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드러나는 진실 (70/128)


#70화. 드러나는 진실
2022.06.30.


재희는 대문에 기대서서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떨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반항을 한데다, 마지막에 본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코끼리가 사슬을 끊고 자유를 맛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저를 옭아매던 쇠사슬을 끊어버렸다는 사실에 묘한 떨림과 해방감에 좀처럼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윽고 재희의 시선이 재혁에게 향했다.

재혁은 걱정을 담은 눈으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재혁아.”

“뭐가?”

“할머니와 나 사이의 일에 널 이용해서.”

“이럴 줄 알고 내가 집에 있었던 거야. 언젠간 터질 일이기도 했고.”

누나가 아니었어도 언젠간 할머니와 한번 부딪칠 일이었어.

재혁이 그 말을 하는 대신 뒤통수를 긁적이며 실없이 웃어 보였다.

시간을 확인한 재희가 이 실장에게 연락을 하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차가 금방 도착했다.

재희는 머쓱한 얼굴로 서 있는 재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재혁아. 병원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누나. 괜찮아. 그냥 벼루에 맞은 것뿐인데. 별거 아냐.”

재혁이 손사래를 치자, 재희가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별거 아니긴. 아까 꽤 큰 소리가 났는데. 뼈에 이상 있을지도 모르니까 검사받자.”

“괜찮다니까.”

“어차피 지금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잖아. 그러니까 누나 말 들어.”

재희의 말대로 집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재혁은 친구 집에나 갈 생각이었다.

이대로 안 보내겠다는 의지마저 보이는 재희의 눈빛에 재혁이 머뭇거리더니 차에 올라탔다.

눈치 빠른 이 실장이 말했다.


“제가 아는 유명한 정형외과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넓고 승차감이 좋은 차 내부를 둘러보며 재혁이 작게 감탄했다.


“난 아버지 차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이 차는 비교도 안 되게 좋다. 매형 진짜 누나 위하나 보다. 우리 누나 출세했네.”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동생의 어깨를 살펴보던 재희가 가볍게 타박했다.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나 대신 네가 맞을 필요 없어.”

“그럼 벼루가 날아오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

“누나가 맞았으면 내가 매형한테 맞아 죽을걸? 벼루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장난스럽게 웃는 재혁을 보며 재희는 한숨을 삼켰다.

어느덧 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 받은 건지 병원 로비에 들어서기 무섭게 재혁은 진료실로 끌려갔다.

걱정도 잠시,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야 재희는 안도했다.

재혁이 어깨를 휙휙 돌리며 능청맞은 얼굴로 말했다.


“거봐. 괜찮다니까. 누나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괜찮다는 말은 네가 아니라 의사가 하는 거야.”

둘은 병원 앞 야외 벤치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직 바람은 찼지만, 사방이 꽃으로 만발했다. 재희는 화사한 병원 조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집에 갈 거면 데려다줄게.”

재희와 같은 곳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그럼?”

“친구 집에나 좀 가려고.”

“할머니 충격 많이 받으셨을 거야.”

“이 상황에 할머니 걱정은 왜 해.”

“재혁아.”

재혁이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단번에 훌쩍 마시고는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할머니 때문에 갑갑하던 차였어. 오늘도 그냥 밖에 있을까 하다 누나가 온다니까 집에 들어간 것뿐이야.”

재혁이 다 마신 재희의 컵까지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가봐야 분위기 안 좋을 텐데, 잠깐 돌아다니다가 들어가지. 뭐.”

재혁의 고집스러운 말에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면 늦지 않게 들어가. 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응. 누나. 생일 축하해.”

재희는 영 꺼림칙한 기분에 몇 번이나 재혁을 돌아봤지만, 재혁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재혁은 재희가 탄 차가 멀어지자 흔들던 손을 내렸다.


“춥다.”

쌀쌀한 공기에 재혁이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


 

* * *

재희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재혁을 돌아보았다.

마침내 재혁이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자세를 바르게 고쳐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린아이도 아니니 알아서 잘 하실 겁니다.”

이 실장이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가볍게 농을 던지자 재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에게 모진 할머니였어도 재혁에겐 세상에서 더없이 다정한 할머니였다.

한때 재희도 바랐던 할머니의 사랑.

재혁이 원하기만 한다면 할머니는 정말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정도로 그 정성과 사랑이 지극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소리를 쳤으니 재혁의 마음도 편하지 않을 터였다.


‘정말 괜찮을까.’

거기다 병원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헤어진 재혁이 자꾸만 가슴에 걸렸다.


‘그래. 재혁이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왠지 마음 한쪽 구석이 찜찜했다.

재희는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 같은데 유라와의 약속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마음먹은 재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은 추웠지만, 토요일 오전의 거리는 활기찼다.

* * *



“저 왔습니다.”

무혁은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룬 채 라윤 갤러리 관장실을 찾았다.

5월의 연회의 핵심 주인공이 한유라와 미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약속을 잡고 온 거였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윤 비서는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일정을 조정하였다.

최대한 조정은 했지만, 여전히 시간은 촉박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 앉으렴.”

혜란은 무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한 비서가 차를 내오자 그제야 혜란이 서류를 내려놓고 무혁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별일이구나. 네가 내 사업에 관심도 가지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5월의 연회의 핵심적인 주인공이 한유라와 미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차를 마시던 혜란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 흔한 쿠션어 하나 없이 본론부터 꺼내는 게 딱 제 아버지 강진을 똑 닮았다.


“5월의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 미셸이 오래전에 절판된 동화책의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달라고 했어.”

“그 주인공이 한유라입니까.”

“그래. 샅샅이 뒤졌는데 단서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더니 등잔 밑이 어둡지 뭐야.”

하지만 아직도 찜찜했다.

정말 유라가 그린 거였을까.

혜란은 문득 고개 드는 의문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관장실에 놀러 온 유라가 내 책상에 올려져 있던 삽화를 보더니 자기가 그린 거라고 하지 않겠니.”

“…….”

“넌 관심도 없었겠지만, 유라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었어. 이젠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그만뒀지만. 정말이지, 난 유라가 딱 네 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담긴 무혁의 목소리에 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엔 덤덤하기만 한 놈이 아내 얘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아예 바뀌는구나.”

여전히 유라를 아꼈지만, 혜란은 더 이상 유라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는 욕심은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둘이 참 잘 어울리긴 하지.’

그런 생각을 숨기며 잠시 차로 입술을 축인 혜란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연습하다 슬럼프가 왔는지 평소 관심 없었던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구나. 그 그림이 동화책에 실린 삽화였고.”

“평소 관심 없던 그림을 그렸고 그게 동화책 삽화에 실렸단 말입니까.”

“뭐, 정식 경로로 실린 건 아니었지.”

“무슨 말씀입니까.”

“SNS에 올린 그림을 지금은 폐업한 출판사에서 무단도용해서 그림책에 실었다고 해. 유라는 그림을 올린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를 찾던 와중 한유라 씨가 어머니 책상에서 그 그림을 봤단 말입니까.”

“기가 막힌 우연이지. 뭐, 유라의 평소 스타일을 보면 좀 안 어울리지만, 내가 조사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정보를 똑같이 말하는 거 보니 맞는 것 같아.”

“재희와 한유라의 접점이 있습니까.”

“이상하구나. 네가 그게 왜 궁금하니?”

“대답해 주십시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는 무혁을 보며 혜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니?”

“어머니.”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혜란의 눈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대답하기 전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사람처럼 무혁은 단단한 얼굴로 혜란을 응시했다.

혜란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재희에게…….”

처음으로 재희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제 입에서 흘러나오자 혜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뭔가 기분이 묘해졌지만, 혜란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내가 재희에게 미셸과 유라와의 만남을 극적으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시켰어. 애초에 그 애를 여기에 불러들인 것도 5월의 연회 준비와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 준비하면서 일 좀 배우라고 불러들인 거고. 당연히 그 애와 유라는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지. 공적으로.”

“…….”

처음엔 재희가 먼저 나가떨어져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본 덕에 못 할 짓을 많이 했지만, 혜란은 재희가 마음에 꼭 들었다.

속 깊고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고 얌전하지만 일을 야무지게 잘하는 것,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더 가르친다면 라윤 갤러리 차기 관장으로 부족함이 없겠어.’

혜란은 재희를 자신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 갤러리를 일평생 꾸려온 노고를 남편이나 두 아들도 아닌, 미워했던 며느리에게 인정받게 될 줄이야.’

라윤 갤러리의 번듯한 간판만 본 것이 아닌, 이 갤러리를 최고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을 알아봐 준 재희였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

저를 미워하는 것을 티 냈으니 미워하며 부정할 법도 한데 재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재희는 그녀의 노력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가감 없이 인정하고 칭찬했다.


‘유라조차도 한 번도 말하지 않던 거였는데.’

한유라도 항상 칭찬을 하긴 했었다.

라윤 갤러리의 명성을, 건물을, 전시회 등을.

그럴 때마다 혜란은 묘하게 속 빈 강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라는 라윤 갤러리에 대한 칭찬만 할 뿐, 그 안에 깃든 자신의 노력은 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던 혜란은 저를 응시하는 무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혜란의 미간은 단번에 좁혀졌다.


“그 눈은 뭐니? 설마 내가 재희를 괴롭히려고 둘을 붙여놨다고 생각하니?”

“어머니의 의중을 의심하긴 했습니다.”

가감 없는 솔직한 무혁의 대답에 혜란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정이 안 가는구나.”

“…….”

“지금은 아니야. 난 재희가 이번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를 잘 마무리 지어주길 바라고 있어.”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혜란은 주먹을 꽉 쥔 무혁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런 중요한 일을 재희한테 맡긴 게 아니겠니. 재희라면 잘해 낼 거니까.”

무혁은 혜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살폈으나 그녀의 표정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싫어했다면 혜란이 재희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무혁이 노을 서점을 아끼는 만큼 혜란 역시 라윤 갤러리를 사랑하고 아꼈다.

무혁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한유라 씨가 그렸다는 그 삽화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네가 그걸 봐서 뭐 하려고.”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다니까. 기다려. 사본은 유라가 가지고 갔지만, 원본은 내게 있으니.”

혜란이 삽화를 찾는 사이, 무혁은 어느새 식어버린 찻물을 응시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묘한 꺼림칙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혜란이 애타게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일러스트레이터.

그냥 그렸던 그림이 동화책에 삽화로 실릴 만큼 뛰어났다.

그리고 관장실에 방문했던 유라가 때마침 삽화를 보자마자 자신이 그린 거라고 말했다.

미술에 관심도 없었던 그 한유라가.

더군다나.


‘그 상황과 겹쳐.’

묘한 꺼림칙함의 원인은 바로 재희가 처음으로 자유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며 보여준 그때와 혜란이 말한 상황이 겹쳐서였다.

재희가 입시 미술을 할 때 무혁은 자주는 아니었어도 그녀의 그림 실력이 느는 것을 지켜봤었다. 재능이 있었음에도 재희는 매일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절박하게 매달렸었다.

그리고 그림은 재희의 성격처럼 따뜻했었다.

재희가 처음으로 자유 주제로 그린 그림을 무혁에게 보여준 뒤, 얼마 후 SNS에 올렸다고 자랑했었다. 그래서 무혁은 일부러 SNS 아이디까지 만들어 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그림 이후로 재희는 더 이상 그림을 올리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재희는,
 


“그냥, 지금은 입시 미술하는 것도 바빠서요.”

 
그렇게 대답했다.

얼마 후 재희는 SNS를 닫아버렸고, 무혁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재희 말대로 그녀는 너무 바빴으니까.


“이거란다.”

혜란이 삽화를 들고 왔다.

상념에서 깨어나 혜란에게서 삽화를 받아든 무혁의 표정이 굳었다.


“……이걸 한유라 씨가 그렸다고 말했단 말입니까.”

“그래.”

틀림없었다.

이 삽화는 재희가 처음으로 저에게 보여준 그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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