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4월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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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4월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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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4월의 눈
2022.07.11.
“그 겨울날, 재희를 처음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널 본적이 없어.”
노을 서점은 재희가 가끔 희수를 데려올 때 제외하고는, 젊은 사람은 잘 찾지 않았다. 건물 사이에 파묻혀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했지만, 낡고 허름한 외관은 쉽사리 발을 들이기 어려웠다.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지만, 추억을 곱씹으며 종종 찾아오는 어르신들을 제외하곤 찾는 이조차 없었다.
그런 곳에 재희 외에 젊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찾아왔다면 무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언젠가 한번 스치듯 서점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재희와 무혁이 네가 와서 요즘 이 할애비는 즐겁구나. 먼저 간 내 안사람도 분명 좋아했을 거야.”
서점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요즘, 서점 할아버지는 재희를 특히 더 예뻐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라면서, 먼저 하늘로 간 아내가 딸을 무척이나 갖고 싶어 했다면서.
그랬던 서점 할아버지여서 유라가 한 번이라도 노을 서점에 발걸음했다면 분명 무혁에게 말했었을 터였다.
유라가 한 번도 노을 서점에 온 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혁은 일부러 여기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가 있었다. 심증을 확신으로 굳히기 위해서였다.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유라는 팔짱을 끼고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둘이 맞선 자리에서 처음 만난 거 아니었어? 그보다 노을 서점?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무지 무혁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지만, 유라는 시침을 뗐다.
“노을 서점이라면 잘 알지. 멋진 곳이야. 세련되고.”
무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무혁이 삽화를 펼쳐 유라에게 보여주었다.
유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삽화를 바라보았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
무혁의 말에 유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혁 오빠는 지금 내가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유라는 손을 뻗어 삽화를 곱게 접고는 다시 무혁에게 건네주었다.
“아쉽네. 무혁 오빠. 내가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맞아. 어머님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
“안 그래도 어머님이 나에게 이거랑 비슷한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셨어. 이제 거의 완성 단계야.”
“…….”
“내가 그 일러스트레이터란 건 5월의 연회 때 확실하게 증명이 될 거야.”
여유롭던 유라의 표정은 이어진 무혁의 말에 아주 잠깐 굳었다.
“재희는 노을 서점을 아주 좋아했다.”
무혁은 유라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그곳만큼은 건드리지 마라.”
무게감 실린 목소리의 위압감에 유라가 주춤했다.
“지금 내 앞에서 재희 씨 편을 들어줄 때가 아닐 텐데.”
이윽고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유라가 팔을 뻗어 무혁의 단단한 팔을 짚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무혁의 팔을 유혹적으로 쓸었다. 그러나 무혁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유라를 내려다보았다.
“무혁 오빠는 아내 단속 좀 잘해야겠던걸.”
“…….”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한유라. 그 말 책임져야 할 거다.”
“뭐?”
무혁은 한유라의 되물음에 답해줄 생각 따윈 없었다.
심증은 확신이 되었고, 한유라는 무혁이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무슨 소릴…….”
“무혁 씨.”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때문에 유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무혁과 유라의 시선이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모퉁이에서 재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회사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긴 웬일이에요?”
재희는 무혁과 유라를 번갈아 보며 살포시 웃음 지었다.
재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무혁 옆에 자연스럽게 섰다.
그러곤 유라에게 시선을 두었다.
“유라 씨도 우연이네요. 여기서 다 만나고. 제 남편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재희가 유라가 짚었던 무혁의 팔을 손으로 가만히 쓸며 팔짱을 꼈다.
유라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무혁 씨도 유라 씨와 약속 있었어요?”
재희가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재희는 자신을 보는 무혁의 눈동자에 서린 당혹이라는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마치 들켜선 안 되는 장면을 들킨 사람처럼 저를 보는 시선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재희는 짐짓 못 본 척 저를 노려보는 유라를 다시 돌아보았다.
“볼 일이 없다면 이만, 전 남편이랑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가려고 해요.”
“……그러세요. 저도 볼일이 있어서.”
유라는 억지로 웃으며 그대로 홱 몸을 돌려 가버렸다.
유라가 멀어지자 재희는 팔짱 꼈던 팔을 풀었다.
“재희…….”
“무혁 씨.”
재희가 무혁의 말을 끊으며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재희에게 팔을 뻗던 무혁의 손의 허공에 멈췄다.
“배고파요. 이르지만 우리 저녁 먹어요.”
* * *
벚꽃뷰로 유명한 레스토랑엔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예약되어 있던 시간을 좀 더 앞당기게 되었지만, 레스토랑 측은 흔쾌히 변경해 주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재희와 무혁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재희는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았다.
창밖에 펼쳐진 벚꽃뷰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에 못지않게 레스토랑 안도 근사했다.
“기대했던 대로 너무 멋진 곳이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제가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켜도 되죠?”
메뉴판을 펼친 재희가 무혁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내 생일이니까요.”
무혁은 어색해 보이는 웃음기 서린 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재희는 정말 기대된다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혁은 그런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 C 코스로 할래요. 무혁 씨는요?”
“같은 거로.”
웨이터에게 식사를 주문한 뒤 재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벚꽃은 이미 많이 졌지만, 그래도 분홍색으로 물든 거리가 참 예뻤다.
지금도 이런데 야간의 벚꽃은 얼마나 더 예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습관적으로 재희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다행히 아직 눈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재희 씨. 아까.”
“무혁 씨.”
답지 않게 말을 끊으며 재희가 무혁을 바라보았다.
“우리 다 먹고 얘기해요. 모처럼 이런 근사한 곳에 왔는데, 제대로 즐기고 싶어요.”
무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재희는 음식을 먹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무혁과 소소한 대화를 했다.
무혁 역시 가만히 들어주며 재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펴보려는 듯한 무혁의 시선에 재희는 평소와 똑같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메인요리까지 모두 깨끗하게 비운 재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후식으로 생과일을 얹은 아이스크림이 나오자 재희는 그것을 한 입 떠먹었다.
새콤한 과일과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아이스크림도 너무 맛있어요.”
“내 것도 드십시오.”
“그래도 돼요?”
평소의 재희라면 사양했을 테지만, 오늘은 사양하지 않았다.
재희는 무혁의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모두 끝내자 어느덧 바깥은 해가 지고 색색의 조명이 벚꽃 거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재희는 낮과 다른 멋을 뿌리고 있는 벚꽃 길을 바라보았다.
야간의 벚꽃길을 즐기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혁 씨.”
재희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며 무혁을 바라보았다.
무혁을 보는 재희의 얼굴엔 식사 때까지만 해도 스며있던 설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무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진지한 얼굴로 재희를 응시했다.
“저 오늘 연희동에 다녀왔어요.”
“왭니까.”
무혁의 목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오늘은 재희 씨 생일입니다.”
그 어느 날보다 특별해야 할 날에 그 집에 가는 건, 무혁으로선 용납되지 않았다.
재희는 무릎에 올려놨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두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부르셔서 잠시 다녀왔어요.”
“아침에 그런 소리는 없었잖습니까.”
“무혁 씨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신경?”
“제 일이니까 제 선에서 매듭짓고 싶었어요.”
“…….”
“무혁 씨가 저 때문에 그 집에 휘둘리길 바라지 않았어요.”
“우린 부부입니다. 혼자 해결하지 마십시오.”
부부.
무혁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참으로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러게요. 우린 부부인데 무혁 씨는 왜 나에게 감추는 게 많을까요.’
재희는 쓰게 웃었다.
“재희 씨 일인데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가서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쩔 뻔했습니까.”
“아무 일 없었어요.”
“아무 일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재희는 화가 난 듯 미간을 좁힌 무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과할 정도로 무혁이 저를 보호하는 이유를, 가끔 이해 못 할 그의 행동들도.
‘무혁 씨는 항상 내 걱정을 했어.’
재희는 시선을 가만히 내렸다.
재희의 시선 끝에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걸렸다.
‘마치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결혼 이후 무혁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몇 번이더라.
무혁은 항상 바빴고 또 말이 없었다.
항상 그의 기세에 밀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도 여러 번.
‘무혁 씨와 깊게 대화하길 기대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재희는 무서워졌다.
재희는 오른손으로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예쁘고 마음에 꼭 드는 반지였다.
무혁이 직접 고르고 골라 선물한 반지여서 더더욱 그랬다.
“무혁 씨.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재희가 이윽고 마음을 굳히고 시선을 들어 무혁을 마주했다.
“이 반지. 무혁 씨가 직접 고른 거 맞아요?”
무혁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재희가 이해 가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그보다 연희동엔…….”
재희가 힘주어 다시 물었다.
“대답해 줘요. 다른 사람이랑 고른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재희의 행동에도 무혁은 눈살을 찌푸리긴커녕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럼 이 반지 찾으러 갔을 때 혼자 간 거 맞아요?”
“무슨 의미입니까.”
“대답해 줘요. 무혁 씨. 이 반지…… 누구랑 찾으러 갔어요?”
“혼자 갔습니다.”
이번에도 무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정말요?”
“무슨.”
“대답해 줘요. 정말 혼자 가서 찾은 게 맞는지.”
평소와 다른 재희의 반응에 무혁은 침묵했다.
재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생각을 파악하려는 듯 집요한 그의 시선에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혼자 갔고 누굴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무혁의 대답에 재희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가 풀렸다.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무혁 씨는 절 재희 씨라고 부르네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재희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유라 씨 앞에선 절 재희라고 부르더니.”
재희의 말에 무혁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혁을 바라보는 재희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조금씩 가슴 한편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혁 씨는요.”
“…….”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생각해 주고 위해주고 보호해 주려고 해요.”
“…….”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기분 좋았어요. 이 남자가 날 참 많이 좋아해 주는구나. 사랑받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거구나.”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더라고요. 분명 눈앞에 있고 사랑하는 남편인데 이따금 멀게만 느껴져요.”
“재희 씨.”
“그런데 오늘 그 이유를 알았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나지막하게 묻는 무혁의 목소리가, 평소라면 두근거렸을 그의 목소리가 듣기 괴로웠다.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기일이 아닌 자신의 생일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저녁을 하게 되었다.
설레었던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는 남편이 예약해준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재희는 내내 편하지 않았다.
맛있었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겨울날, 재희를 처음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널 본 적이 없어.”
무혁이 했던 말이 내내 혼란스럽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혁 씨.”
재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풀었다.
“왜 거짓말을 해요?”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재희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무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를 바라보는 재희의 표정은,
“만났잖아요.”
서글프고 슬펐고,
“이 반지 찾으러 간 날, 유라 씨와.”
실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건.”
그런 게 아님을 말하려 할 때, 이어진 재희의 말에 무혁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박정수의 말대로 저는 원하는 거 하나 쥐여 주면 얌전해지니까, 그래서 거짓말한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들었어요. JX 클럽에서 무혁 씨가 박정수와 나눈 대화를.”
“…….”
“무혁 씨가 그래, 라고 대답한 것도요.”
“재희 씨. 오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혁은 단 한 번도 재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무혁 씨에게서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구요.”
이렇게 쉽게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이었는데, 재희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그날 듣지 못했다.
“무혁 씨는 제가 하려는 말조차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재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저에게 감추거나 말하지 않은 게 많겠죠.”
“재희 씨.”
“노을 서점도 아마 끝까지 저한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희의 입에서 노을 서점이 흘러나오자, 무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숨겼어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가까스로 갈무리했던 재희의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 말 안 했어요?”
울음을 꾹 눌러 참은 아내의 목소리는,
“무혁 씨가 내 비밀 친구라고.”
절망. 실망.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왜…… 날 속였어요?”
바로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아내를 보는 남자 역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 벚꽃 거리를 새하얀 무언가가 허공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4월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