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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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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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제보자
2022.07.18.
“회장님. 이번에 부산에서 오픈할 백화점 공사 진행 상황입니다.”
강진이 전화를 끊자, 비서가 늘 그랬듯 곧바로 보고서를 올렸다.
“급한 일인가?”
“네?”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보도록 하지.”
당황하는 비서를 둔 채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일거리는 쌓여있었으나 강진은 시선조차 두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잠시지만 강진의 시선을 빼앗았던 4월의 눈은 그쳐 있었다.
무혁과 같은 워커홀릭으로서, 가정보다는 일평생 회사에 몸 바쳐 일해온 강진이었다. 그런 그가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진은 불빛이 꺼지지 않는 빌딩 숲의 야경을 바라보며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라윤 갤러리에서 윤 비서에게 보고를 받고 온 무혁이 회장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강진이 고함을 쳤다.
무혁에게 문을 열어주던 비서마저도 움찔 놀랄 만큼 강진은 격노했다. 정작 강진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았던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네 눈으로 직접 보거라.”
강진이 오전에 전해 받은 서류봉투를 내던지듯 책상에 올려두었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무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일강 방송사의 오민석이라는 기자가 입수한 사진이다.”
강진은 무혁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해명해라.”
“무엇을 말입니까.”
“도대체 새아기가 어떻게 처신을 했길래 그런 사진이 언론사에 흘러 들어가는지 말이다!”
오전에 비서가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건네준 사진을 본 강진은 경악했다.
누가 봐도 며느리인 재희와 박정수가 찍힌 사진이었다.
익명으로 누군가가 방송사에 제보한 사진이라고 했다. 그러나 KJ 그룹이 해당 방송사의 광고주로서 최대 고객이었고, KJ 그룹의 눈치를 보던 방송사는 제보된 사진을 알려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진이 다른 방송사에도 제보되었다는 사실과 절대 이 사진을 다루지 말라는 연락을 돌렸다는 말과 함께.
이 사진이 만약 기사화 되었다면…….
그 후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진이 혹시나 터졌다면 어쩔뻔했느냐. 회사 주가는 물론 사업도 위험해진다.”
강진은 말없이 사진만 보는 무혁을 보며 강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밀어붙인 결혼이었고 난 허락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런 거냐?”
싸늘한 눈으로 사진을 보던 무혁이 말했다.
“조작된 사진입니다.”
“조작된 사진? 내가 그 정도 확인도 안 해봤을 것 같으냐?”
사진을 보자마자 강진은 곧바로 사진 감정을 지시했다.
조작된 사진이 아님을 확인했는데, 무혁이 아니라 하니 강진은 기가 막혔다.
“새아기를 감쌀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박정수가 일부러 의도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박정수?”
박정수라면 박금호의 골칫덩어리 아들이었다.
무혁의 입에서 느닷없이 박정수란 이름이 나오자 강진이 표정을 굳혔다.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이 사진은 일전 모임에서 박정수가 저에게 보여준 사진입니다.”
“무슨 의도로 그런 것인지 아는 거냐.”
무혁은 사진을 서류봉투에 다시 집어넣었다.
“재희와 제가 헤어지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박정수가 그럴 이유가 있나?”
“이제부터 알아볼 생각입니다.”
“박정수랑 새아기랑 무슨 사이길래 이런 사진이 찍히는 거냐.”
“박정수는 재희의 전 남자친구였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전 남자친구라면 마음이 동할 수도 있을 터다.”
무혁은 단번에 강진의 말을 부정했다.
“재희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난 믿을 수 없다. 뒤로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닐지 아느냐.”
올곧은 눈동자가 참 마음에 들었던 새아기였다.
그런데 이런 사진이 찍히자 강진은 그 눈동자도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지 몰라도 전 압니다.”
그런 강진의 마음과 다르게 무혁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보다 더한 사진이 찍혔다 하더라도 전 재희를 믿습니다.”
“선본 지 얼마 안 돼서 결혼했으면서 네가 새아기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 하는 거냐.”
“제가 종조부 찾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무혁이 KJ 그룹 창업주의 명령을 받고 한참 낡은 서점에 머무를 때였다.
강진은 무혁이 노을 서점에 정들어서 머무른다고 판단했었다.
작은 아버지인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강진은 그 노을 서점을 두고 무혁과 거래를 했다.
자신의 원하는 결과를 무혁이 이뤄낸다면 중간에 가로챈 노을 서점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소중한 노을 서점을 지키기 위해 무혁이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것이기도 했다.
“노을 서점에 머물렀던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단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아버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혁이 무리한 강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토록 노력했던 이유가 노을 서점이 아닌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면.
“설마 새아기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신재희 때문이었다면 강진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 직감했다.
“네가 해결해라.”
강진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무혁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조금의 잡음도 들리지 않도록.”
* * *
‘지금까지 해온 것들 모두 그 아이를 위해서였나.’
단 한 번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던 무뚝뚝한 무혁이 분노라는 감정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바로 강진이 작은 아버지인 서점 할아버지 장례가 끝나자마자 노을 서점을 사들였을 때였다.
“약속, 잊지 마십시오.”
강진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무혁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노을 서점 건들지 마십시오.”
정해진 길대로 살아온 무혁이 유일하게 아끼던 노을 서점. 아니, 신재희.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그 사람의 추억을, 소중한 것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고된 일을 견디던 강무혁. 재희와 결혼하기 위해 강무혁은 강진의 속내를 알면서도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문득 강진은 갑자기 혜란이 생각났다.
강진은 충동적으로 평소에 하지도 않던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웬일이에요?
정이라곤 먼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혜란의 목소리.
강진은 답지 않게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곧 5월의 연회가 열린다고 했었나.”
-그렇죠. 그런데 그게 왜요?
“나도 참석할까 하는데.”
혜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혜란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구요?
혜란이 5월의 연회와 라윤 갤러리 50주년 행사에 특히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강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혜란의 사업이니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로의 사생활이나 사업에 일체의 간섭이나 관심 두지 않을 것.
사이가 벌어진 채로 살아온 강진과 혜란 사이에 암묵적으로 생긴 불문율이었다.
이번 5월의 연회 역시 강진은 적당히 신경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무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당신이 왜요?
혜란은 딱히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이 양반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의심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담겨있었다.
“궁금해서. 아니, 그저 변덕이라고 해두지.”
5월의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을 때, 혜란은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혜란은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
정략으로 결혼한 이후, 강진과 혜란의 사이는 내내 서먹했다.
강진은 혜란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강진은 최대한 혜란의 영역에 터치하지 않았다.
강진의 입장에선 혜란이 마음 편하게 있길 바라서 그로선 최선으로 배려한 거였다.
그러나 혜란은 속 모를 강진의 배려를 알 길이 없었다.
혜란은 자식은 뒤로하고 라윤 갤러리에만 신경을 쏟았고, 지켜보던 강진은 내조를 하길 바랐었다.
자잘한 다툼이 오가다 둘의 사이는 벌어졌다.
결국, 벌어진 사이를 메꾸지 못한 채 둘은 쇼윈도 부부가 되었고 그렇게 줄곧 살아왔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
강진은 몸을 돌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
“5월의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네. 그때 일정 모조리 비우도록 하게.”
* * *
무혁이 재희와 만나기 전, 4월 23일 오전.
미리 연락받은 윤 비서가 회장실에서 나와 차에 오르는 무혁에게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상무님. 말씀하신 일강 방송사 오민석 기자 직통 전화번호입니다.”
윤 비서가 내민 쪽지를 살펴보는 무혁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이전에 제가 지시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일전에 말씀하셨던 박정수에 대한 조사 역시 끝났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박정수가 작은 사모님에게 옛날 일을 사과하고 싶다면서 라윤 갤러리까지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그때 찍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찾아 갔다라.”
JX 클럽에서 박정수가 사진을 들이밀며 큰소리 뻥뻥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박정수는 재희의 전 남친으로서 무혁이 몰랐던 재희의 모습을 알려주며 친분을 쌓으려 했다.
결국, 그 수가 틀어지자 히든카드랍시고 그 사진을 들이밀었겠지만.
박정수의 얕고 검은 속내에 무혁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사정없이 좁혀졌다.
“그리고 박금호 회장 몰래 여자를 여러 명씩 만나고 다닌다 합니다.”
“여성 편력 때문에 해외로 쫓겨났을 텐데.”
“그 기질은 감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수위가 좀 지나칩니다.”
“지나치다면?”
“클럽 하데스를 자주 드나든다고 합니다.”
“클럽 하데스라.”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는 클럽입니다.”
JX 클럽이 비즈니스를 위한 곳이라면 클럽 하데스는 그야말로 막장의 현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그곳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정·재계는 물론 연예인도 드나든다는 은밀하고도 지저분한 클럽이었다.
윤 비서의 보고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파고드십시오. 그곳에 관계된 자들 모두 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뭡니까.”
“JX 클럽 이후로 박정수는 상무님 눈에 띄지 않게 숨죽이고 있는 듯했으나, 최근 한유라 씨와 연락이 잦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유라 씨와 말입니까.”
“네. 주변을 탐문하니 박정수가 한유라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JX 클럽에서 무혁에게 두드려 맞은 이후로 박정수는 무혁을 피했다.
그런 박정수가 단번에 자신임을 알 수 있는 그 사진을 방송국에 제보할 리가 없었다.
무혁이 아는 박정수라면 그 정도로 담이 큰 인간은 아니었다.
한유라라면 모르겠지만.
“혹시 박정수가 언론사와 접촉한 일이 있었습니까.”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무혁이 알기로 한유라와 박정수는 접점이 없었다.
박정수는 해외에 오랫동안 쫓겨나 있었고, 한유라도 귀국한 지 6개월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최근 연락이 잦다.
무혁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한유라에 대해 알아 오십시오. 해외에 있을 때부터 귀국한 뒤, 최근 만나는 사람, 일거수일투족 모조리 다.”
잠시 삽화를 만지작거리던 무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유라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정 모두 취소하십시오.”
“네? 상무님. 그건…….”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윤 비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체념한 얼굴로 스케쥴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무혁은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얼마간의 수신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일강 방송 사회부 기자 오민석입니다.
“KJ 건설의 강무혁입니다.”
무혁의 말에 상대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만납시다.”
*
일강 방송국 근처 카페.
일강 방송국 사회부 신입 기자 오민석은 무혁을 기다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치겠네.”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메일로 제보된 한 장의 사진.
특종에 목말라 있던 오민석은 그 사진을 보자마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KJ 그룹의 하나뿐인 며느리와 낯선 남자의 밀회 장면이 찍힌 사진이었다.
모처럼 특종을 잡았나 싶었는데, 사회부 부장이 오민석이 작성한 기사와 사진을 보자마자 제정신이냐 다그치기 시작했다. 절대 내보내선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민석은 영문도 모른 채 특종을 놓쳤다는 것에 대한 짜증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차에, 마침 오는 전화를 받았다.
바로 지금 카페 안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사진 속 주인공의 남편인 강무혁에게.
“오민석 기자 되십니까.”
“아. 네. 오민석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민석은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무혁의 덩치에 위압감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혁이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예상한 오민석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누구에게서 사진을 입수했습니까.”
“익명이라 그것까진 잘.”
오민석은 사실 누가 제보했는지 알고 있었다.
제보자는 한유라였다.
특종에 목말라하던 오민석에게 한유라가 메일로 사진을 제보했다.
이만하면 특종이 되지 않겠냐며, 특이한 조건까지 내걸었다.
다른 방송사에도 제보할 예정이니, 그 전에 먼저 기사를 내보내는 게 좋을 거라는 경고와 함께.
그렇다고 해서 오민석은 무혁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무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가 제보했는지 끝까지 감춘다면 더 큰 일에 휘말릴 겁니다.”
오민석의 긴장한 눈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며 무혁이 이어 말했다.
“그러나 제보자를 알려준다면 더 큰 특종감을 얻게 될 겁니다.”
“특종감 말입니까.”
오민석이 눈을 반짝했다.
신입 기자인 오민석은 하루빨리 특종감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연히 그런 그에게 더 큰 특종감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먹이였다.
이리저리 재며 머리를 굴리던 오민석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게 사실, 아침에 제게 사진과 함께 메일 한 통이 왔었습니다. 기사화해달라고요.”
“다른 내용은 없습니까.”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만, 조건이 특이했습니다.”
“조건?”
“기사는 5월의 연회 때 이슈화시켜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오민석의 말을 듣는 내내 무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한유라가 사진을 제보했다는 사실에 무혁의 턱이 단단하게 당겨졌다.
그때, 무혁의 휴대 전화 액정에 윤 비서의 메시지가 떴다.
[한유라 씨는 지금 S 백화점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십시오. 오민석 기자님.”
의자 팔걸이를 쥐는 무혁의 손등에 힘줄이 사납게 두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