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4월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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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4월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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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4월의 끝
2022.07.21.
백화점에서 집으로 돌아온 유라는 가방을 벽에다 집어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가방 안의 내용물이 우르르 떨어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유라는 손가락에서 재희가 끼고 있던 반지와 똑같은 반지를 빼내어 집어 던졌다.
기 몇천은 족히 나가는 반지가 벽에서 퉁겨져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뭐? 불쌍해? 자기 걸 탐낸다고? 내가? 웃기는 소리.’
유라 입장에선 재희의 모든 말이 뻔뻔하게 들렸다.
애초에 모조리 자신에게 쥐어질 것들이었다. 그런데 재희가 끼어든 탓에 빼앗겼다.
피해자는 자신이었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지 보자고.’
재희가 찢어버린 사진은 이미 아침에 일강 방송사의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기자에게 넘겼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도 사진을 제보한 상태였다.
그 사진을 언론에서 터뜨리면 유라는 가만히 앉아서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었다.
‘5월의 연회 때 터뜨리면 볼 만할 거야.’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한번 불이 붙으면 삽시간이 퍼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런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터지면 무혁이 싫다고 해도 둘은 이혼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유라가 아는 강진과 혜란은 그런 걸 용납하지 못할 성격이었다.
거기에 정‧재계 거물들이 모인 5월의 연회에서 터뜨리면?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5월의 연회가 좀 엉망진창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라윤 갤러리의 5월의 연회가 망쳐지든 말든 유라에겐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만 성공적으로 열면 그만이었다.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은 나니까, 미셸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사람도 나야. 그럼 내가 미셸인지 뭔지 잘 회유해서 전시회까지 열게 만들면 돼.’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기분을 풀기 위해 백화점에 갔을 때 갑자기 찾아온 무혁이 한 말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찾으시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본인이라고 얘기했습니까.”
아마도 무혁의 귀에 동화책 삽화 일러스트레이터와 관련한 이야기가 들어간 듯했다.
“그게 무혁 오빠랑 무슨 상관이야?”
유라가 알기로 무혁은 혜란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뒤늦게서야 이 소식을 접했겠지.
“왜 거짓말을 한 겁니까.”
“뭐?”
“한유라 씨는 어머니가 찾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잖습니까.”
단언하는 무혁의 말에 유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안 거지? 설마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러나 유라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무혁에게 속삭였다.
“우리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일단 사람 없는 곳으로 갈까?”
다행히 무혁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를 옮긴 유라는 무혁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누가 그래? 내가 거짓말한 거라고?”
어차피 그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바 아니었다.
설사 유라가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고 탄로 나더라도 지금에 와서 찾을 방도도 없을 터였다.
혜란은 이미 일러스트레이터가 유라인 걸 믿고 찾는 걸 그만두었고, 미셸은 일러스트레이터 얼굴도 모르는 데다, 얼마 전 유라의 미술 선생, 장제우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제우는 그 더러운 그림과 비슷하게 그리기 위해 유라가 손수 마련해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림이 완성되면 유라는 5월의 연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면 끝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뭘 말하는 거야?”
밑도 끝도 없는 무혁의 질문에 유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어 무혁의 입에서 나온 ‘노을 서점’이라는 말에 유라는 더더욱 그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희가 끼어드는 바람에 더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유라는 영 찜찜했다.
노을 서점이 뭔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땐 어떻게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책임지게 될 거라는 무혁의 마지막 말이 영 찜찜했다.
‘설마 뭔가 눈치챈 게 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유라는 괜한 기우라 생각하며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무혁이 뭔가 알고 있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유라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는 증거도 없었다.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고.’
이미 5월의 연회에 선보일 그림은 완성되어 가고 있을 테니 유라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문득 바닥을 뒹굴고 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유라는 휴대 전화를 주워들어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
박정수의 이름을 보자마자 유라가 인상을 구기며 그대로 수신을 차단했다.
박정수에게 사진을 받은 뒤, 유라는 그의 연락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끊어버리는 건 곤란하니 10번에 한 번 정도 받아주는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박정수. 거슬리는데 어떻게 치워버린담?’
목적을 이루고 나니 박정수가 거슬렸다.
어떻게 치워버릴지 곰곰이 생각하며 유라는 집 밖으로 나왔다.
* * *
유라가 사는 아파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오피스텔.
유라가 장제우의 작업실로 마련해준 오피스텔이었다.
별다른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유라는 그리다 만 캔버스와 창밖을 보고 있는 장제우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림 안 그리고 뭐 하는 거야? 시간도 없는데.”
유라의 시선이 캔버스로 향했다.
“뭐야. 반도 안 그렸네.”
시간을 그만큼 많이 주었는데도 완성까지 멀어 보이자 짜증이 밀려왔다.
유라가 짜증 섞인 눈으로 장제우를 노려보았다.
장제우가 유라를 돌아보더니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그림 못 그리겠습니다.”
“뭐?”
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왜 이 그림을 흉내 내 그리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진행할 정도면 꽤 중요한 그림인 거 아닙니까.”
“근데?”
“그래서 더 못 하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볼수록 작가의 애정이 보여서 도저히 거짓으로 그릴 수가 없습니다.”
하, 유라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터뜨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이잉-
때마침 휴대 전화가 울렸다.
짜증난 기색이 가득하던 유라의 얼굴이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활짝 펴졌다.
장제우를 향해 진한 미소를 띠며 유라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그동안 잘 지냈니?
“그럼요. 어머님도 잘 계셨죠.”
-나야 항상 똑같지. 그런데 유라야. 혹시…… 그림, 잘 되어가고 있니?
유라는 멀뚱히 서 있는 장제우를 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오랜만에 그리는 건데 힘들진 않고?
“중요한 자리에 선보일 그림인데 힘들어도 열심히 그려야죠.”
사근사근하게 대답하는 유라를 보며 장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도로 스피커폰으로 해서 전화를 받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럼 다행이구나. 그런데 유라야.
“네?”
뭔가 혜란이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 5월의 연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건 알고 있지?
5월의 연회란 말에 장제우의 표정이 굳었다.
유라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그래. 특히 네가 그린 그림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할거야.
“걱정 마세요. 실력이 좀 많이 녹슬었지만, 열심히 그릴게요. 마침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 것 같아요.”
-그래. 유라야. 그림 기대하고 있으마.
혜란과 통화가 끝났다.
“들었지? 장제우.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닐 텐데.”
유라가 허리에 손을 짚고 장제우 앞에 서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 어디에 보여줄 그림인지 이제 알겠어?”
“…….”
“라윤 갤러리 관장님에게 보여줄 그림이야.”
장제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반드시 전시회를 열고 싶어 하는 꿈의 갤러리가 바로 라윤 갤러리였다.
미술학도인 장제우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것도 5월의 연회에 선보여질 그림이라고.”
유라가 팔짱을 끼며 웃음 지었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만 하면 네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라윤 갤러리 관장님에게 부탁할 수도 있어. 그 전에 5월의 연회에도 같이 데리고 가줄 수 있고, 관장님을 소개해 줄 수도 있어.”
장제우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어때. 이제 좀 그릴 마음이 들어?”
극소수만 참석할 수 있다는 라윤 갤러리의 5월의 연회에 참석한다.
거기에 라윤 갤러리 관장과 끈을 만든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한 샘물에 독이 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 그림을 완성해. 연줄을 만들고 싶다면.”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두워진 창밖으로 4월의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을 등진 유라가 싱긋 진한 미소를 지었다.
독기 서린 싸늘한 미소였다.
* * *
레스토랑에서 나오자 어느덧 눈은 그쳤다.
그래도 날은 추웠던지라 무혁이 코트를 벗어 재희의 어깨에 덮어주려 했다.
재희가 그 손길을 피하듯 한발 물러서자 코트를 든 무혁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재희야.”
무혁은 더 이상 재희에게 존대를 쓰지 않았다.
그때 그 비밀 친구였을 때처럼 나지막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다.
조금 거리감 있게 느껴졌던 무혁이 갑자기 확 가까워진 느낌에 재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미안해요. 무혁 씨.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지? 강혁 씨?”
재희의 입에서 예전에 서점 할아버지에게서 빌려 썼던 이름이 흘러나오자 무혁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강혁.
비밀 친구의 이름인 줄 알고 수없이 불렀던 이름.
“그러고 보니 강혁이란 이름도 거짓이었네요.”
재희가 쓰게 웃었다.아직도 무혁이 비밀 친구란 사실이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나이도, 얼굴도 몰랐던 내 비밀 친구에 대해 유일하게 알았던 건 이름이었는데 그것마저도 거짓이었어요.”
“그건.”
당시 종조부를 찾는 일은 KJ 그룹 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점 할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썼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혁은 재희를 속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듣기 좋게 적당히 둘러대도 될 텐데 무혁은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무혁을 물끄러미 보던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서요.”
“서점 할아버지, 그러니까 종조부를 찾는 일은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비밀리에 진행됐던 일이었으니까.”
무혁이 진중한 얼굴로 재희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아무리 재희라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어.”
가감 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무혁을 보는 재희의 가슴이 아려왔다.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면서.”
재희가 슬프게 웃었다.
변명 대신 행동과 솔직하게 말하는 면이 재희가 좋아하는 무혁의 모습 중 하나이기도 했다.
“조금은 듣기 좋게 변명을 하든 둘러대도 될 텐데.”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런 무혁의 모습이 밉기만 하다.
“재희야. 난.”
“미안해요. 무혁 씨. 지금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
재희가 지친 기색으로 아직도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 날보다 유독 피곤했다. 얼른 집에 가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피곤해요. 집에 가고 싶어요.”
“…… 그래.”
차는 어느덧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무혁은 평소대로 재희의 안전 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내내 생각에 잠겨있던 재희가 무혁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무혁의 커다란 몸이 가벼운 그 손짓 하나에 멈췄다.
“무혁 씨.”
“그래.”
재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기다림에 익숙한 무혁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이내 결심한 듯 재희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당분간 따로 지내요.”
가라앉은 얼굴로 재희의 말을 기다리던 무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재희는 무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 식사도 같이할 필요 없고, 출근할 때도 절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
“그럴 수 없어.”
“제가 그러고 싶어요.”
“들어줄 수 없어.”
항상 재희의 말을 들어주던 무혁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혁의 단호한 거부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내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던 재희가 무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재희야.”
재희를 마주한 무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 재희가 짓는 표정.
무혁으로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4월에 들어서며 지었던 그 표정.
그저 이 순간을 묵묵히 견디는 표정으로 재희는 그 누구도 아닌 무혁을 보고 있었다.
재희는 무혁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견뎌내고 있다.
“제가, 제가 괴로워서 그래요.”
“…….”
“무혁 씨 얼굴 보는 게 괴로워서, 무혁 씨 보면 무슨 표정 지어야 할지 몰라서, 어떤 태도로 무혁 씨를 대해야 할지 몰라서…….”
“날 보는 게 괴롭다고…….”
“무혁 씨가 정말…….”
재희는 모처럼 예쁘게 차려입었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이혼은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유라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 싫었고, 무혁과 이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미 무혁은 재희에게 없어선 안 될 남자였고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비밀 친구와 무혁.
부정하고 싶었지만, 무혁이 자신의 비밀 친구였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떻게 무혁을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재희는 무혁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날 생각해 준다면 우리 조금만 시간을 가져요. 부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