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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희수의 의심 (59/128)


#59화. 희수의 의심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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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야. 여기.”

모처럼 잡힌 약속에 10분 일찍 나온 재희는 막 브런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희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재희를 발견한 희수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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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재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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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제 프로젝트는 정말 다 끝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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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주 그냥 이번에도 마른걸레 짜내듯 쥐어 짜내졌다. 이번엔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이리 오라고 손짓까지 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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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올 때가 아니라서 널 돌려 보내주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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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뭐 오란다고 순순히 끌려갈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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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우리 희수는 야무지니까.”

둘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브런치 세트를 시켰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브런치 사진을 찍으며 희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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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때? 갤러리는 다닐 만해? 저번에 무슨 5월의 연회? 거기에 전시할 작품 보러 갔었다며.”

가끔 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 재희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며 희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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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제 좀 일에 익숙해졌고, 5월의 연회 준비도 잘되어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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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시어머니랑 일한다고 해서 좀 걱정됐거든. 널 보는 눈이 별로 곱지 않아서 더 걱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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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랬는데, 이젠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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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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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조금은 내게 마음을 여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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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나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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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내가 너한테 숨길 게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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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언제든 힘들면 말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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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았어.”

두 사람은 서로의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으며 브런치를 말끔하게 비웠다.

입가심으로 커피를 마시는 희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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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정말 맛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기대 이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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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나도 맛있었어.”

희수는 조용히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재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재희의 얼굴은 맑기만 했다.

희수는 백화점에서 무혁과 함께 있었던 여자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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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해겠지.’

위로 오빠만 넷.

딸이 귀한 집안에서 어떻게든 딸을 보고자 부모님이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희수였다.

비록 어린 희수에게 장난이랍시고 헤드록을 걸던 원수 같은 오빠들이었지만, 이상한 남자에게 엮이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해주었다. 덕분에 희수는 남자 보는 눈은 제법 괜찮았다.

무혁을 몇 번 만나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희수는 그가 한눈팔 남자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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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상이 좀 무섭긴 해도 재희를 보는 그 눈은 진심이었어.’

희수는 과한 생각이라며, 이내 아까 봤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

그러나 명품 주얼리 로고가 새겨진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웃던 여자의 얼굴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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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야. 무슨 일 있어?”

재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희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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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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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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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피로가 덜 풀렸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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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이만 헤어질까.”

걱정하는 목소리에 희수는 재희에게 굳이 짐을 더 얹어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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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모처럼인데 실컷 놀다 들어가야지. 그보다 너 시간 괜찮아? 주말인데 남편이랑 같이 안 보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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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괜찮아. 무혁 씨는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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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들어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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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말씀에 따라 KJ 건설에 들어간 이후로 이것저것 맡은 사업이 있어서 그런지 계속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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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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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오늘도 출근했어. 주말에도 항상 출근하거든.”

애써 지웠던 백화점 앞 카페에서 본 무혁과 여자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주말에도 출근할 정도로 바쁘다는 사람이 백화점 앞 카페에 웬 여자랑 같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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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안 맞잖아.’

희수는 다시금 드는 석연찮은 기분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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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출근한 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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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뭔가 평소와 다른 기색에 재희가 재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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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야. 너 정말 무슨 일 있어?”

재희의 목소리에 절로 생각에 깊게 빠지려던 희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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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는 재희를 보자 희수는 고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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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 하는 거야. 확실하지도 않은데. 의심도 병이다. 정희수.’

희수는 얼른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가방에서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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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야. 이거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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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선물 상자를 받아든 재희를 보며 희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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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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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뭘 이런 걸 다 챙기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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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생일 그냥 건너뛰는 거 봤니?”

희수가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재희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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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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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풀어봐. 내가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고른 거야.”

잔뜩 기대한 눈으로 쳐다보는 희수에게 웃어주며 선물을 뜯어본 재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희수가 준 선물은 재희가 즐겨 쓰는 브랜드의 립스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립스틱 색이 평소 재희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빨간색이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한 재희를 보며 희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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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예쁘지? 촌스러운 빨간색이 아니라서 예쁘더라구. 보는 순간 이거다 싶더라.”

차마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재희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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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고마워. 희수야.”

코랄색만 쓰는 재희에게 이 립스틱 색상은 과했다.

그런 재희의 취향을 익히 알고 있는 희수는 턱을 괴고 흐흥,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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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색만 쓰지 말고, 가끔은 이런 과감한 색도 써봐. 넌 피부가 하얘서 이런 색도 꽤 잘 어울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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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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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 여기서 한 번 발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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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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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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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바를게.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해.”

몸을 일으키고 짓궂게 웃는 희수를 보며 재희가 대충 둘러댔지만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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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네 남편에게 처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봐야겠다. 자아. 얼른 이리 와. 이 언니가 예쁘게 발라줄게.”

기어이 발라주고야 말겠다는 희수의 굳은 의지에 재희가 몸을 주춤 조금 뒤로 물릴 때쯤, 구세주 같은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얼른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가 희수에게 휴대전화를 보여주었다.

[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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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전화 받을게.”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희수가 툴툴거리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재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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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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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했습니까.

여느 때와 같은 물음에 재희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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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희수랑 같이 먹고 커피 마시던 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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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먹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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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브런치 먹었어요. 무혁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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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직 점심 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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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제대로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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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약속 있다고 하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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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따 봐요.”

짧게 통화 후 전화를 끊는 재희를 보며 희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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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렇게 통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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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정해진 시간에 통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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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바쁘다더니 그 와중에도 전화는 꼬박꼬박 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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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결혼 전에도 그랬는데 변함 없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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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에 넣는 재희를 보며 희수는 역시 자신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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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저렇게 사이가 좋은데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

하지만 왜인지, 희수는 뒤끝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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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월이 가까워지자 라윤 갤러리는 한층 더 바빠졌다.

5월의 연회 준비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 라윤 갤러리엔 조형물 설치업체가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기간 동안 라윤 갤러리는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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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란은 창가에 서서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재희는 장독수 화백의 작품을 어디에 두면 가장 눈에 잘 띄면서도 5월의 연회가 지루해지지 않을지, 골몰하고 있었다. 이따금 조형물 설치 업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평소의 흐릿한 표정과 달리 꽤 진지한 얼굴로 이리저리 공간 사이사이 가늠해 보는 재희를 지켜보던 혜란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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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그만 심술부리지 그러나.”

작품 전시 관련으로 라윤 갤러리에 방문한 장독수가 웃으며 말했다.

혜란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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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이라니. 누가 들으면 정말 그런 줄 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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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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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솔직한 혜란의 대답에 장독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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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야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지금은 그게 아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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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도 혜란이 부정하지 않자 장독수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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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며느리 말이야. 꽤 좋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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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얼마나 봤다고 그런 소리 해요? 누가 보면 독심술 하는 줄 알겠네요.”

장독수는 혜란의 어머니가 라윤 갤러리의 관장을 역임했던 시절부터 자주 봐왔던 사이로, 혜란이 마음을 터놓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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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니네. 자네 며느리, 언뜻 보기엔 소심하고 말이 없어 보이지만, 속은 단단한 아이 같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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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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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작품 보는 눈이나 지식도 해박한 것 같고. 그러니 내 작품의 진척을 확인하겠다고 직접 그 아이를 보낸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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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렇죠. 보기와 다르게 눈썰미도 제법이고, 감각도 뛰어나고.”

제 말을 부정할 줄 알았던 혜란이 긍정하자 장독수가 다시금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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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아들인 강무혁은 무뚝뚝하지만, 충동적인 성격이 아님을 잘 알지 않나. 그런 아들이 앞뒤 재지 않고 선택한 아이이니 좀 고운 눈으로 봐주게나. 무엇보다 자네 아들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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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일 얘기나 하죠.”

말을 돌리는 혜란을 보며 장독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혜란의 기색을 보아하니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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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며느리가 다음 라윤 갤러리 관장이 되면 아마 누구보다 잘할 거란 걸 제일 잘 알겠지.’

그런 장독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란은 창가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이내 거두어들였다.

* * *

한편 재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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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너무 구석진 곳이야. 그럼 어디가 좋을까.’

장독수의 소중한 작품을 아무렇게나 두고 싶지 않았다. 재희는 작품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5월의 연회의 콘셉트와 어우러지도록 배치하기 위해 골몰했다.

정원에 서서 한참 동안 배치도를 구상하던 재희는 휴대전화가 울리자 생각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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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인가?’

휴대전화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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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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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신재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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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재희야! 금방 받았네. 내 번호 안 지웠나 봐.

반갑지 않은 박정수의 목소리에 재희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재희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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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대학생 때 박정수와 헤어진 뒤, 끈질긴 연락에 시달리다가 그의 번호를 차단하면서 자신의 번호까지 바꿨었다.

그 후로 박정수와 연락할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전화가 오자 재희는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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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나랑 그래도 같은 대학교 다녔잖아. 찾는다면 금방 찾을 수 있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넉살 좋게 웃는 박정수가 소름 끼쳤다.

재희는 휴대전화를 고쳐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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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하지 마세요. 박정수 씨랑 연락할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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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네 남편이랑 친구인 건 잊었냐? 내가 강무혁한테 너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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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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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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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하라구요.”

예상과 다른 재희의 반응에 박정수가 도리어 당황한 듯했다.

박정수가 할 말을 잃고 당황하자 재희는 갑자기 그가 우스워졌다.

박정수가 이렇게 큰소리치면 지레 겁을 먹었던 재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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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는 제 말을 더 믿을 테니까요. 더는 연락하지 마세요.”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재희는 그대로 박정수의 번호를 차단했다.

무혁의 친구인 이상 언제든 마주칠 일은 있겠지만, 재희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갤러리 일과, 곧 다가올 생일을 무혁과 함께 보낼 생각에 다른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재희는 곧 박정수 따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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