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눈 예보 (66/128)


#66화. 눈 예보
202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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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서 말을 꺼내면 안 돼요?”

붕대를 꼼꼼하게 감아 주던 무혁의 시선이 재희에게 향했다.

침잠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자, 재희는 온몸에 스멀스멀 번져 가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무혁이 자신을 이러한 시선으로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그가 낯설게 보였다. 마치 맞선 자리에서 무혁과 처음 마주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재희는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꾹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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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는 저에게 친구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해 주니까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적어도 박정수와 한유라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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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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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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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 전보다 더 강경한 무혁의 말에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무혁은 붕대를 꼼꼼하게 마무리한 뒤 몸을 일으켰다.

재희는 몸을 일으키는 무혁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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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험담이라서 듣기 싫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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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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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이 아니에요.”

더 이상 우리 사이에 박정수나 한유라가 끼어드는 게 싫다고.

불안해서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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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저…….”

그러나 재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무혁의 무거운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무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다가도 모를 남자.

자신의 속은 온전히 비치지 않는 남자.

그래서 재희는 가끔 무혁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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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늦었습니다. 쉬는 게 좋겠습니다.”

무혁이 등을 돌렸다.

별거 아닌 반응이었지만, 순간 재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구급상자를 선반 위에 두는 무혁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나 마치 멀리 있는 사람처럼 무혁에게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순간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듯 걸음을 옮겨 무혁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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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혁의 넓은 등이 굳었다.

경직된 반응에 무혁을 놓쳐버릴까 봐, 재희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무혁의 등에서 쿵쿵,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부암동에서 그의 등에 업혔을 때와 달리, 오늘따라 유독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불안하게만 들렸다.

재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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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를 안고 싶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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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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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기다려달라고……. 연락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무혁 씨는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왔잖아요.”

비록 박정수가 어떤 사람인지 다 말하지도 못했고, 한유라에 대해서 무혁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유라의 꼬임에 넘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고, 무혁에게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했지만 이젠 상관없어졌다.

나쁜 일만 있었던 하루도 아니었다.

재희는 희수에게 선물 받은 립스틱을 괜히 꺼내 보면서 설레보기도 했고, 혜란에게 믿는다는 소릴 듣기도 했다.

무혁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았지만, 그와 헤어질 일 따위는 없었다.

그와 함께할 시간은 앞으로 많으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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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무혁 씨랑 멀어지는 것보다야.’

무혁이 말없이 재희의 팔을 풀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무혁이 한 발자국 멀어지자 재희는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무혁의 말에 재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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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거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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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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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다면.”

무혁의 물음에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재희를 배려하며 안았을 무혁이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눈앞의 남편이 사나운 짐승같이 보여서 재희는 문득 무서워졌다. 그러나 재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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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거친 손이 재희의 손목을 잡고 가차 없이 끌어당겼다.

강한 힘에 의해, 재희가 단단한 그의 품에 부딪히듯 안겼다.

거친 손에 재희의 고개가 들려졌다.

눈앞이 어지러운 것도 잠시, 뜨거운 입술에 그대로 입술이 먹혀들고 말았다.

눅진하고 깊게 탐하는 입술에 재희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가지 못하게 안아 들며 깊게 입을 맞췄다.

정신없는 입맞춤에 빠져든 사이, 재희의 몸이 번쩍 위로 들려졌다.

무혁은 재희를 안아 든 채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재희는 저를 짙게 내려다보는 무혁을 마주 보며 조심스럽게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대담한 재희의 행동에 무혁의 걸음이 멈춘 것도 잠시. 곧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탁.

방문이 닫히며 기나긴 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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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스럭.

작은 기척에 내내 선잠이 들었던 재희가 눈을 떴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저가 잠에서 깰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이는 이 방에서 강무혁, 자신의 남편밖에 없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자신을 끌어안고 자야 할 무혁이 이 시간에 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따라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불안해졌다.

재희는 불안감에 저려오는 가슴을 누르며 무혁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등 뒤에서 무혁이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무혁이 흐트러진 재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이불까지 덮어 주고는 방을 나갔다.

탁.

방문이 닫히자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재희는 닫힌 방문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들어 무혁이 감아 준 붕대를 보던 재희는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대로 향했다.

내내 무혁에게 시달린 터라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재희는 피곤을 억누르며 화장대 위에 올려진 달력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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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내 생일이네.”

달력을 보며 재희는 푸스스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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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이 아니라 온전한 내 생일…….”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그다음 날인 토요일은 재희의 생일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설레고, 기다려지는 생일.

재희는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생일이란 단어를 입속으로 몇 번이나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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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 못 했지만 괜찮아. 초조해하지 말자. 어차피…….”

재희는 엄지로 달력의 23일 칸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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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무혁 씨가 무슨 생각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거야. 다 말해 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그때 다시 말을 꺼내 보면 돼.”

자신의 결혼 상대가 왜 재희여야만 했는지 무혁이 말해 주겠다고 한 생일.

이때를 기점으로 재희는 무혁과 자신의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좋든, 나쁘든.

재희는 달력을 제자리에 두며 버릇처럼 4월 23일 날씨를 검색했다.

날씨를 확인한 재희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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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4월 23일에 없었던 눈 예보가 떠 있었다.

* * *

무혁은 평소에 입에 잘 대지 않았던 술을 한 컵 가득 따랐다.

평소라면 재희를 제 품에 가둬두고 그녀의 체온을, 향기를, 감촉을 마음껏 느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술이라도 한잔해야 그나마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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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한유라 씨랑 박정수와 친해요?”

 
재희가 박정수를 입에 올리는 순간, 무혁은 괴로워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박정수가 동정하듯 주는 작은 물건 하나에 기뻐했을 재희와, 그런 재희를 마음껏 농락했을 박정수.

박정수와 사귀는 동안 존중받지 못했을 재희를 떠올리자 심장이 뜯기는 듯한 격통에 숨통조차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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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

재희가 무슨 기분으로 박정수 따위를 입에 올렸는지.

박정수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재희는 그녀 나름대로 그를 위해 말해 주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박정수를 조심하라고, 멀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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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혁은 그녀가 박정수를 입에 올리는 걸 원치 않았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재희는 박정수 따위는 잊었으면 했다.

무혁은 조작된 사진을 들이밀며 자신과 재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치졸한 박정수의 이름 석 자조차 그녀의 입에 올라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평소보다 그녀를 좀 더 강하게 안았던 건.

재희가 박정수의 비읍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안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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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라.”

재희의 입에서 나온 또 다른 이의 이름.

신혼여행 다녀온 직후, 혜란이 무혁 앞에서 칭찬했던 그 여자.

거슬리게 자꾸만 눈앞에 나타나는 그 여자.

이마를 짚으며 이름을 읊는 무혁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사나웠다.

* * *

번화가의 한 술집.

드르륵.

테이블에 올려 둔 재혁의 휴대전화가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을 뚫고 요란하게 진동했다.

재혁은 액정에 할머니가 떠 있는 걸 봤지만, 일부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모처럼의 동기 모임인 데다, 아무 생각 없이 새벽까지 놀다 친구의 자취방에 가서 늘어지게 자기로 약속했었다. 무엇보다, 숨 막히는 할머니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욕심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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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할머니한테서 계속 전화 오는데 괜찮냐?”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보며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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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나중에 전화 드리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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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받는 게 낫지 않냐? 네 할머니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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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니까. 그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한창 썸 타던 타 학과 여학생과 친구가 드디어 사귀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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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꽃다발까지 사서…….”

막 친구가 다시 흥을 올리며 말할 때였다.

드르륵.

휴대전화가 다시 요란하게 울어댔다.

흐름이 깨지자 친구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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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냥 가서 좀 받아라. 네가 안 받으면 100통도 하실 기세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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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니까. 전원 꺼두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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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할머니 내 전화번호 알잖아. 나한테까지 전화 오게 하지 마라.”

딱 한 번, 재혁이 전화를 안 받고 버틴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친구 번호로 끊임없이 전화를 했었다.

친구는 그때 이후로 진저리를 치며 재혁에게 고생이 많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만, 재혁은 민망하다 못해 미안해서 그날 술을 거하게 쐈었다.

그 이후로 재혁은 꼬박꼬박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었다.

그러나 재혁은 공모전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할머니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할머니 전화를 외면했지만, 친구의 말에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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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전화 받고 올게.”

건물 밖으로 나온 재혁이 전화를 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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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왜 이리 전화 안 받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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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할머니. 저, 오늘 동기 모임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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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몇 시인데 지금까지 하고 있어! 얼른 집에 들어오거라. 밤길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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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전 애가 아니에요. 오늘은 친구 자취방에서 자기로 했으니 먼저 주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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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수운 집을 놔두고 어딜 밖에서 자! 얼른 들어오거라. 이 할미가 우리 재혁이가 좋아하는 간식 좀 해놨다.

완강한 할머니의 고집에 재혁이 지겨운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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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도 사생활이란 게 있는데 이러시면 저 친구들 볼 낯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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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친구들이 뭐가 중요해! 네가 어디 보통 아이냐? 장차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사가 될 우리 손주가 아니더냐. 좋은 밥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좋은 말만 듣고 좋은 사람만 만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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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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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매형한테 조언 구하고 싶다고 했지? 내일 누나가 오는데 매형도 불러 주랴?

할머니의 말에 깜짝 놀란 재혁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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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일 누나가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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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와야지. 당연한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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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누나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는 생일인데 둘이서 보내게 놔두지 왜 그날까지 부르세요.”

재혁이 자신도 모르게 벌컥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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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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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게 아니라.”

노기 차오른 할머니의 목소리에 재혁이 아차 했다.

얼른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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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들어오거라. 시간이 늦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끊자 재혁이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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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 간다.”

자리로 돌아온 재혁이 가방을 들자 친구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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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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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그랜드마더 보이다.”

재혁이 친구의 타박을 맞받아치며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보니, 그 불똥이 누나인 재희에게 튈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서 할머니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그래야 재희가 덜 혼날 수 있었다.

그때처럼 또 자신 때문에 재희가 혼나는 건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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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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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재혁아. 혼자 있게 해 줘.”

 
재혁이 사라져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그 겨울날.

재혁이 돌아온 뒤 재희는 쫓겨나듯 집에서 나가더니 밤늦게 돌아왔었다.

식구들 몰래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던 재희의 뒷모습이, 어렸던 그때부터 줄곧 재혁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재혁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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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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