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목격 (72/128)


#72화. 목격
2022.07.07.



“유라 씨. 정말 불쌍한 사람이군요.”

담담하게 흘러나온 재희의 말에 유라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진한 미소를 띠며 항상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주던 유라였다.

재희는 완전히 가면 벗어던진 유라의 독기 오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먼저 확실히 해두려고 해요.”

유라는 무혁이 처음부터 제 것이었다고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재희였기에 무혁은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었다.

그 자리에 재희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가 직접 말했다.


“무혁 씨는 단 한 번도 유라 씨의 것이었던 적이 없어요.”

“뭐야?”

“만약 그때로 돌아가서 그 자리에 제가 아닌 유라 씨가 있었어도 마찬가지예요.”

“…….”

“유라 씨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무혁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투둑, 재희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잘게 찢어진 사진이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러니 유라 씨는 제게서 돌려받을 게 없어요.”

단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도 없는 것을 자기 것이라 우기는 유라가 가여워 보였다.

재희가 쐐기를 박았다.


“무혁 씨와 저, 이혼할 일도 없고 하지 않아요.”

“진흙탕 싸움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네. 내가 못 할 것 같아?”

“진흙탕 싸움할 일도 없을 거예요. 이 사진 하나로 뭔가 바뀌는 일 따윈 없을 거니까요.”

“찢어서 증거를 없앨 생각이었나 본데 그 사진 원본조차 없을까 봐? 지금 바로 무혁 오빠에게 사진을 전송할 수도 있어요.”

협박조로 얘기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띤 유라는 곧바로 들려오는 재희의 대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보내요.”

“뭐?”

“보내도 괜찮아요. 무혁 씨는 겨우 이 정도 사진에 나에게 화낼 남자가 아니니까.”

“…….”

할 말을 잃은 듯 유라가 매섭게 재희를 노려보았다.

반면 재희는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한 얼굴로 유라를 마주 볼 뿐이었다.


“아버님, 어머님에게 보낸다고 했죠? 언론에 제보할 거라고도 했고요. 해도 괜찮아요. 어차피 금방 묻힐 테니까.”

근거 없는 믿음일 수도 있지만, 재희는 무혁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재희 눈에는 큰 패라도 된 듯이 사진을 내민 유라의 행동이 가여워 보였다.


“유라 씨 말이 맞아요. 전 집안도 무혁 씨 집안에 비하면 별거 아니에요. 어머님도 유라 씨를 며느리로 내심 생각해 두고 계셨다는 거 익히 알고 있고요.”

혜란이 그렇게 티를 냈으니 재희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무혁의 아내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어머님의 며느리는 저이고, 당연히 저와 무혁 씨는 이혼할 일 따위 없어요.”

시댁인 평창동에 다녀온 이후, 혜란의 태도가 전과 달라졌다.

저를 보는 혜란의 못마땅한 시선은 부드러워졌고, 믿는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무혁과 아직 풀지 못한 대화는 많지만, 괜찮았다. 무혁과 대화할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히 많았다.


“유라 씨는 집안도, 직업도 모두 저보다 좋아요. 당당하고 거침이 없죠.”

“…….”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가요.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는 유라 씨가 왜 제 것을 탐내는지.”

“탐낸다고? 내가?”

“처음부터 유라 씨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 걸 내 것이라고 말하며, 남의 것을 탐내니.”

유라를 보는 재희의 눈동자엔 안타까움도 연민도 화도 없었다.

오히려 동정심이 담긴 시선으로 유라를 보며 재희는 말을 이었다.


“세상 다 가진 유라 씨지만, 지금 제 눈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장 가여운 사람으로 보여요.”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유라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자 카페 안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유라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재희를 노려보았고, 재희는 그런 유라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웃기지 마! 내 거야! 내 거였다고! 네가 중간에 가로채는 바람에 다……!”

날이 잔뜩 선 채로 소리 지르는 유라를 보며 재희가 딱 잘라 말했다.


“아뇨. 전 가로챈 적이 없어요. 오히려 유라 씨가 지금 제 것을 가로채려고 하는 거지.”

“이게 진짜!”

유라가 식어버린 커피잔에 손을 가져가려 하자 재희가 그 손목을 잡았다.


“이거 안 놔?!”

“커피를 뿌리지 않는다고 약속을 한다면요.”

“뭐?”

“난 유라 씨가 뿌리는 커피를 맞을 생각이 없어요.”

“익!”

재희에게 커피를 쏟아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유라가 움찔하자, 재희가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재희가 커피잔을 멀리 밀어두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무슨 할 말인가 했더니, 이런 일이었다면 유라 씨도 시간 낭비했네요.”

유라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를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가면 5월의 연회, 제대로 치르지 못할 텐데.”

재희의 말간 눈동자가 유라에게 향했다.

거의 악만 남은 듯 유라가 조소를 띄우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은 모양인데 어머님이 그토록 찾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로 나야. 재희 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릴 수 있어.”

“…….”

“그럼 어머님이 그토록 공들인 5월의 연회 다 망칠지도 모른다고. 신재희, 너 때문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꾸길 원한다면 바꿔드릴게요.”

담담한 재희의 대답에 유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뭐?”

“다만, 저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억지? 지금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거야?”

“일러스트레이터로서 5월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과, 참석 취소하는 것. 어떤 게 맞는 선택인지 유라 씨도 알 거라고 생각해요.”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또 하나.”

씨근덕거리는 유라의 말을 자르며 재희가 말을 이었다.


“유라 씨를 위해서 하나 말해줄게요. 박정수와 멀어지세요. 가까이 해봐야 좋을 것 없는 사람이니까.”

박정수는 집요한 남자였다.

여성 편력도 있었고, 마음에 드는 여자면 싫다고 해도 쫓아다니는 남자였다.

머리는 나쁘지만 성격은 음흉해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되지도 않는 악의적인 소문도 얼마든지 퍼뜨릴 남자였다. 재희는 그걸 대학생 때 겪었고, 이제는 더 이상 박정수와 엮이길 원치 않았다.

유라에게 굳이 경고를 해주는 이유는 아주 조금의 동정심이 남아서였다.


“앞으론 사적인 만남보단 일러스트레이터 한유라 씨로서 만나길 바랄게요.”

“지금 누구한테 그딴 말을.”

유라가 이를 갈며 물잔을 쥐었다.

그대로 재희에게 물을 뿌리려던 유라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멎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결혼반지임이 분명한 반지와 같이 레이어드 된 또 다른 반지.

그 반지를 발견한 유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그 반지. 참 잘 어울리네요.”

줄곧 반말하던 유라는 어느새 평소처럼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유라는 여유로운 표정이었으나 이미 한번 드러난 독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딱 보자마자 재희 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했었는데, 내 안목이 정확했죠.”

“…….”

“알아요? 그 반지. 내가 무혁 오빠에게 추천했다는 거.”

“유라 씨. 어설픈 거짓말은 그만두세요.”

“일전에 백화점 앞에서 무혁 오빠를 만났어요. 재희 씨에게 선물할 거라면서 고민하길래 제가 좀 도와줬죠.”

“…….”

“G 브랜드에서 나온 가장 인기 있는 반지예요. 레이어드 하기에도 좋고, 프러포즈용으로도 좋고요. 무혁 오빠 정도라면 기천만 원 하는 반지 같은 거 부담도 안 될 거고요.”

굳은 재희의 표정을 보며 유라가 즐거운 듯 말했다.


“토요일 날 반지가 도착했다고 하길래 같이 찾으러 가면서 그날 차까지 같이 마셨어요.”

무혁이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려던 걸 일을 핑계로 붙잡았던 거였지만, 굳이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었다.

흔들리는 재희의 표정을 보니 더욱 즐거워진 유라가 말했다.


“아, 물론 보답으로 무혁 오빠에게 같은 반지를 선물 받았죠.”

유라가 손을 들어 재희에게 보여주었다.

재희 손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유라의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지를 보며 재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라면 누구든 구매할 수 있어요.”

“같은 날에 똑같은 반지를 살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특히 이런 프러포즈용 고가의 반지를요.”

턱을 괴는 유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재희 씨 반지가 참 잘 어울려서 무혁 오빠와 함께 골라준 보람이 있어 기쁘네요.”

 

 

* * *

백화점을 나오는 재희의 얼굴은 어두웠다.
 


“믿지 못하겠다면 그 매장에 직접 확인해도 좋아. 그날 주문한 반지가 도착한 건 딱 두 점이었을 거니까.”

 
헤어지기 직전 유라가 한 말이었다.

못내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재희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백화점에 찾아갔다.

반지에 조금 흠집이 나서 A/S를 받을 수 있냐고 물으며, 그날 도착한 반지에 대해 물었다. 재희는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절망적이었다.
 


“네. 그날 한 여자 고객님과 남자 고객님이 이 반지를 찾아가셨어요.”


“정말 두 점만 나간 건가요?”


“프러포즈용이다 보니 보통 여성용 반지와 남성용 반지가 커플로 함께 나가는데 그날은 여성용 반지만 두 점이 나가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유라의 말을 100%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황상 유라의 말이 맞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무혁 씨가 유라 씨에게 반지를 사주었을 리가 없어,’

무혁은 절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반지를 사줄 남자는 아니었다.

아마도 유라 스스로 반지를 샀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날짜까지 다 알고 있어. 정말로 무혁 씨와 유라 씨가 그날 만났을까.’

재희는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라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자신의 것과 똑같은 반지.

자꾸만 유라의 얼굴과 반지가 겹쳐 보이자,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무혁 씨에게 들은 것도 아니잖아. 직접 물어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를 발견한 재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 시간에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 때문이었다.


‘무혁 씨? 그리고…….’

무혁이 거침없는 걸음으로 누군가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곤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차에서 내리던 여자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한유라…….’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근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무혁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혁이 뭐라고 하자, 잠시 유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더니 이내 진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무혁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뒤꿈치를 올려 뭐라고 속삭였다.


“…….”

당연히 뿌리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무혁은 유라와 함께 어디론가 이동했다. 재희는 곧바로 미행하듯 둘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공원에 도착한 둘이 대화를 나누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밀회를 즐기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대화를 듣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또렷하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뭘 말하는 거야?”

유라의 뻔뻔한 대꾸에 드물게 화가 난 얼굴로 무혁이 나지막하게 다시 말했다.


“노을 서점.”

무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친숙한 단어에 재희의 몸이 굳었다.

장독수 작업실로 외근을 나왔다가 무혁과 노을 서점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재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고, 언젠가 무혁과 함께 오고 싶다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노을 서점은 갑자기 왜…….’

재희는 무혁이 왜 유라와 만나서 노을 서점을 입에 올렸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혁이 다시 한번 유라에게 물었다.


“한유라, 네가 노을 서점에 간 적이 있는지 묻는 거다.”

무혁은 더 이상 유라에게 존대 따위 쓰고 있지 않았다.


“난 한 번도 노을 서점에서 널 본 적 없어.”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겨울날, 재희와 처음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재희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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