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목격 (58/128)


#58화. 목격
2022.05.19.


토요일.

재희는 가벼운 카디건을 걸치고 출근하는 무혁을 배웅하고 있었다. 타이가 비뚤어지진 않았는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던 재희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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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늦게 출근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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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오늘 오전엔 그렇게 급한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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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행이구요. 오늘도 늦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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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래도 되도록 일찍 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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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요. 몸 조심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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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야말로 무리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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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오늘 쉬는 날인데 무리할 게 뭐가 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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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전화하겠습니다.”

무혁의 대답은 짧았지만, 재희는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당혹스럽기만 했던 무혁의 말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무혁이 출근한 뒤 재희가 거실로 향하자, 식탁을 치우고 있던 경자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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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언제봐도 참 보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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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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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사장님이 워낙 무뚝뚝하셔서 그렇지, 사모님을 얼마나 챙기시는데요. 아주 부럽다니까요.”

경자의 말에 재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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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도와드릴게요.”

화제 전환 겸 재희가 팔을 걷어붙이자, 경자가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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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괜찮아요. 이게 제 할 일인걸요. 사모님은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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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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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 그러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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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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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커피랑 간식 좀 내어다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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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제가 내려 마실게요.”

마저 할 일을 하는 경자를 뒤로한 채 서재에 들어온 재희가 스케치북을 꺼내다 일전의 평창동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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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마음을 여신 걸까.’

전과 달리 자신을 향한 적대감이 조금 누그러진 혜란이었다.

자고 가라는 혜란의 말에 놀라긴 했지만, 재희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결혼 전 무혁이 지냈던 방도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결국, 방 구경을 다 하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기는 결과가 되긴 했지만, 그때 보낸 하룻밤이 헛되진 않았다. 시부모님과 조금 가까워진 기분도 들었고, 무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가 반가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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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희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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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야.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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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은 없어. 웬일이야. 프로젝트는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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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다 살아났지~ 오늘 시간 돼? 우리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재희는 잠시 달력을 살폈다.

다행히 당장 급한 일은 없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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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나도 희수가 보고 싶어.”

희수와 약속을 잡은 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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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화점이 오픈하자마자 무혁은 G 매장으로 향했다.

주문을 맡겨둔 반지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전날 받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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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매장 매니저가 케이스를 열어 완성된 반지를 보여주었다.

무혁이 케이스에 든 반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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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오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혁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유라가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무혁을 보며 진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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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라 대리님.”

딱딱한 무혁의 말에도 유라는 개의치 않는 듯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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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보러 온 거야? 우연이네. 마침 나도 오늘 반지 찾으러 왔는데.”

유라의 시선이 반지에 잠시 머물렀다.

무혁이 케이스를 매니저에게 내밀며 딱딱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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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해 주십시오.”

포장을 위해 매니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유라가 다시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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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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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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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요즘 셀럽들 사이에서 유명한 반지잖아. 무혁 오빠에게 이런 세심한 면이 있는 줄 몰랐네.”

무혁의 대답은 없었지만, 유라는 개의치 않았다.

마침 포장을 마친 매니저가 돌아오자, 무혁은 나머지 잔금을 치른 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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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보겠습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무혁이 막 걸음을 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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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려 봐.”

무혁이 슬쩍 돌아보자, 유라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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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김에 다음 주에 미팅하기로 했던 리모델링 건으로 오늘 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무혁이 대답을 하지 않자 유라가 봉투에서 서류를 슬쩍 꺼내 보이며 진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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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업무 내용 제대로 숙지해 왔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무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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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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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해. 여기 앞 카페에서 봐.”

 

* * *

1층 화장품매장에서 재희의 생일 선물을 산 희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생일이 되기 전에 재희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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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생일 땐 남편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겠지.’

매년 4월이 되면 재희의 안색은 늘 어두웠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재희와 늘 붙어 다니는 희수인 만큼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재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꼭 생일 전주나 전날에 같이 밥을 먹고 크게 떠들곤 했었다.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에 올해도 걱정이 돼서 전화를 했는데, 재희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밝았다.

처음 무혁을 봤을 때 희수는 걱정부터 앞섰다.

겉보기에도 둘의 성격이 상극처럼 보여서 재희가 상처받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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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걱정과 달리 잘 지내서 다행이야.’

자신이 산 선물이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며 흐뭇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희수의 걸음이 멈췄다. 백화점 앞 카페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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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사람은.’

무혁이었다.

통유리창으로 된 카페 안에 있는 무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무혁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을 본 희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웬 미인이 웃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명품 주얼리 로고가 새겨진 작은 종이가방이 보였다.

무혁은 시선도 떼지 않은 채 제 앞의 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가 테이블 위의 종이가방을 들어 무혁에게 보여주더니 제 가방에 집어넣었다.

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희수가 고개를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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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재희인데, 왜 다른 여자가 앉아 있지?

저 여자는 또 누군데.

무심결에 재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희수의 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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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해서 뭐라고 하려고? 네 남편이 다른 여자랑 같이 있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희수는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 * *

한편, 희수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무혁은 앞에 앉아 있는 유라를 묵묵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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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그렇게 헤어진 게 좀 아쉬웠거든. 우연이지만, 난 무혁 오빠 만난 게 참 반가웠는데 오빠는 아니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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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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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엔 확실하게 업무에 대해 숙지해 왔어.”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유라는 개의치 않고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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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 마. 나도 리모델링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좀 바빠져서 주말 출근하던 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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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마침내 무혁이 짧게나마 대답했다.

업무 이야기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한 무혁의 태도에 유라는 속으로 짜증이 났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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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김에 겸사겸사 여기서 주문한 반지를 찾으러 왔거든. 마음에 꼭 드는 반지여서.”

유라가 테이블에 올려둔 G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작은 가방을 무혁에게 보여준 뒤 가방에 집어넣었다. 무혁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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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한 백화점 리모델링 건과 관련한 미팅을 시작해 보죠.”

한 톨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혁의 목소리에 유라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진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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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긴. 조금 더 분위기를 풀어도 되잖아. 그보다 요새 어머님은 어떠셔? 통 뵙질 못했는데, 잘 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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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라 대리님.”

무혁이 말을 자르며 딱딱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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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일 얘기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겁니다.”

단 1초도 사적인 대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묵직한 목소리에 유라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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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할 거라면 이만 일어납시다. 사담 나눌 시간은 없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유라가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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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기는. 우린 비즈니스적으로 이렇게 앉아 있는 거라고. 이 정도 가벼운 대화도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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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분.”

가차 없는 무혁의 말에 유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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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죠. 일 얘기하죠.”

유라는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역시나 티는 내지 않았다.

* * *

정확히 업무 이야기만 나눈 뒤 유라와 헤어진 무혁이 온 곳은 노을 서점이었다.

유라는 식사도 같이하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무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팅한 시간은 겨우 30분 남짓.

그것도 업무를 위한 시간일 뿐이었지만, 그로 인해 계획했던 일정이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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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혁은 거의 완성되어 가는 노을 서점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 문손잡이를 잡았다.

덜컹덜컹, 약간 뒤틀린 나무 문지방에 걸린 문이 몇 번 마찰음을 내다 열렸다.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세월에 뒤틀린 나무 문지방을 손보고 매끄럽게 만들 수 있었지만, 무혁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청계천과 함께해 온 노을 서점인 만큼 이 작은 뒤틀림도 그대로 두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선 무혁을 제일 먼저 반긴 건 묵은 책 내음과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였다.

추억이 서린 그리운 냄새와 풍경을 잠시 느끼던 무혁은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난방을 하지 않아 서점 안의 공기는 싸늘했으나 무혁은 개의치 않았다.

무혁은 주변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노을 서점 깊숙한 곳에 있는 좁은 계단을 올랐다.

노을 서점의 또 다른 명소인 다락방이었다.

덩치가 큰 탓에 무혁은 깊게 몸을 숙여서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다다라 굳게 닫혀 있던 손때가 묻은 낡은 문을 열었다.

문 안쪽에 제법 널찍한 공간이 있었는데 언뜻 봐도 제법 낡아 보였다.

그러나 노을 서점 할아버지가 정성껏 관리해왔던데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전문 관리인이 관리를 잘해둔 덕에 내부는 제법 깨끗했다. 더불어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무혁이 채워 넣은 가구는 모두 새것이었다.

무혁은 다락방 한쪽에 놓인 등받이 쿠션에 기대앉아 고개를 들었다.

사선으로 약간 기울어진 벽에 넓고 기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하늘을 구경하기 좋게 트여 있었다.

원래는 두 뼘 정도의 작은 창문만 있었지만, 무혁이 일부러 창문을 넓혀두었다.

재희를 위해서.

솜을 펼쳐놓은 듯한 흰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보던 무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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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씨. 그거 알아요?”

 
당시 무혁은 자신의 이름 대신 [강혁]이라는 다른 이름을 썼었다.

당시 무혁은 KJ 그룹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숨겨진 종조부를 몰래 찾는 일을 맡게 되었다.

KJ 그룹 명예회장은 자신의 비서 대신 손자인 무혁에게 동생을 찾으라 지시할 만큼 일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고집스럽고 의심 많은 KJ 그룹 명예회장이 동생을 그리워하면서도 외부에 알려지면 급락할 KJ 그룹 주가를 염려한 탓이었다.

회장은 한 여자 때문에 가족도 버리고 스스로 집을 떠난 동생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무혁은 자신의 이름조차 재희에게 밝히지 못했었다.

그 무렵 무혁은 답답할 정도로 FM이었다.

KJ 그룹에서 제명된 방탕아.

사랑 때문에 집안도 버린 천하의 못된 자식.

노을 서점 할아버지는 자신을 가리키는 그 수식어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무혁이 쓰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큰 비밀도 아닌데, 뭐하러 감추냐며 오히려 가벼운 타박을 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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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기서 좋은 곳을 발견했어요.”

 
처음으로 노을 서점의 다락방을 구경하고 온 재희의 목소리.

새로운 공간을 발견한 재희의 들뜬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에 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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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무혁의 목소리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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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 가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조금 좁긴 해도 아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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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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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는데, 그 다락방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장소래요. 가보니까 왜 좋아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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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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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늘이 보이는 거요. 가끔 참새가 놀러 오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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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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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씨는요? 여기서 어디가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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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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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죠.”

 
재희는 결국 무혁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아 보였다.

당시의 무혁도 노을 서점에서 좋아하는 공간이 있었다.

바로 재희와 함께 등을 마주 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책장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재희와 함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무혁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무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재희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자 무혁은 자연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늘 듣는 수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수신음이 흐르는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무혁의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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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혁 씨.

재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무혁은 다락방 벽에 기대앉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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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했습니까.”

어투와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깃든 애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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