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생일선물 (67/128)


#67화. 생일선물
2022.06.20.



 
4월 23일 토요일.

재희는 평소와 달리 무거운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 강무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잠에서 깨어 있었던 건지, 무혁의 얼굴에선 잠기운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혁은 제 팔을 재희에게 내준 채로 다른 손으로 흐트러진 재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제일 처음 듣는 무혁의 생일 축하 인사에 재희가 살포시 웃음 지었다. 그러곤 몸을 조금 움직여 무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고마워요.”

짧은 생일 축하 인사였지만, 재희에겐 그 어느 말보다 특별했고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이번 4월 23일은 여느 4월 23일과 달랐다.

무거운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의 눈초리를 받으며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장을 보지 않아도 되고,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깐 그 집에 들러야겠지만, 무혁과 함께할 저녁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오늘 드디어 알게 되겠구나.’

이날만을 기다리며 궁금증을 꾹 누르고 손꼽아 줄곧 기다렸던 무혁의 할 말.

그리고 평소와 달리 오늘 저녁은 시간이 넉넉할 테니 기회를 봐서 박정수와 한유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볼 참이었다.

목요일 밤에 박정수와 한유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게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렸었고, 오늘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 잊지 않았죠?”

“물론입니다.”

“저, 오늘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무혁 씨의 결혼 상대가 왜 저여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요.”

“…….”

“기대해도 괜찮죠?”

무혁은 말없이 재희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많은 게 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요.”

조금 나른한 기분에 재희가 품에 고개를 묻자 무혁이 가만히 안아 주었다.

한참을 그의 품에 있던 재희가 말했다.


“우리 인제 그만 일어나요. 오늘도 출근하잖아요.”

무혁은 재희를 놓고 싶지 않았지만,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무혁이 아쉬운 듯 손을 풀자 재희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의 뺨에 입 맞췄다.


“먼저 나가 있을게요.”

“곧 나가겠습니다.”

무혁이 먼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부엌으로 나온 재희는 고소한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한참 국을 휘저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경자가 재희를 보자마자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셨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사모님.”

재희의 얼떨떨한 시선이 팔팔 끓고 있는 냄비로 향했다.

지금 끓이고 있는 국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솜씨 좀 부려서 미역국을 끓였어요. 소고기도 듬뿍 넣었으니까 꽤 맛있을 거예요.”

“미역국…….”

재희의 생일은 사망한 친모와 남동생의 기일이었다.

덕분에 결혼 전까지 한 번도 미역국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재희에게는 이 아침이 생소했다.

식탁으로 시선을 돌리자 잡채며 불고기며 뭐며 아침으로 먹기에는 과한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경자가 마치 딸 보듯 재희를 보며 말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사모님 생일이라 이것저것 신경 좀 썼어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완성이니까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저, 그럼 제가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오늘의 주인공이 돕긴요. 쉬고 계세요. 금방 끝나니까.”

오늘의 주인공.

새삼스러운 단어에 재희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경자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무혁이 씻는 동안 날씨를 좀 살펴볼 생각이었다.

재희는 창문에 손을 짚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하늘은 맑아서 눈은커녕 비조차 올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살짝 열자 전보다 차가운 바람이 틈새로 불어닥쳤다.


‘차가워.’

재희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워도 좋으니까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겠는데.’

모처럼 기대되는 생일날 눈이 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재희는 창문을 닫았다.

찬바람 한점 못 들어오도록 꼭꼭.


“뭐 하고 있습니까.”

어느새 말끔하게 옷까지 갈아입고 온 무혁이 뒤에서 재희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재희는 제 어깨를 감싼 큰 손을 힐끗 보다, 조심스럽게 그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오늘 날이 많이 추운 것 같아서요.”

“…….”

무혁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지만, 재희는 창밖을 보느라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4월인데 추우면 왠지 기분이 가라앉잖아요.”

“저녁이 되면 괜찮을 겁니다.”

“…….”

“재희 씨가 걱정하는 눈도 오지 않을 겁니다.”

무혁의 말에 재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무언가를 아는 사람처럼 무혁은 짙은 시선으로 재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재희와 시선을 마주한 무혁이 가볍게 그 입술에 입 맞췄다.

평소라면 경자가 있으니 피했겠지만, 재희는 오늘만큼은 가만히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진하다면 진할 입맞춤을 한 뒤, 무혁이 입술을 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늘은 다 괜찮을 겁니다.”

“무혁 씨.”

“식사하죠.”

무혁의 재희를 데리고 식탁에 앉자 경자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거.”

무혁이 수저를 들려는 재희에게 작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G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작은 종이가방과 무혁을 번갈아 보며 재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생일선물입니다.”

“생일…… 선물이요?”

“저녁에 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제일 먼저 주고 싶었습니다.”

“열어봐도 돼요?”

“물론입니다.”

재희가 조심스럽게 종이가방에 묶인 리본을 풀었다.

종이가방을 열자 안에는 벨벳으로 감싼 작은 반지 케이스가 있었다.


“반지?”

재희는 무혁을 한 번 보다 반지 케이스를 꺼내 달칵, 뚜껑을 열었다.

심플하지만 촘촘하게 박힌 다이아몬드가 조명 빛에 은은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마음에 듭니까.”

무혁이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재희를 보며 물었다.

재희는 대답 대신 반지 케이스를 무혁에게 내밀었다.


“……?”

무혁의 시선이 반지 케이스에 닿았다가 재희에게 향했다.


“이 반지 무혁 씨가 제 손에 끼워줘요.”

설레는 표정으로 말하는 재희를 잠시 응시하던 무혁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냈다.

재희가 손을 내밀자 무혁은 흡사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마치 재희를 위해 디자인된 것처럼 반지는 그녀에게 꼭 어울렸다.

재희는 제 손에 꼭 맞는 반지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러곤 자랑하듯 무혁에게 반지 낀 손을 보여 주었다.


“어울려요?”

무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꼭 들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무혁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재희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몇 번이나 반지를 이리저리 보던 재희가 물었다.


“이거 무혁 씨가 직접 고른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간도 없었을 텐데…….”

바쁜 무혁이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자신을 위해 직접 반지를 골랐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아직 무혁과 제대로 나누지 못한 대화가 있었지만, 그리고 오늘 그 집에 들러야 했지만 괜찮았다. 처음으로 생일날에 미역국도 먹었고, 무혁에게 선물까지 받았으니 할머니의 타박을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정말 고마워요. 소중하게 끼고 다닐게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네?”

“진짜 생일선물은 따로 있습니다.”

“진짜 생일선물이요?”

이미 반지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데 진짜 생일선물이 따로 있다니.

재희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무혁 씨. 뭔지 모르겠지만, 전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나 무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네?”

무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뺨을 감쌌다.

재희는 무혁을 마주 보며 살짝 그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무혁은 궁금함과 설렘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재희를 진중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후에 데리고 가주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노을 서점에.

* * *

그 시각.

유라는 다리를 꼬고 앉아,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와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기른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덕분인지, 깐깐한 인상의 남자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저게 내 미술 선생?’

동화의 삽화와 비슷한 그림을 그려달라는 혜란의 부탁을 받은 유라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미술 쪽에는 도통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림을 연습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세상에 그깟 그림 때문에 제가 그런 수고까지 들일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어머니에게 부탁해 미술 선생을 소개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라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기만 할 뿐, 도통 입을 열지 않자 남자가 먼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됐어. 이름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네?”

“그보다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던데.”

“자랑하고 다닐 정도는 아닙니다.”

“자랑하고 다닐 정도의 실력이어야 할 거야.”

초면에 대뜸 하는 반말은 둘째치고 마지막 유라의 말에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굳이 남자의 궁금증에 답해줄 이유도 없는지라 유라는 구석에 밀어둔 삽화를 남자의 앞으로 툭 던졌다.


“이거랑 비슷한 분위기로 동화풍 그림을 그려와.”

“이걸 제가 왜…….”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남자를 보며 유라가 말했다.


“이거랑 비슷한 화풍의 그림이 필요하거든.”

남자가 삽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로 하는 화풍이 있는 건 좋은 배움의 동기가 됩니다. 이것도 열심히 연습하면 됩니다. 실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니 우선 테스트를…….”

“못 알아들어?”

“네?”

“난 그림 배울 생각 없고, 굳이 노력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내가 당신을 내 선생으로 고용한 이유는 단 하나야.”

유라가 삽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거랑 비슷한 화풍으로 그려와. 그러면 엄마가 주기로 한 보수에 내가 돈을 더 얹어줄 테니.”

“지금 저더러 그림을 대신 그리란 소리입니까. 그것도 남의 그림을 흉내를 내라고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유라가 픽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고용한 이유 따위 없어.”

“전 미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 거지, 그림을 대신 그려 주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주제에 누굴 가르쳐.”

유라가 비웃자 남자의 얼굴에 자존심 상한 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미술을 배울 생각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라가 턱을 괴고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학기 등록금 급하지 않아? 미대 쪽은 재료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안 그래?”

“…….”

“우리 엄마가 준 보수도 나쁘지 않지만, 부족할 텐데.”

남자가 굳은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유라가 손가락 끝으로 툭, 삽화를 쳤다.

테이블 끝으로 밀려난 삽화가 남자의 발 앞에 떨어졌다.


“딱 한 장만 그리면 돼.”

유라는 삽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진한 미소를 띄웠다.


“물론 우리 엄마에게 잘 둘러대는 것도 잊지 말고.”

삽화를 집어 든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유라가 쐐기를 박았다.


“기간은 삼일이야. 그때까지 그려오도록 해.”

“좀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싫다는 대답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유라가 진하게 미소지었다.

남자가 나가기 무섭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정수]

유라는 턱을 괸 채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지켜봤다. 한번 끊기나 싶더니 몇 차례 더 울렸다. 다섯 번째 전화가 울린 뒤에야 유라가 느긋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응. 정수 오빠.”

재희의 것과 똑같은 G 브랜드의 반지가 유라의 손가락에서 조명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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