떠오르자 희수는 표정을 구겼다.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재희 아프게 하기만 해 봐. 콱.”

그렇게 중얼거리며 희수는 몸을 돌렸다.

여전히 찜찜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 * *

길을 걷던 재희는 지잉, 진동음이 울리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메시지가 도착한 까만 액정에 무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

오늘따라 생소하게만 보이는 무혁의 이름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재희는 휴대전화를 꺼버리곤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뒤로 재희는 무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무혁이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재희는 의식적으로 그를 피했다.

무혁을 피해 안방으로 들어온 재희는 그대로 잠든 척했다.

이윽고 무혁이 방에 들어왔다.

탁.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재희는 자는 척을 했고 무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깨뜨린 건 무혁이었다.
 


“한유라를 만난 건 사실이야.”


“…….”


“반지를 찾고 나가려 할 때 우연히 만났어.”


“…….”


“한유라가 먼저 대한 백화점 리모델링 사업 관련으로 얘기를 꺼냈다.”


“…….”


“그때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게 다야. 한유라가 그 사업의 담당자였으니.”


“…….”


“사업상 잠시 만난 일이었으니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


“숨기려던 건 아니었다.”

 
재희는 눈을 살며시 떴다.

여전히 무혁을 돌아보지 않은 채 재희가 물었다.
 


“반지.”


“반지?”


“한유라 씨도 나랑 같은 거 끼고 있었는데, 그거 무혁 씨가 사준 거예요?”


“아니.”

 
망설임 없이 나온 무혁의 대답에 재희는 눈을 감았다.

무혁이 사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매장에서 확인까지 했지만, 재희는 직접 그의 입으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재희야. 노을 서점은…….”


“무혁 씨.”

 
재희는 얕은 숨을 내쉬며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려 덮었다.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


“…… 그래.”

 
무혁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돌아보지 않는 재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조용히 옆에 몸을 뉘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재희는 새벽에 겨우 잠들었다가 느지막한 오전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재희는 갑자기 방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 공간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았다.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희수를 찾아가긴 했지만, 잘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아무 생각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으니.

재희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혁을 생각할수록 가슴만 아파져 올 뿐이었다.

* * *

이제 5월의 연회 준비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갤러리가 전보다 더 부산스러워졌다.

주문 제작이 오래 걸렸던 조형물이 여기저기에 설치되면서 제법 구색이 갖춰졌다.

정원 한가운데에 커다란 버드나무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는 자잘한 전구와 화려한 샹들리에로 장식했다.

버드나무 조형물을 테이블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는데, 손님들이 즐길 음식이 놓일 곳이었다.

5월의 연회는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열릴 예정으로, 버드나무를 장식하는 전구와 샹들리에는 해가 지면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낼 예정이었다.

장독수 화백의 그림은 얼기설기 엮어 입구를 감싸듯 설치된 매화와 벚꽃 조형물 사이에 전시하기로 했다. 철 지난 매화와 벚꽃으로 만든 조형물에 전시된 장독수 화백의 그림은 정원 어디서든 특히 더 눈에 띄었다.

재희는 라윤 갤러리 디자인팀과 미술팀, 그리고 설치 업체 직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오늘이 며칠째지.’

생일 이후로 재희는 무혁과 출근은 물론, 아침 식사도 같이하지 않았다.

무혁은 늘 하던 대로 기다려주었지만, 재희가 의식적으로 그를 피했다.

덕분에 매일 무혁의 얼굴은 봤지만,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재희는 가만히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비밀 친구의 진실이 가슴 한편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비밀 친구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반가움보다는 실망스러움이 더 컸었다.

재희는 그동안 몇 번이나 무혁 앞에서 가슴 속에 고이고이 소중하게 묻어놨던 비밀 친구와의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인 무혁에게도 자신의 소중한 추억을 같이 공유하고 싶었고, 노을 서점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 공간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바보같이.’

몇 번이고 무혁에게는 말할 기회가 있었다.

오히려 장독수 화백의 작품으로 보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을 서점 앞에서 무혁이 사실대로 말을 해주었다면 이렇게 실망하진 않았을 터였다.


‘하다못해 그때 말이라도 해주었다면.’

비밀 친구를 입에 올리며 당사자인 무혁 앞에서 즐거워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어쩌면 나 혼자만 소중한 추억이었을지도 몰라.’

무혁은 서점 할아버지인 종조부를 찾는다고 했었다.

그룹 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던 일이라 진짜 이름조차 알려줄 수 없었다고.


‘그래서 나한테 얼굴도 내보이지 않았던 걸까.’

노을 서점은 무혁에겐 가족의 일이었고, 재희에겐 소중한 장소였고 추억이었다.

자신에겐 그 어느 것보다 소중했던 추억이 무혁에겐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무혁은 그저 그런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준비 잘 되어가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재희는 혜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야기를 나누었던 디자인팀과 미술팀은 없었고, 혜란이 팔짱을 낀 채 재희를 보고 있었다.


“네. 관장님.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혜란은 재희를 찬찬히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실수가 잦았다.

조형물을 옮기던 설치 기사와 부딪칠 뻔하기도 하고, 일하다가도 이따금 한눈을 팔기도 했다.

방금도 디자인팀, 미술팀과 이야기 나누다 다른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직원이 고개 저으며 다른 곳으로 갔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 모습을 관장실에서 줄곧 지켜보던 혜란이 보다못해 직접 내려왔다.


“관장실로 따라오렴.”

관장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혜란이 재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아닙니다. 별일 없습니다.”

“속일 걸 속이렴.”

“…….”

“종일 다른 생각 하느라 자꾸 실수하지 않니.”

“죄송합니다.”

재희가 얼른 공손하게 사과를 하자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른 변명을 하지 않는 재희를 보며 혜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준비해.”

라윤 갤러리에서는 며느리가 아닌 직원으로서 대하겠다는 혜란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재희가 곧장 대답했다.


“네. 어딘지 말씀해 주시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넌 따로 준비할 건 없어.”

혜란은 대답 대신 한 비서를 불렀다.

한 비서가 들어오자 혜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주 가는 매장에 전화를 넣어놔요. 한 시간 뒤에 도착한다고.”

그렇게 말한 혜란이 재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쇼핑이나 하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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