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전조 (62/128)


#62화. 전조
2022.06.02.


캐빈은 오늘도 입이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5월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걸 아무리 뜯어말려도 세라가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비주의 화가로 작품만큼이나 유명한 세라였기에, 5월의 연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 에이전시 측에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전시도 에이전시지만 케빈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도화에게 파란색 드레스를 입혀주면서 장난치는 세라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케빈이 말했다.

16584005254417.jpg

“진짜 참석할 거야?”

16584005254422.jpg

“뭘?”

세라가 도화에게 왕관 머리띠를 씌워주며 무심하게 되물었다.

16584005254417.jpg

“다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마. 5월의 연회 진짜 참석할 거냐고.”

16584005254422.jpg

“그럼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말을 번복해?”

16584005254417.jpg

“의무는 아니잖아.”

16584005254422.jpg

“도의라고 해둘게.”

16584005254417.jpg

“장세라.”

16584005254422.jpg

“참석하는 게 뭐 대수라고.”

16584005254417.jpg

“너 그러다가 5월의 연회에서 네 할머니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

케빈의 말에 세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

케빈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16584005254417.jpg

“프랑스에 자리 잡을 때 말한 거 기억 안 나? 다시는 할머니를 안 본다고 했잖아.”

16584005254422.jpg

“…….”

16584005254417.jpg

“장세라. 5월의 연회 참석 안 하고 라윤 갤러리 관장을 따로 만나는 방법도 있어.”

16584005254422.jpg

“할머니는 내가 이혼한 이후로 5월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시는 거로 알아.”

16584005254417.jpg

“…….”

16584005254422.jpg

“내가 미셸이라는 사실도 모르실 거고.”

세라는 도화가 입은 파란색 드레스에 예쁜 브로치를 달아주며 말을 이었다.

16584005254422.jpg

“그러니까 말은 번복 안 해.”

16584005254417.jpg

“도대체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뭐라고 이런 것까지 감수하는지 모르겠네.”

16584005254422.jpg

“우리 도화 생명의 은인이야. 또 우리가 프랑스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은인이기도 하고.”

단호한 세라의 말에 케빈이 입을 다물었다.

16584005254422.jpg

“그러니 직접 인사를 하는 게 맞아. 그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다면 우리 도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어.”

16584005254417.jpg

“……알았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 할 말이 없어진 케빈이 에이전트에 메일을 보낸다며 방을 나가자, 도화가 세라의 옷자락을 잡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16584005254422.jpg

“엄마. 우리 누구 만나?”

16584005254422.jpg

“응. 우리 도화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려준 언니 만날 거야.”

16584005254422.jpg

“언니?”

16584005254422.jpg

“몽마르트르에서 만난 언니 기억나?”

재희를 떠올린 도화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16584005254422.jpg

“응! 공주님 같았어! 옆에 있던 야수 아저씨도 기억나!”

16584005254422.jpg

“야수?”

16584005254422.jpg

“도화한테 비행기 비행기 해주던 아저씨야.”

16584005254422.jpg

“우리 도화 신났겠네.”

16584005254422.jpg

“응! 근데 우리 그 언니 만나는 거야?”

16584005254422.jpg

“5월에 만날 거야. 도화도 기대되지?”

16584005254422.jpg

“와아! 응! 응! 엄마 그때 도화 공주님으로 만들어줄 거지?”

세라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화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84005254422.jpg

“그럼. 오늘 당장 드레스 사러 갈까?”

16584005254422.jpg

“응! 벨라 거도 사자!”

16584005254422.jpg

“안 돼.”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무혁의 차가 라윤 갤러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췄다.

16584005276943.jpg

“오늘은 12시 전엔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무혁이 재희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말했다.

16584005276947.jpg

“정말요?”

16584005276943.jpg

“이번에 해외 파견을 나갔던 친구가 귀국했습니다. 저녁에 환영회가 있습니다. 거기 들렀다 올 예정입니다.”

16584005276947.jpg

“알았어요. 그럼 내일 뭐 해장할 거라도 미리 준비해 달라고 아주머니께 말씀드려야겠네요.”

16584005276943.jpg

“술은 마시지 않을 겁니다. 다만.”

무혁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16584005276943.jpg

“오늘 재희 씨를 안고 싶습니다.”

무혁의 직구에 재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할 말을 잃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는 재희를 진중한 눈으로 보던 무혁이 가만히 입술을 겹쳐왔다.

커다란 손이 재희의 머리를 감싸고, 뜨거운 입술이 작은 입술을 거침없이 탐했다. 정중하지만 거친 키스에 온몸에 힘이 풀린 재희가 무너지려 하자, 무혁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어 매끄러운 등을 쓸었다.

16584005288696.jpg

 

16584005276947.jpg

“무혁 씨.”

한참 키스를 나누던 재희가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뗐다.

16584005276947.jpg

“저…….”

무혁은 재희의 당황한 기색을 보고도 살결을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무혁은 말없이 재희의 등을 쓸어주다가 입을 열었다.

16584005276943.jpg

“밤에 되도록 일찍 오겠습니다.”

등을 쓸던 거친 감촉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혁은 흐트러진 재희의 옷을 정리해주며 말을 이었다.

16584005276943.jpg

“이따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재희는 얼굴을 붉힌 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린 재희는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며 서둘러 라윤 갤러리로 걸음을 옮겼다.

언덕 중반쯤에 오른 재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혁의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재희가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재희는 무혁이 늦을까 싶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언덕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찼다. 등을 가만히 쓸던 거친 손의 감촉을 떠올리자 아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16584005276947.jpg

‘정말 돌려 말할 줄 모른다니까.’

엘리베이터 앞에 선 재희는 문득 가방을 뒤져 희수가 일전에 생일 선물로 사준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결국, 희수 앞에서는 바르지 못했지만, 늘 가방에 넣고 다녔었다.

16584005276947.jpg

‘정말 나한테 어울릴까.’

희수가 잘 어울린다고 하니 발라보고 싶으면서도 색상이 부담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16584005254422.jpg

“색 예쁘네요.”

뚜껑을 열어 색을 보고 있을 때,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건지 디저트 상자를 든 유라가 재희를 보며 진하게 웃고 있었다. 예의 그 껄끄러운 웃음에 재희는 뚜껑을 닫고 립스틱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16584005254422.jpg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번 발라보지 그래요?”

16584005276947.jpg

“제가 바르기엔 좀 과한 색 같아서요.”

16584005254422.jpg

“아쉽네요.”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이번엔 재희가 먼저 올라탔다. 그러곤 열림 버튼을 누르고 유라를 보며 말했다.

16584005276947.jpg

“안 타세요?”

유라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지만, 곧 말없이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16584005254422.jpg

“오늘 모임이 있어요. 저도 참석할 거고, 무혁 오빠도 올 거예요.”

16584005276947.jpg

“네. 들었어요.”

16584005254422.jpg

“재희 씨는 안 오세요?”

16584005276947.jpg

“부부동반 모임이 아니라면 제가 무혁 씨 친구 모임에 낄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16584005254422.jpg

“결혼 안 할 것 같았던 무혁 오빠가 결혼을 밀어붙이게 만든 재희 씨가 어떤 사람인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요. 결혼식 때 한번 보긴 했지만, 워낙 무혁 오빠가 꼭꼭 숨겨 놓고 안 보여주고 말도 안 해서 다들 한 번쯤 얘기 나눠 보고 싶다고 난리예요.”

16584005276947.jpg

“유라 씨.”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하냐는 듯한 시선에 유라가 진하게 웃었다.

16584005254422.jpg

“무혁 오빠. 정말 결혼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맞선 자리도 사실 어머니 채근에 못 이겨 나간 거였어요. 오죽하면 무혁 오빠가 결혼한다면 누구와 결혼할 건지를 두고 내기까지 했겠어요?”

16584005276947.jpg

“…….”

16584005254422.jpg

“그런 무혁 오빠가 결혼을 했으니 다들 궁금할 수밖에 없었죠. 얼마나 대단한 여자길래 한 번도 안 보여주냐고요. 그리고 명색이 와이프인데 남편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일반인도 아니고 차기 재계를 이끌어갈 후계자들인데요.”

 
5층입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번엔 유라가 먼저 내려 재희를 돌아보며 진하게 웃었다.

16584005254422.jpg

“저녁 7시에 청담 JX클럽에서 다들 모일 거예요. 시끄러운 클럽은 아니고 조용한 곳이니 걱정 말고요.”

유라가 웃으며 가방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그러곤 그걸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16584005254422.jpg

“아, 그리고 이제 문 안 열어줘도 괜찮아요. 이번 5월의 연회 때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어머님이 특별히 저를 위해 보안 카드를 만들어주셨거든요.”

유라가 먼저 들어간 뒤에도 재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무혁과 함께 돼지껍데기를 먹고 길을 걸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서로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그런 소소한 대화들.

제법 무혁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유라가 한 말로 인해 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16584005276947.jpg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재희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무혁과 처음 만나 결혼하기까지 4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무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무혁이 자신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은 것처럼.

그렇게 마음을 다시 다잡은 재희는 비서실로 들어갔다.

한 비서가 곧바로 관장실로 데리고 간 건지 유라는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시키며 유라가 한 말을 곱씹었다.

16584005276947.jpg

‘청담 JX클럽 7시…….’

재희는 달력을 힐끗 쳐다보았다.

23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 * *


16584005254422.jpg

“어머니~ 저 왔어요.”

관장실에 들어서며 유라가 활기차게 인사하자, 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16584005311081.jpg

“어서 오렴. 유라야. 바쁜데 시간 내주다니 고맙다.”

16584005254422.jpg

“어머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여기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마카롱이에요.”

16584005311081.jpg

“뭘 이런 걸 다 사 오고 그러니. 고마워. 우선 거기 앉으렴. 차 좀 내오라고 할 테니.”

유라는 소파에 앉으며 관장실을 둘러 보았다.

예전엔 전혀 욕심이 나지 않았던 관장실이었다. 그런데 무혁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서 이곳 라윤 갤러리도 탐이 나기 시작했다.

무혁이 이혼 후 자신과 결혼하고, 이 라윤 갤러리를 이어받게 되면 여길 부수고 별장을 만들 계획까지 해둔 상태였다.

16584005254422.jpg

‘이런 좋은 자리에 고작 미술관 따위를 세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그런 속내를 감춘 채 한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유라가 슬쩍 말을 꺼냈다.

16584005254422.jpg

“그런데 어머님. 그거 아세요?”

16584005311081.jpg

“뭘?”

16584005254422.jpg

“무혁 오빠가 와이프 출근을 도와주는 것 같아요.”

혜란의 부름에 라윤 갤러리로 향하는 세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유라는 똑똑히 봤었다.

무혁의 차에서 내리는 재희를.

그리고 재희가 라윤 갤러리까지 가는 내내 꿈쩍도 하지 않던 무혁의 차.

그리고 라윤 갤러리로 향하다 말고 익숙한지 얼른 가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재희.

잠깐 사이 그걸 모조리 다 목격한 유라는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저것도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이었는데 빼앗겼다는 생각에, 유라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서 유라는 재희를 싫어하는 혜란에게 은근히 그 사실을 흘렸다.

16584005311081.jpg

“그래? 여전히 사이가 좋구나.”

16584005254422.jpg

“네?”

16584005311081.jpg

“무혁이는 자기 시간 관리가 철저해. 생각이 있어서 데려다주는 거겠지.”

16584005254422.jpg

‘뭐지? 노망났나?’

유라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혜란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이라면 못마땅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을 혜란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앞에서 재희를 험담했을 혜란인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했다.

16584005311081.jpg

“그래도 내 며느리인 걸 직원들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문득 혜란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16584005254422.jpg

‘그래. 그런 반응이어야지.’

속으로 만족스러워하던 유라는 이어진 혜란의 말에 표정이 설핏 굳었다.

16584005311081.jpg

“잘 지키고 있나 보네. 매일 데려다주는 거라면 눈치챌 만도 한데 아무도 모르는 걸 보니.”

16584005254422.jpg

“…….”

심지어 혜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까지 떠오른다.

유라가 굳어 있는 사이, 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삽화를 가지고 왔다.

예의 그 더러운 삽화에 유라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16584005311081.jpg

“혹시 유라야. 이거 새로 하나 더 그려줄 수 있니?”

16584005254422.jpg

“이걸요?”

16584005311081.jpg

“그래. 이번 5월의 연회에 이 그림을 공개하며 미셸과 네 만남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여줄까 해.”

혜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라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진하게 미소지었다.

16584005254422.jpg

“하지만 어머니.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은 바로 미셸 아닌가요?”

16584005311081.jpg

“아니. 이번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은 바로 미셸과 너야. 그리고 이 만남을 대대적으로 기사에 실을 생각이야.”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혜란의 눈동자는 사업가의 눈빛을 머금고 있었다.

미셸 본인이 참석한다고 했으니, 이번 5월의 연회를 큰 화젯거리로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엿보였다.

유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혜란의 제안은 당혹스러웠지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 유명한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이라.

그것도 화제성 있는 미셸이 찾아달라고 했던 일러스트레이터와 미셸의 만남.

그걸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혜란을 다시 자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16584005254422.jpg

‘잠깐 신재희에게 혹한 모양이지만, 얼마든지 다시 마음을 돌릴 수 있어.’

유라는 만지는 것도 끔찍한 더러운 삽화를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어 들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16584005254422.jpg

“그림을 놓은 지 오래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보도록 노력해 볼게요.”

 

1658400533762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