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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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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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이혼해요.
2022.07.04.
무혁은 한참이나 삽화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재희와 함께한 추억이 담뿍 묻어 있는, 노을 서점을 보고 느끼고 머물러야만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
결코, 다른 이가 상상만으로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한유라, 그 여자가 감히 이걸 자신이 그렸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삽화를 내려놓으며 무혁은 분노로 들끓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의 화를 역력히 보여주듯 커다란 몸이 사납게 한번 부풀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머니. 한유라 씨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닙니다.”
“뭐?”
“제가 진짜 일러스트레이터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유라가 내가 찾던 일러스트레이터라니까.”
“말하자면 사정이 깁니다.”
무혁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간을 좁히며 발신인을 확인하자, 라윤 갤러리 로비에 있을 윤 비서의 이름이 떠 있었다.
무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윤 비서가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전화 드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윤 비서의 설명을 듣자마자 무혁이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왜 일어나? 무슨 일이니?”
혜란이 물었지만,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삽화를 챙겨 넣으며 답지 않게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삽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뭐? 얘, 무혁아! 얘!”
혜란이 불렀지만 무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장실에서 나왔다.
복도 맞은편에서 커피를 들고 걸어오던 직원이 무혁을 발견하곤 인사를 하려다 사색이 되며 얼른 비켜섰다.
험악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며 휴대전화를 쥔 무혁의 손등에 핏줄이 사납게 솟아올랐다.
* * *
2시 40분.
그 집에서 그렇게 나온 이후, 재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카페에 들어와 카모마일 티를 주문했다.
막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던 재희는 문득 무혁과 맞선 봤을 때가 생각나 푸스스 웃었다.
‘무혁 씨랑 선볼 때도 이 시간쯤 카페에 앉아 있었지.’
맞선 자리에 나온 무혁의 차림새를 보고 놀랐던 것도,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한 말에 당황했던 것도, 결혼 준비했던 것도 모두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벌써 몇 달이 흘렀다.
‘비록 그때처럼 겨울도 아니고, 지금은 무혁 씨가 아닌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만.’
잠시 무혁과 처음 만났을 때를 곱씹던 재희는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온 이후 그 집에선 재희에게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성격상 당장 재희에게 전화해 호통을 칠 줄 알았는데, 아무 연락이 없자 재희는 도리어 불안해졌다.
‘아버지 귀에도 분명히 들어갔을 건데. 연락해 볼까.’
그 집에서 반응이 없는 게 신경이 쓰여 휴대전화 액정을 만지는 손가락이 부산스러웠다.
이윽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멎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와 함께 오늘 아침 무혁이 선물한 반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펴서 반지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그런 재희의 취향이 반영된 결혼반지도 심플했다.
다소 심심한 느낌이 들었던 결혼반지에 생일 선물로 받은 자잘한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레이어드 했더니 훨씬 예쁜 데다 어색함이 없었다.
‘어디서 샀을까. 직접 혼자서 고른 걸까.’
아침에 무혁이 무슨 귀중한 보석을 다루듯 조심조심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덕분에 무거운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만두자. 처음 맞이하는 내 생일에 무혁 씨랑 같이 저녁 먹는데 기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 또각거리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반지를 보던 재희가 고개를 들자, 그 앞엔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한유라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 있었다.
“제가 늦었네요.”
“아니에요. 딱 시간 맞춰 왔어요.”
커피를 시킨 유라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아 앉으며 다소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에 놓이고, 모락모락 뜨겁던 김이 조금 식을 때쯤이 되어서야 유라가 입을 열었다.
“전 바람 맞을 줄 알았어요.”
“…….”
“제가 좀 떼를 썼죠?”
“네. 떼를 쓰셨지만, 유라 씨는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이니 무시할 순 없죠.”
재희의 정직한 대답에 유라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유라가 예상한 대답은 ‘괜찮아요’였지만, 재희는 유라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속으로 이를 갈던 유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원래 재희 씨 성격인가요?”
재희가 말없이 바라보자 유라가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 조용하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길래 참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유라 씨.”
재희가 유라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겠어요. 저를 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지.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까칠하시긴.”
유라가 피식 웃으며 가방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재희 앞으로 밀었다.
“재희 씨는 행동 가짐을 좀 조심하시는 게 좋겠네요.”
사진을 확인한 재희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지난번 라윤 갤러리 앞까지 찾아온 박정수에게 팔을 잡힌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남들이 본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구도였다.
“이게 뭐죠?”
“시치미 떼지 마세요. 자기 자신도 몰라보는 건 아니죠?”
“…….”
“제가 오늘 보자고 한 용건은 이거예요.”
유라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으며 말했다.
“모르시겠지만 어머님은 굉장히 프라이드가 높으신 분이에요. 자기 자신은 물론, 라윤 갤러리에 조금이라도 흠집 내는 사람에겐 용서가 없는 분이기도 하죠.”
유라는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재희의 눈을 마주 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재희 씨 집안이 별 볼 일 없더라도, 어쨌든 무혁 오빠랑 결혼했잖아요? 분에 넘치는 집에 시집까지 왔는데 숨죽여 살기는커녕 이런 사진이나 찍히다니.”
“…….”
“물론 전 재희 씨가 이런 간 큰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과연 어머님이나 아버님, 무혁 오빠도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네요.”
재희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박정수가 라윤 갤러리까지 찾아와 미안하다며 억지로 붙잡고 사과했던 그날.
평소와 다르게 끈질기게 굴었던 탓에, 재희는 대충 사과를 받아주고 보냈었다.
이런 목적인 줄도 모르고.
재희가 사진을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이 사진을 유라 씨가 갖고 있는 건가요.”
“지난번 JX 클럽에서 정수 오빠가 자랑하길래 봤죠. 천만 다행히도 무혁 오빠에게 이 사진이 넘어가기 전에 제가 가로챈 거고요.”
“이 사진을 제게 보여주는 이유가 뭔가요?”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예요.”
“진흙탕 싸움?”
“제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유라가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해요.”
이혼.
유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재희의 표정 역시 굳었다.
지금까지 유라의 입가에 차갑게 머금어졌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족들이 아닌 제삼자인 유라의 입에서 이혼하라는 소리가 나오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재희는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잠시 숨을 삼켰다.
“…… 이혼이요?”
재희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자, 유라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 사진, 내가 어머님에게 보여드리면 어떨 것 같아요?”
“…….”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 분수에 맞지 않아도 얌전해서 그나마 봐줄 만했는데, 외도를 하고 있다. 이 사실을 그 어느 시부모님이 이걸 가볍게 넘길까요?”
유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말했죠? 어머님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다고. 그리고 아버님도 만만치 않아요. 아버님은 기업 이미지에 타격이 갈만한 일이 생긴다면 인정사정없는 분이죠. 평생 그리 사신 분이시고요.”
“외도를 한 사실이 없는데 제가 유라 씨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뭔가요?”
“그걸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믿을까요? 뭐, 무혁 오빠는 믿을 수도 있겠죠. 재희 씨와 결혼을 밀어붙일 정도였으니. 하지만.”
유라가 손가락으로 사진을 재희 앞에 조금 더 밀어놓으며 말했다.
“기사에 실린 그 사진을 본 사람들도 과연 재희 씨의 말을 믿을까요?”
명백한 협박성 발언에 재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유라 씨. 듣자 하니 도를 넘는군요.”
“말했잖아요. 진흙탕 싸움하고 싶지 않다고.”
이혼하지 않으면 이 사진을 언론사에 제보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유라를 보며 재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풀었다.
지금까지 유라가 보여준 진한 미소 따위는 가면이었을까.
진한 미소를 지워버린 유라의 얼굴엔 독기가 가득 서렸다.
그리고 자신 앞에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하는 유라는 재희의 눈엔 추한 여자로 보였다.
“왜 제가 이혼을 해야 하죠?”
“무혁 오빠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요.”
당당하게 무혁을 내 것이라 말하는 유라를 재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혁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로 유라가 말을 이었다.
“그때 관장실에서 들었겠지만, 원래 어머님이 나를 며느리로 삼을 생각이었어요. 저 역시 무혁 오빠와 형식뿐인 선을 보기로 했던 상태였고, 아무 일 없었다면 우린 결혼했을 거예요.”
재희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라윤 갤러리 사교 모음에서 박명주가 저를 며느리로 점 찍었다는 사실과 중간에 혜란이 가로챘다는 사실을 들었었다.
유라의 말대로 혜란이 선 자리를 가로채지 않았다면 재희는 무혁과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차분한 얼굴로 점점 눈동자에 독기가 서려가는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그런데 그 중간에 신재희, 네가 끼어든 거야.”
유라는 남 부러울 것 없는, 대한민국 재계 순위 10위 내에 드는 기업 총수의 딸인 데다 욕심 또한 많았다.
가지고 싶은 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유라가 처음으로 뺏겼다.
집안도 뭐도 무엇하나 저보다 못한 신재희, 이 여자에게.
그게 너무 자존심 상했고 화가 났다.
‘거슬려. 정말 거슬려.’
박정수 따위에게나 어울릴 여자가 무혁의 곁에 있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동안 결혼 생활 참 행복했지? 평생 가도 얻지 못할 KJ 그룹의 하나뿐인 며느리. 거기다 라윤 갤러리 차기 관장이 될 수도 있는 자리였으니.”
“…….”
“그러니 인제 그만 돌려받아야겠어. 원래부터 내 것이어야 했던 거, 누릴 만큼 누렸을 테니.”
재희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법한 모습이었다.
유라의 말대로 자신은 외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분명 혜란이나 강진에게 이 사진이 넘어간다면 조용히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무혁 씨에게 이 사진이 넘어간다면 과연 어떤 반응일까.’
거기까지 생각한 재희는 문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무혁과 함께 저녁 먹을 생각에 들떴었는데, 생일날 이혼하라는 소리나 듣고 있다니.
그것도 가족이 아닌 남인 한유라에게.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웃어?”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유라를 똑바로 보며 재희는 사진의 양 끝을 꾹 잡고 당겼다.
찌익.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진은 재희의 손에서 반쪽으로 가차 없이 갈라졌다.
“유라 씨. 정말 불쌍한 사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