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친 눈
(74/128)
74화. 그친 눈
(74/128)
#74화. 그친 눈
2022.07.14.
4월의 눈은 점차 밤거리를 하얗게 채웠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던 사람들이 4월에 어울리지 않는 눈이 내리자 저마다 감탄을 하며 구경했다.
새하얀 눈이 꽃잎처럼 야간의 벚꽃 위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흩날리는 눈을 보는 재희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눈이 내리지 않길 바랐는데, 하늘은 잔인하게도 재희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은 항상 가슴 아픈 일이 생겼었다.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거라 기대했던 생일에 어김없이 아픈 기억이 하나 더 새겨졌다.
그 누구도 아닌 기대감을 심어준 사랑하는 남편으로 인해.
“생각해보면 이상했어요.”
다 포기한 듯, 재희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맞선 자리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하고, 제가 아니면 결혼 안 했을 거라는 무혁 씨의 말.”
벚꽃과 눈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색다른 풍경을 선사했지만, 무혁과 재희는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혁 씨. 기억나요? 상견례 할 때요.”
생각해보면 무혁은 이해 못 할 행동을 수없이 보여주었다.
“그 집에서 내 위치가 어땠는지 상견례 자리에서 봤을 텐데도 무혁 씨는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어요.”
자신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 무혁은 일절 묻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었죠.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안다는 듯, 무혁은 다독여주었다.
무혁이 자신에 대해 궁금해했던 건, 대학생 때와 사회생활 했을 때의 모습뿐이었다.
비밀 친구인 무혁과 헤어진 시기, 그러니까 대학생 때부터 무혁과 재회하기 전 딱 그 공백의 시간이었다.
“무혁 씨는 제가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말리지 않았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재희는 떨리는 숨을 잠시 골랐다.
잠시 내렸던 재희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반대편에 굳은 채 앉아 있는, 사랑하는 남편 무혁의 넓은 가슴과 목덜미가 시선에 닿았다.
차례로 단단한 턱과 수없이 입 맞추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남편의 입술을 타고 올라와, 때론 강직한 시선으로, 때론 뜨거운 시선으로, 때론 다정한 시선으로 보던, 지금은 당혹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남편의 눈동자에 시선이 멎었다.
“비밀 친구라면 알 테니까요. 그 집에서 제가 얼마나 억압되어 살아왔는지.”
비밀 친구와 알게 되는 시간이 길수록 조금씩 속마음을 터놓는 시간도 많아졌다.
주로 재희가 조잘대고 비밀 친구는 들어주는 쪽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해도 조금씩 추억을 쌓아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 날은 노을 서점에 조금 늦게 찾았다.
비밀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재희는 최대한 발걸음을 서둘렀다.
노을 서점 입구 앞에서 재희는 볼을 꾹 누르며 그 집에서 할머니가 한 말을 애써 잊으려 했다. 비밀 친구에게 안 좋은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저 왔어요.”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똑같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비밀 친구는 재희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별일 없어요.”
“말해 봐.”
재희는 별일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비밀 친구는 믿지 않았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재희는 비밀 친구에게 그 집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재혁이 성적이 목표했던 만큼 안 올라서 가고 싶었던 학원을 등록하지 못하게 됐어요.”
“……학원?”
“재혁이 성적이 10점 오르면 보내주기로 할머니와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거든요.”
“…….”
“그래도 재혁이 이번에 5점이나 올랐어요. 다음에 5점 더 올리면 등록할 수 있어요. 좀 더 노력하려구요.”
“재희 잘못이 아니야.”
“응. 저도 제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 집에선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말수도 적고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비밀 친구는 항상 재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무혁처럼.
‘하지만 난 아직도 무혁 씨에 대해 잘 몰라.’
무혁은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비밀 친구도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그때와 지금 뭐가 다르지?’
가장 가까이 있었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도 재희는 그때처럼 비밀 친구에 대해서도, 무혁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이 있는데, 이따금 멀게만 느껴졌다.
‘무혁 씨는 비밀 친구에 대해 말하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혼 여행 가서도, 노을 서점 앞에서 무혁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비밀 친구에 대해 조잘조잘 얘기했었다.
비밀 친구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무혁 씨는 그때 그대로예요. 제 말을 들어주고 절 위해주고, 또 절 가엾게 여겼겠죠.”
“재희 씨. 아닙니다. 그런 건.”
“재희예요.”
재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 친구의 재희는 ‘재희 씨’가 아니라 ‘재희’라고 불렸어요.”
수많은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재희는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결국, 재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극히 일부분만 간신히 입 밖으로 내었다.
“재희 씨가 아니라, 재희라구요.”
재희는 넘어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무혁 씨의 본모습이에요?”
“…….”
“아니, 이런 식이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제게 진심을 털어놓을 생각은 있었어요?”
많은 추억을 함께한 소중한 비밀 친구가 자신의 남편이었고, 여태껏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에 재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바닷물에 쓸려가는 모래성처럼 재희를 지탱해 주던 믿음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 견딜 수 있었어요. 무혁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무혁 씨랑 대화를 깊게 나누질 못해도.”
“…….”
“무혁 씨랑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까. 대화할 기회는 많으니까, 결혼 생활이 힘들어도 다 견딜 수 있었다구요.”
창밖을 새하얗게 물들이던 눈이 서서히 그쳐갔다.
언제 내렸냐는 듯 눈이 그친 바깥은 야간의 벚꽃으로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오로지 젖은 길거리만이 눈이 내린 흔적을 품었다.
“무혁 씨가 지금까지 날 속였단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재희는 무혁이 부정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속인 게 아니라고, 잘못 안 거라고.
그러나 재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무혁의 표정을 마주하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니라고 말해요.”
“…….”
“무혁 씨는 내 비밀 친구가 아니라고.”
“…….”
“전부 다 내 오해라고.”
재희가 애원하듯 말했지만, 무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발 그렇게 말해줘요.”
무혁은 재희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재희를 끌어안았다.
재희는 아무런 저항 없이 품에 안겼지만, 무혁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재희를 위하고 보호하고자 했던 자신의 말이, 행동이 도리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사정없이 재희에게, 자신에게 꽂히는 결과가 되었음을.
그리고.
“미안하다. 재희야.”
자신이 제멋대로 내린 어리석은 판단이 소중했던 재희와의 추억을, 재희와의 관계를, 재희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처참하게 부서뜨렸음을.
무혁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모두 무너진 후였다.
* * *
“우와. 엄마. 눈 그쳤어!”
“장도화. 안 넘어지게 조심해.”
“응!”
도화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젖은 땅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벚꽃이 보고 싶다고 도화가 졸라서 온 거였지만, 세라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라는 신이 난 도화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7살 난 딸아이가 폴짝폴짝 뛰면서 신나하는 모습에 세라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땅에 떨어진 벚꽃을 집어 들며 노는 도화를 보던 세라의 입매가 문득 가라앉았다.
‘올해도 라윤 갤러리 5월의 연회 그림을 맡으셨으려나.’
세라는 털털한 성격의 장독수, 그러니까 자신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조실부모한 세라를 키워주던 외할머니.
남편과의 이혼을 강하게 반대하던 외할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8년째 서로 연락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헤어진 뒤, 장독수 역시 5월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리만 가끔 스치듯 들었을 뿐이다.
“엄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세라는 도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화가 어디서 주워왔는지 까치발을 하고 벚꽃 나뭇가지를 세라에게 내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쁘지? 저기 떨어져 있는 거 내가 발견했어!”
“엄마 주는 거야?”
“응!”
“고마워.”
세라가 웃으며 받아들자, 도화가 뒷짐을 지고 머뭇하더니 말했다.
“엄마 기분 좋아?”
“응?”
“도화가 이거 줘서 기분 풀린 거지?”
도화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세라에게 기운 내라며 웃어 보이던 아이였다.
동화책에 실린 삽화를 본 뒤 누워만 있던 도화는 억지로라도 밥을 많이 먹으려 했다.
지금은 잊은 것 같지만 빨리 나아서 삽화에 나온 예쁜 서점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이였다.
체할까 싶어 염려하는 세라에게 도화는 숟가락을 꼭 쥐고 씨익 웃어 보였다.
“엄마. 나 다 나았어. 이렇게 밥도 많이 먹어.”
잠시 옛 생각을 하던 세라는 벚꽃 나뭇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젖은 땅에 떨어진 꽃은 조금 망가졌지만 여전히 예뻤다.
도화 나름대로 고르고 골라온, 흙이 잔뜩 묻어도 빛을 잃지 않는 벚꽃.
마치 도화 같았다.
7살 난 아이의 마음 씀씀이에 세라가 웃으며 도화를 꼭 안아주었다.
“그럼.”
도화가 꺄르르 웃었다.
‘그래. 지금은 그 일러스트레이터를 만날 생각만 하자.’
우리 도화의 은인.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도화를 꼭 안아주었다.
* * *
라윤 갤러리 관장실.
혜란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유라야. 그림 기대하고 있으마.”
유라와 통화를 끊었지만, 혜란은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무혁이 유라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고 한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생각 없이 그런 말 할 놈이 아닌데.’
급하게 나간 무혁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찜찜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유라는 혜란이 요구한 그림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대답해 주었다.
‘유라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휴대 전화를 엎어두며 혜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어릴 때부터 봐온 아이인데, 날 속일 리가 없어.’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깥 풍경이라도 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간 혜란의 걸음이 멈췄다.
“4월에 웬 눈이지?”
혜란은 밤하늘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 좀 봐. 지금 한눈팔 때가 아니지.’
잠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눈을 보던 혜란이 다시 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5월의 연회가 바로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지금, 혜란은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5월의 연회는 물론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도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다. 미셸을 붙잡기만 한다면!
‘그럼 내 라윤 갤러리를 감히 누구도 넘어설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혜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을 때쯤 휴대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신이 웬일이에요?”
혜란은 남편인 강진의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다.
그 흔한 인사도 없었다. 마치 업무적으로 대하듯 했다.
전화를 건 강진은 그답지 않게 잠시 말이 없었다.
“여보?”
혜란이 미간을 좁히며 대답을 재촉하자, 잠시 후 강진이 말했다.
-곧 5월의 연회가 열린다고 했었나.
“그렇죠. 그런데 그게 왜요?”
-나도 참석할까 하는데.
“……뭐라구요?”
혜란은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혜란이 관장직으로 취임할 때를 제외하고는 강진은 단 한 번도 라윤 갤러리에 관련된 일에는 참석도 간섭도 하지 않았다.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부부동반 모임을 제외하고는 혜란 역시 강진의 사업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부부사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강진이 먼저 5월의 연회에 참석한다니 혜란으로서는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왜요?”
-궁금해서. 아니, 그저 변덕이라고 해두지.
강직하고 콘크리트 같은 성격을 가진 남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에 혜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음대로 해요.”
달리 할 말이 없었던 혜란은 전화를 끊었다.
‘무슨 속셈이지?’
결혼할 때부터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남편이었다.
쇼윈도 부부이긴 하지만,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속이 복잡해진 혜란이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그쳤네.”
잠시지만 혜란의 시선을 빼앗았던 4월의 눈이 어느덧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