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JX클럽 (63/128)


#63화. JX클럽
2022.06.06.


라윤 갤러리에서 나온 유라는 삽화를 차에 타며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저 더럽고 낡은 삽화를 잠시라도 들고 있기 싫어서였다. 유라는 손을 닦은 뒤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박정수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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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야! 내 말대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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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희에게 장소랑 시간은 알려줬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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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생각이 있어. 이 오빠만 믿어.

믿긴 뭘 믿어.

일이나 안 망치면 다행이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치면서도, 유라는 박정수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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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살짝 알려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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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두고 봐. 오늘 저녁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거니까.

박정수가 영 못 미더운 유라였지만, 알아서 한다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무슨 계획이든 실패해도 박정수 탓이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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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겠지.’

그런 유라의 속내도 모른 채 박정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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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유라야, 나랑 같이 점심 먹을까? 네가 저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코모도 레스토랑, 내가 바로 예약해 줄 수 있는데.

그 레스토랑이라면 유라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혁과 함께 모임에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남자 중 한 명인 김서원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가끔 가족끼리 저녁을 먹기 위해 가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김서원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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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예약 힘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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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원 알아? 미남 셰프로 유명한 그놈. 바로 내 친구라니까? 그것도 절친.

무혁과 함께 다른 세계의 사람 같은 김서원이 박정수와 절친?

박정수의 속이 빤히 보이는 작업질과 거짓말에 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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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오빠.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네? 다음에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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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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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해.”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유라가 휴대전화를 노려보며 코웃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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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도 모르고 어디다 작업질하고 있어?”

모임에서도 서열이 최하위인 박정수였다.

생긴 것도 별로고, 성격도 별로인 데다 몸도 키도 별로인 놈.

무혁과 비교하면 할수록 박정수는 지나가는 바퀴벌레같이 보였다.

곧이어 유라가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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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야.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니?

유라의 어머니 유화연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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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부탁이 있어요.”

유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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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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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 관장님께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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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올 무렵, 재희는 혜란의 호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경이 재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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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장독수 화백의 작업도 재희 씨가 보고 오더니, 오늘은 관장실로 호출까지 하셨네. 요즘 관장님이랑 꽤 가까워졌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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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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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재희 씨는 일은 잘하니까.”

그러곤 미경은 무심한 얼굴로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재희는 미경에게 한번 웃어 보이곤 관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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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앉으렴.”

5월의 연회가 가까워져 오면서 혜란은 전보다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재희가 소파에 앉자 혜란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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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지만 5월의 연회에 이벤트를 하나 더 추가할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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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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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과 한유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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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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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이 찾던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유라인 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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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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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월의 연회 때 둘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그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 거야.”

혜란이 다리를 꼰 뒤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으며 깍지를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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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연회가 열리는 정원 한가운데서 둘의 만남을 만들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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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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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상을 네가 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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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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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미셸의 얼굴은 아무도 몰라. 참석하겠다고는 했지만, 누가 미셸인지는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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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초대장은 이미 발송됐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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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외에 에이전트사의 사람도 몇 명 참석할 예정이라니까, 우리더러 알아서 알아보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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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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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미셸은 분명 한유라가 자기가 찾던 일러스트레이터란 걸 안다면 반드시 얼굴을 드러낼 거야.”

이번 5월의 연회를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치르고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로 미셸 전을 열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혜란의 모습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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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어머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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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만 믿는다.”

인사하고 일어나려던 재희의 동작이 순간 멈췄다.

혜란은 그런 재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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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봐.”

혜란이 고개를 돌리자, 재희는 나가보겠다고 인사한 뒤 관장실에서 나왔다.

두근두근,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혜란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재희는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퇴근한 재희는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서재로 들어갔다.

늘 작업 전에 스케치북에 간단한 구상을 하는 재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색연필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미셸과 유라의 만남을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을 것인지, 턱을 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재희는 메시지 알림음에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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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를 연 재희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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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 저 한유라예요.]

재희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연속으로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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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오빠가 지금 많이 취했어요.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데 좀 데리러 와줄래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빈 채로 메시지를 보던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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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혁 씨 술 안 마신다고 했었는데.’

먼저 확인을 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재희가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무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메시지가 떴다.

이번엔 무혁의 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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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혁 오빠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요.]

무혁은 업무 볼 때를 제외하고 항상 재희의 전화는 수신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었다.

그런 무혁이 전화를 받지 않는 데다, 그의 번호로 메시지까지 오니 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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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 클럽이죠? 갈게요.]

재희가 외투를 챙겨 들고 서재에서 나오자, 후식을 들고 오던 경자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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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시는…… 사모님!”

경자의 부름도 무시한 채 현관문을 열고 나온 재희는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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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JX클럽으로 가주세요.”

무혁이 모임에 참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유라 역시 그 모임에 참석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도 재희는 자신에게 연락한 이가 무혁이 아닌 유라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 이 실장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재희는 다시 한번 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길게 이어졌으나 무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허무하게 끊어지는 전화를 보며 재희를 한숨을 삼키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JX클럽.

서둘러 택시에서 내린 재희는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는 JX클럽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클럽 앞에 세워진 야외 주차장엔 억 단위의 고가 차량이 세워져 있었고, 곳곳에 가드들이 서 있었다.

엄숙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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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 모임이라니.’

어쩐지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된 재희는 용기를 내 걸음을 옮겼으나, 입구에서부터 막히고 말았다. 클럽 앞을 지키고 있던 가드가 그녀를 막아선 것이다.

옛날에 클럽에 놀러 간 희수가 잔뜩 취해서 재희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본 가드들은 우락부락해서 무서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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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딱 한 번 본 가드들과 다른 외모의 가드를 보자 재희가 조금 당황했다.

이곳 JX클럽의 가드들은 연예인처럼 키가 크고 외모도 잘생겼다.

가드가 정중하지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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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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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초대장까지 생각하지 못한 재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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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이 없다면 입장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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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남편이 있어서요. 남편만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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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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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혁이라고 합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가드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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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받았습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가드 중 한 명이 앞장서서 안내했다.

가드와 재희가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남아 있던 가드가 무전으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그러곤 근위병처럼 딱딱한 얼굴과 곧은 자세로 입구를 지켰다.

스테이지가 꽝꽝 울릴 정도로 음악이 시끄러운 그런 흔한 클럽과는 달랐다.

입구로 들어가자, 맨 먼저 고가품으로 장식된 화려한 내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부를 둘러보던 재희는 가드가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자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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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디로 가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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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께서는 7층에 계십니다. 타십시오.”

가드가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이대로 되돌아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재희는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무혁이 걱정된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한유라가 서 있었다. 내리려던 재희는 한유라의 등장에 순간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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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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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유라가 가드에게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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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요.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할게요.”

가드가 돌아가자 유라가 재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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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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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일이니까 당연히 와야죠.”

재희의 말에 유라가 진한 웃음을 띄웠지만,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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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무혁 오빠가 술이 조금은 깬 것 같아요.”

유라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재희는 평소와 달리 과감한 옷을 입은 유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이 지나치게 푹신해서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흔한 음악 소리조차 없어서 적막한 복도가 불편해질 때쯤,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내던 유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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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처음 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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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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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말이 클럽이지 사실 비즈니스 현장이에요. 대한민국 재계를 이끌어갈 후계자들의 사적인 모임 장소로 만들어진 클럽.”

유라가 굳은 얼굴로 따라오고 있는 재희를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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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끄러운 클럽도 좋지만요. 여기 복도를 꺾으면 바로 보이는 룸에 들어가면 돼요.”

유라의 말에 재희가 막 복도를 꺾으려 할 때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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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무혁아.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

박정수의 목소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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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혁의 목소리.

잠긴듯한 목소리여서 취한 건지 어쩐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분명 무혁의 목소리였다.

무혁이 짤막하지만 자신의 말에 대꾸해 주는 것에 신이 난 건지, 박정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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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결혼 생활 할 만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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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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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걔 쉽지 않지? 내가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그 애랑 사귈 때 꽤 애먹었거든. 얼마나 낯을 가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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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희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박정수의 입에서 잊고 싶었던 과거 일이 흘러나오자 재희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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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아까 내 말 들어준 고마움의 표시로 재희를 좀 더 다루기 쉬운 방법을 알려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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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법?”

조용한 복도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내 무혁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서인지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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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무리 그래도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이 정도는 도와주고 싶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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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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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오해하지 마. 나 지금 재희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네 말대로 이제 재희 앞에 나타날 생각도 없어.”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치 즐거운 일을 앞둔 이처럼 박정수의 목소리는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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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는 낯가림이 심해서 그렇지 원하는 걸 해주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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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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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거다. 말도 잘 듣고 얌전해지거든.”

박정수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불현듯 옛날에 박정수가 친구들과 질 나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겹쳐지는 상황에 재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박정수가 무혁을 떠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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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걸 해줄 필요도 없어. 그냥 길거리에 핀 민들레 꺾어 줘도 좋아서 다 해주려고 할걸? 무혁이 너도 알지?”

무혁이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질 낮은 대화를 하길 원치 않았다.

대화를 말리기 위해 재희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이어진 무혁의 대답 한마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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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재희의 세상이 파삭,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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