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생일 (68/128)


#68화. 생일
2022.06.23.


박정수는 숨을 죽인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직 무혁에게 얻어맞은 턱이나 광대가 아직도 욱신거렸으나 아픈 티도 내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저를 노려보는 아버지, 박금호 회장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생긴 것도 엉망진창인데 더 엉망진창이 된 아들놈의 얼굴을 뜯어보던 박금호가 혀를 차며 물었다.


“대체 뭐 하다가 얼굴이 그 지경이 된 거냐? 설마 또 누구한테 시비 털다가 얻어맞은 거냐.”

“그게, 계단에서 굴렀어요.”

박정수는 저를 노려보는 박금호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 며칠간 바쁜 척 아버지의 눈을 피해 잘 숨어다녔는데, 하필이면 출근하던 아버지에게 딱 걸린 것이다. 그대로 서재로 끌려온 박정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에도 기사에 네 이름이 불미스러운 일로 실린다면 나는 막아줄 생각 따위 없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그런 일 없습니다! 정말로 계단에 굴렀어요.”

박정수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재희와 밀회를 즐기는 척 조작한 사진으로 무혁에게 반 협박하다가 얻어맞았다고 이실직고해 버리면, 그 길로 쫓겨나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서 들어온 건데.’

한국에서 유라와 사귀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해야 하는데 이대로 쫓겨날 순 없었다.

죽어도 한국에 버티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아버지 눈에도 좀 들고, 나중에 계열사라도 좋은 자리 하나 얻어 낼 수 있었다.

다행히 자신의 거짓말을 박금호가 믿어주는 눈치였다.


“칠칠치 못한 놈.”

“죄송합니다.”

“그보다 요즘 부쩍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지.”

“다 이유가 있…….”

“무슨 이유? 술 처마시고 사우나 가고 그런 가당치도 않은 이유 말하는 거냐?”

“…….”

“내가 너 그러고 다니라고 그 자리에 앉힌 줄 알아!”

박금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찔끔한 박정수가 쭈구리처럼 어깨를 움츠리자 박금호의 속에서는 더 천불이 났다.

놀기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고 다녀서 집안 망신을 다 시키고 다니더니 나중엔 검찰총장의 딸까지 건드리는 바람에 급하게 해외로 쫓아냈었다.

생각 같아서는 평생 한국 땅에 발도 못 딛게 하려고 했으나, 하도 빌고 빌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게 했다.

귀국한 뒤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리나 했더니, 여전히 뺀질거리고 다니니 박정수 때문에 박금호는 요즘 부쩍 흰머리가 늘었다.


“인제 좀 정신 차리라고 그 자리에 앉힌 거다. 그런데 정신 차리기는커녕 근태 엉망에 하다 하다 이젠 계단까지 구르고 다녀?”

“…….”

“아무리 할 일이 별로 없는 부서라 하더라도 팀장인 네가 그러고 다니면 그 아래 직원들이 뭘 배우겠나?”

“……죄송합니다.”

“실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네 그 하잘것없는 자리라도 보전하고 싶으면 근태라도 신경 쓰란 말이다!”

“넵.”

이럴 땐 바싹 엎드려야 자신도 살고 유라도 살 수 있었다.

박정수가 특유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실실 웃자 박금호가 머리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제 형들의 반이라도, 아니 하다못해 네 친구인 강무혁의 2%라도 닮았으면 좋겠건만.”

“…….”

“나가 봐.”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박금호가 손을 휘젓자 박정수는 내시처럼 뒷걸음질을 쳐 서재 밖으로 나왔다. 박금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박정수는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난 것에 만족했다.


“그럼 형들처럼 좀 폼 나는 자리 하나 해 주시지. 그럼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말이야. 고작 그런 자리 하나 주고선 뭘 바라시는 거야.”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며 박정수가 툴툴거렸다.

형들처럼 임원직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은 한적한 부서의 팀장 자리에 있지만, 언젠가는 핵심 계열사 임원직에 앉는 게 박정수의 목표였다.

그러려면 박금호가 그렇게 좋아하는 무혁과의 친분이 필요했다.

무혁과 둘도 없는 친구인 걸 안다면 박금호는 분명 자신에게 그럴듯한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이것이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기 위해 무혁에게 친한 척 접근했었다.

무혁이 쉽사리 곁을 내주지 않자 박정수는 재희로 타깃을 바꿔 부탁하기 위해 접근했는데 보기 좋게 망해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박정수는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갈 생각보다는 무혁의 후광을 얻어 올라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재희를 이용하기는커녕 강무혁 놈이랑 사이가 틀어져 버렸으니 어쩐다.’

그날 두들겨 맞고 나서 박정수는 강무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도 소름이 돋았다.

난생처음으로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던 박정수는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단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나저나 합의 잘해준 거 맞지?’

결과적으로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박정수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박금호는 제가 정말로 계단에 구른 거로 알고 있으니.


‘머리 아픈 생각은 관두고 오늘은 유라랑 데이트나 해볼까.’

흥얼거리며 박정수가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신호음이 이어졌지만, 유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정수의 얼굴이 형편없이 와락 구겨졌다.


“에이 씨. 이게 다 강무혁, 그 새끼 때문이야.”

모임에서 강무혁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이후로 유라와 연락이 어려워졌다.

분명 무혁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정이 뚝 떨어진 게 분명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박정수는 포기하지 않고 연달아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째 전화를 걸었을 무렵, 유라가 전화를 받았다.


“유라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내가 얼마나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미안해. 정수 오빠. 일이 조금 있었어.

유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박정수는 조금 전까지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박정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보다 유라야. 오늘 토요일인데 나랑 같이 영화나…….”

-정수 오빠. 그 사진 갖고 있지?

“무슨 사진?”

-재희 씨랑 오빠랑 같이 찍은 그 사진.

“그게 왜?”

-그거 나 줘.

“그게 왜 필요해? 내가 그 사진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는데. 그보다 머리 아픈 대화는 관두고 우리 영화…….”

-정수 오빠. 내가 필요하다고 하잖아.

평소처럼 느긋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서린 싸늘함에 박정수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어?”

-그 사진 주면 하루 정도는 데이트해줄게.

“정말이야? 유라야. 진짜지?”

-응. 물론이야.

“기다려. 바로 보내 줄게.”

통화를 끝낸 박정수는 실실 웃으며 바로 유라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읽음 표시가 떴지만, 유라에게서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박정수는 유라와 함께 뭘 먹을지 고민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박정수와의 통화를 끝낸 뒤 유라는 마치 오물이 묻은 것처럼 휴대전화 액정을 손수건으로 박박 닦았다. 그러곤 손수건을 휴지통에 미련 없이 버렸다.


“꼴에 눈은 높아가지고. 바퀴벌레 주제에.”

중얼거리는 사이 메시지가 떴다.

박정수가 보낸 사진이었다. 유라는 사진을 확대해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구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찍었네.”

사진을 저장하는 유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 * *

KJ 건설.

무혁이 상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윤 비서가 바로 보고서를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급한 건만 추렸습니다. 외에는 다음 주에 진행하셔도 무리 없는 일정이라 저녁에 시간을 비울 수 있게 조정했습니다.”

서류를 훑어보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중동 초고층 빌딩 건설 입찰이 곧입니까.”

“네. 그것만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이렇게 무리하실 일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커피를 내오겠습니다.”

윤 비서가 나가자 무혁은 보고서를 툭, 다시 내려놓았다.
 


“혹시 한유라 씨랑 박정수와 친해요?”

 
일전에 재희가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한유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무혁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혜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혜란이 전화를 받았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어머니.”

-뭔데 그러니?

“한유라 씨가 라윤 갤러리에 자주 드나듭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혜란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대답은 해주었다.


-유라가 미셸과 함께 이번 5월의 연회 핵심 주인공인데 당연하지.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 * *

한편, 그 집에 가기 위해 재희가 차에 올라타자 이 실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희동으로 부탁드려요. 이 실장님.”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여요?”

“물론입니다. 오늘 사모님 생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생일 축하 인사에 익숙하지 않은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무혁이 출근한 뒤, 강진 회장뿐만 아니라 시동생인 우진에게까지 생일 축하 전화가 왔었다.

혜란은 따로 전화를 하지 않았지만, 한 비서에게서 혜란 대신이라며 생일 축하 메시지가 왔었다.

매년 희수가 생일 축하 인사를 했지만, 이렇게 가족들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듣는 건 처음인지라 재희는 오늘 일이 마치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 실장이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며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연희동에 간다고 사장님에게 말씀하셨습니까.”

“금방 다녀올건데요. 저녁 전에는 올 수 있으니까요.”

재희는 따로 무혁에게 연희동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잠시 다녀올 뿐인데 괜히 말해서 무혁이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재희가 그 집을 싫어하는 것처럼 무혁 역시 그 집을 딱히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그렇고, 한약을 받아올 때도 그 집은 한 번도 무혁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무혁 씨는 한 번도 나한테서 그 집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었어.’

한 번쯤은 그 집에 대해서 물어볼 법도 한데 무혁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침에 재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안다는 듯 눈이 오지 않을 거라 말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무혁 씨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우리가 만난 건 맞선 날이 처음이었는데.’

막 생각이 그쯤 미쳤을 때.

지잉.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무심결에 휴대전화를 본 재희의 표정이 굳었다.

[한유라]

일로 엮인 사이라 번호는 저장했지만 반갑지 않은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유라는 미셸이 찾던 일러스트레이터인 데다 일적으로 계속 부딪칠 텐데 피할 수만은 없었다.


“네. 유라 씨.”

-우리 할 이야기가 좀 남은 것 같은데요.

“5월의 연회에 관련된 내용인가요?”

-아니면요?

“그럼 유라 씨랑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뭐라구요?

“그때 유라 씨가 무슨 생각으로 절 불러냈는지 잘 알겠어요. 우리 사이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유라 씨도 이간질은 그만두세요.”

-이간질이요?

유라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일적인 용건 외에는 이런 개인적인 연락도 지양했으면 해요.”

-박정수.

“…….”

-제가 정수 오빠에게 재미있는 사진을 받았거든요.

“사진?”

-오늘 시간 좀 내줘요. 이건 직접 얼굴을 보면서 얘기해야 할 것 같으니까.

또 박정수.

끈질기게 따라붙는 박정수란 이름에 재희는 신물이 났다.


“무슨 사진인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박정수와 엮이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럼 이 사진 무혁 오빠에게 보여줘도 상관없겠네요?

“한유라 씨.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휴대전화 너머로 유라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협박이라뇨. 그만큼 중요한 사진이라는 소리예요. 오래 시간 내 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무슨 사진인지 정도는 직접 봐야 하지 않겠어요?

“거절할게요.”

-5월의 연회 일로 할 말이 있기도 하고.

“…….”

-어때요? 이제 좀 나와 만날 생각이 들어요?

계속 거절을 해도 끈질기게 달라붙을 기세였다.

재희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좋아요. 오늘 3시에 봐요.”

결국, 약속 장소까지 잡은 후 재희는 무거운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문득 속이 답답해져 차창을 내렸다. 4월치고는 찬 공기가 느껴졌다.


‘눈이 온다더니 정말 오려는 걸까.’

재희는 얼마간 찬 공기를 맞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