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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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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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균열
2022.06.09.
타박타박, 재희는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특색있는 건물 사이로 JX 클럽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슨 정신으로 JX클럽에서 나온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박정수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무혁의 대답을 들은 직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하다.
“재희는 정에 굶주려 있어서인지 조금만 잘 해줘도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다고. 좀 화가 나 있다 싶으면 좋아하는 거 하나만 주면 돼. 그럼 금세 화가 풀린다구.”
신나서 떠들어 대는 박정수.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는 강무혁.
재희는 제발 아니라고 절실하게 부정하길 바라며 기다렸지만, 무혁은 끝내 재희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할 뿐.
“괜찮아요?”
주춤, 뒤로 물러서자 유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재희를 바라보며 물어봤다.
유라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에 그대로 도망치듯 JX클럽에서 나온 뒤 정신을 차려보니, 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재희는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행인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재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가…….”
주저앉을 때 손바닥이 쓸렸는지 따끔했다. 바닥에 쓸려 까진 손바닥을 보며 재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청담동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했으나, 그곳에 서 있는 재희는 상처를 입어 초라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근처의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멍하니 거리를 보던 재희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엄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무혁과 처음 만난 그날. 그는 재희에게 들기에도 무서운 값비싼 가방 하나를 사주었다.
그저 맞선을 파투내기 위해 아무렇게나 던진 재희의 말 한마디에.
그만큼 그는 제 진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결혼 후에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무혁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다 보니 뒷말은 거의 못 들었었다.
재희는 무혁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무혁은 말이 없는 만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진담이었다.
빈말을 하지 않는 무혁의 입에서 짧지만 저질스러운 박정수의 질문에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제발 받아요.”
평소라면 차분히 기다렸을 터였다.
하지만 재희는 지금 바로 무혁에게 그 대답의 의중을 듣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끝내 무혁은 전화 받지 않았다.
“그 말, 진담 아니라고 말해줘요.”
재희는 힘없이 휴대전화를 떨구었다.
* * *
‘알아서 하겠다더니 제법이네?’
유라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채 돌아가는 재희를 보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복도 모퉁이에 서서 대화하는 무혁과 정수를 지켜보았다.
“내가 고작 재희랑 3개월 밖에 못 사귀었지만, 사실 알 건 다 알거든. 작은 거 하나만 해줘도 좋아하니까 이 기회에 재희에게 점수도 따 봐.”
“작은 거 하나만 해줘도 좋아한다. 말도 잘 듣고 얌전해진다…… 라.”
무혁이 박정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낮은 목소리로 읊으며 중얼거렸다.
무혁은 제 앞에서 대단한 비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떠벌리는 박정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박정수의 그 몇 마디에 그가 재희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얼마나 낮잡아 봤는지 피부에 따갑도록 와닿았다.
무혁이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그의 화를 역력히 보여주었으나 박정수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혁아. 아까부터 재희 씨한테 전화가…….”
그때, 룸 안에 있던 민석이 무혁의 휴대전화를 들고나오다 말끝을 흐렸다.
아까 갑자기 박정수가 할 말이 있다며 무혁을 불러내더니 둘이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무혁의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재희의 전화에, 유라가 대신 메시지를 보낸 후로는 꽤 오래 잠잠했었다.
그런데 유라마저 자리를 비운 지금, 다시 재희에게 몇 차례나 전화가 오니 신경이 쓰인 민석이 어쩔 수 없이 무혁의 휴대전화를 들고 나왔다.
오랫동안 무혁과 친구로 지낸 민석인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애는 아마 너랑 칠천 원짜리 돈가스를 먹으러 가도 좋다고 할 얘야. 그러니까 돈 많이 안 써도 되고 얼마나 좋냐.”
박정수는 스스로 무혁의 친구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무혁은 박정수에게 딱 선을 그어 대했고, 박정수는 무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말로는 친구라지만, 박정수가 실질적으로 무혁과 대화를 나눈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혁이 재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박정수는 알 수 없었다.
‘박정수. 네가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눈치 없이 떠벌리는 박정수를 보며 민석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 저렇게 용감하게 무혁이 앞에서 재희 씨 험담을 하겠지.’
좋은 날에 혹시라도 소란이 일어날까 봐, 민석이 박정수를 말리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박정수. 그 입 다물…….”
퍽!
“으악!”
민석의 말은 둔탁한 소리와 박정수의 비명에 그만 묻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혁이 그대로 박정수의 턱에 주먹을 냅다 꽂아버린 것이다.
무혁의 주먹에 세게 얻어맞은 박정수의 형편없는 몸이 바닥을 굴렀다.
무혁은 턱을 감싸고 뒹구는 박정수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런 식으로 재희를 대했나.”
“……뭐, 뭐?”
순간, 무혁에게 얻어맞은 턱의 통증마저 잊어버린 채 박정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재희는 작은 것만 내주어도 좋아하니까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느냔 말이다.”
“사, 사실이잖…… 어억!”
박정수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혁이 그대로 반대편 턱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박정수가 바닥을 다시 한번 굴렀다.
무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박정수의 멱살을 잡아 올린 뒤 벽에 밀어붙였다. 순간 숨이 막힌 박정수가 새파랗게 질린 채 버둥거렸지만, 무혁은 멱살을 놓지 않았다.
“박정수. 잘 들어라.”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무혁의 머릿속은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무혁을 보는 박정수는 버둥거리는 것조차 잊고 질린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운 표정이었으나, 무혁의 눈동자는 분노로 숨이 막힐 정도로 격렬하게 일렁거렸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본 박정수는 자신이 크게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재희는 물론이고,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
“재희 인생에 너 같은 쓰레기와 잠시라도 엮이지 않길 바라니까.”
“뭐? 쓰레기? 야! 재희는 뭐 다를 줄 아냐?”
피멍이 든 얼굴로 박정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혁의 딱딱하게 표정이 굳었지만, 이미 박정수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아끼는 재희가 뒤에서 무슨 짓 하고 다니는 줄 아냐? 어? 내가 너한테 이런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재희는 아직도 날 좋아한다고!”
“…….”
무혁이 대답하지 않자 박정수가 씩씩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득의양양하게 무혁에게 보여주었다.
얼마 전 박정수가 라윤 갤러리에 찾아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봤지? 바로 얼마 전에도 나랑 이렇게 만났다고.”
무혁은 잡았던 멱살을 놓곤 사진을 받아들었다.
박정수와, 그에게 손목을 잡힌 재희의 모습이 마치 다정하게 보였다. 무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혁이 반응하지 않자 박정수가 이거다 싶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씨익 웃었다.
‘강무혁. 네가 아무리 그래도 재희는 결국 날 좋아한다고.’
기세등등해진 박정수가 소리쳤다.
“이런 것도 모르고 속도 없이 재희, 재희 그러고 있냐? 사내 새끼가 한심하게. 재희가 뭔데? 어? 내가 널 위해서 해준 말이라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민석이 박정수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박정수.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박정수는 민석의 팔도 뿌리치며 소리쳤다.
“야, 한민석. 너 지금 무혁이랑 제일 친하다고 이러는 거냐? 친구라면 이래선 안 돼. 알겠냐?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이 멍청한 새끼야! 네 그 비루한 목숨 아까우면 그 입 닥치라고!”
평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던 민석이 버럭 소리치자, 박정수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굳었다.
“네가 눈치 없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적당히 하라고! 넌 지금 내가 무혁이 걱정하느라 말리는 거로 보여?”
“그게 무슨…….”
찌익.
박정수가 조작한 사진이 무혁의 손에 찢겼다.
무혁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박정수를 응시하며 잘게 찢은 사진을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무혁의 눈치를 보던 민석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박정수. 멍청한 새끼.”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정수의 몸뚱이가 벽에 처박혔다.
이번엔 꽤 셌는지 박정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갔다. 박정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무혁의 주먹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박정수의 피가 튀며 치아 하나가 튀어나와 레드카펫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무혁아! 진정해!”
자칫 살인이라도 날까 봐 걱정된 민석이 무혁의 양팔을 잡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무혁은 그대로 민석을 뿌리치고 박정수에게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한민석. 둘을 데리러 나가서 왜 안 들어오고…… 뭐야, 무슨 일이야!”
세 사람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찾으러 나왔다가 박정수를 패고 있던 무혁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우리 정수 오빠. 정말 멍청하네. 저런 좋은 카드를 저런데에 써?”
아수라장으로 변한 복도를 구경하던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유라는 자신을 스쳐 가는 가드들을 힐끗 보다 중얼거렸다.
“어쨌든 수확이 없는 건 아니네.”
딱 오해하기 좋은 말을 재희가 듣게 했으니 아주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박정수가 두들겨 맞든 말든 이제 유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유라는 손가락에 끼워진, 얼마 전 무혁이 샀던 것과 똑같은 반지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퇴근 후 잘 쉬고 있다가 호출을 받고 바로 달려온 우진이 경찰서 의자에 드러누운 박정수와 딱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무혁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우진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대리인이니 저와 대화하시죠.”
담당 경찰에게 우진이 명함을 건넨 뒤 무혁에게 다가갔다.
“결혼 전에 카페에서도 그러더니, 이번에도야? 아주 형수님 일이라면 눈에 뵈는 게 없지?”
타박하는 우진을 보며 무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리할 테니 넌 돌아가라.”
“형 표정이나 보고 그런 말 하지 그래. 지금 당장이라도 누굴 죽일 것 같은 사나운 눈으로 무슨 소리야.”
경찰을 믿고 박정수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래! 우진이 너 말 잘했다. 지금 내 얼굴 보이냐? 어? 내가 이번 일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두고 봐. 내가 아는 기자에게 그냥 다 모조리 제보할 테니까.”
무혁이 몸을 일으키자 박정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다 그만 의자에서 떨어져 형편없이 뒹굴었다.
그런 한심한 꼴을 보던 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박정수에게 다가가 그 앞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형. 일 크게 만들면 형이 더 손해일 텐데.”
“뭐, 뭐?”
“안 그래도 형, 지금 아버지 눈 밖에 난 상태 아니야?”
“너도 지금 나 협박하는 거냐? 난 피해자라고!”
“피해자인 거 알지. 다만, 이 일이 형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어떻겠는지. 우리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미야.”
쫓겨나듯 유학을 간 뒤 다시는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고 아버지에게 빌고 빌어 겨우 한국 땅을 밟았다.
안 그래도 강무혁을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강무혁의 아내인 재희를 건드렸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박정수의 안색이 파랗게 변하자 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 형에게 좋지만은 않을 거 아냐. 성인이니까 우리끼리 조용히 끝내자고.”
박정수를 회유하던 우진은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조폭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사건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박정수는 우진의 말에 고민하더니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줄 건데?”
* * *
적당히 박정수와 합의한 뒤 경찰서에서 나오며 민석이 무혁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아까 재희 씨에게 전화가 여러 번 왔었다.”
민석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아든 무혁은 부재중 전화가 찍힌 액정을 바라보았다.
잠깐 헤어진 사이 박정수 따위에게 무려 3개월 동안이나 그런 취급을 받았을 재희를 생각하니 다시금 박정수에 대한 극심한 분노와 함께 재희를 향한 애달픔이 밀려와 가슴이 저려왔다.
한참이나 신재희라는 이름을 응시하던 무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재희에게 말하지 마라.”
무혁이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모레가 재희 생일이다.”
무혁은 결혼하고 처음 맞는 생일에 재희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신경 쓰길 원치 않았다.
짧은 말 속에 깃든 뜻을 알아차린 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아는 놈이 그 소란을 일으켰냐.”
“그럼 재희를 두고 질 나쁜 소리 하는 새끼를 가만두라는 소리인가.”
무혁의 말에 민석이 달리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무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먼저 간다.”
걸음을 옮기는 무혁의 주먹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