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반지 (57/128)


#57화. 반지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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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데도 나가요?”

일요일.

평창동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나갈 준비를 하는 무혁을 보는 재희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재희가 건네주는 건강 쥬스를 단번에 마시고 설거지까지 마친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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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좀 늦을 듯하니 먼저 주무셔도 됩니다.”

서재에서 시작된 사랑은 꽤 길게 이어졌고, 가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아침 7시였고, 무혁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분명 재희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평창동에서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귀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혁은 옷을 갈아입고 출근할 준비를 마쳤다.

현관에서 무혁을 마중하던 재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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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정말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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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희 씨야말로 들어가서 좀 더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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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다녀와요.”

탁, 닫히는 현관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재희가 몸을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

* * *

평창동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무혁은 다시금 바빠졌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토요일에 하지 못했던 일을 처리하느라, 차 안에서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요일인 만큼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꽉 막혔고, 차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운전기사가 죄송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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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상무님. 오늘따라 길이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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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덤덤하게 말하며 태블릿 PC에 시선을 두고 서류를 보던 무혁이 문득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에는 한창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젠 제법 가볍고 화사한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잠시 거리를 구경하던 무혁의 눈에 한 커플이 보였다.

갓 20대 초반이 된 것 같아 보이는 커플이었는데, 남자의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남자의 곁에 있는 여자는 연신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윤 비서가 무혁을 따라 커플을 보고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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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 받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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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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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느 날이든 상관없이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겁니다.”

무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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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말입니까.”

드물게 무혁이 일 외의 다른 주제에 대해 물었다.

윤 비서는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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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생일이나 결혼 전이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프러포즈 자체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을 겁니다.”

무혁은 잠시 커플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두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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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일정, 급한 일입니까.”

무혁의 물음에 윤 비서가 재빨리 일정을 체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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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그렇게 급한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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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세 시간 정도 빼두십시오.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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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무혁의 일정 취소 요구에도 윤 비서는 별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혁이 일 외의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하니 윤 비서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윤 비서가 보기엔 무혁에겐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 *

오후 일정을 비운 무혁이 향한 곳은 대한 백화점 G 명품 악세서리 매장이었다.

예물을 맞추러 온 이후로 처음 오는 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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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매니저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무혁이 쇼케이스에 진열된 악세서리를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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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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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을 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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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런 디자인은 어떨까요? 프러포즈용 링인데, 언뜻 보면 심플해 보이지만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환한 곳에선 은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끼기에도 부담 없는 디자인이라 고객님들이 많이 선호하시는 디자인입니다.”

무혁은 잠시 재희가 반지를 끼고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재희가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무혁은 좀 더 욕심이 스멀스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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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성들에게 잘 나가는 반지는 어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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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외에도 요즘 잘 나가는 반지는…….”

무혁은 쇼케이스에 진열된 반지 하나하나 까다롭게 묻고 물은 다음에야 결국 처음에 매니저가 추천해준 반지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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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하시는 분 사이즈를 알려주신다면 주문을 넣어두겠습니다. 혹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추후에 전화로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덩치 큰 남자가 여자 손가락의 사이즈를 미리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

무혁은 잠시 재희의 손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까지 재희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사랑을 나누었다.

재희의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놓치는 법이 없는 무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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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지 7호.”

망설임 없는 무혁의 대답에 매니저가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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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약 3일 정도 소요가 됩니다. 이때 찾으러 오시면 모두 준비해 두겠습니다.”

계약금을 치른 무혁이 막 G 매장을 나올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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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오빠?"

무혁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쇼핑 나온 듯 유라의 손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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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여긴 어쩐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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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중이었습니까. 한유라 대리님"

딱딱한 무혁의 말에 유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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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회사가 아닌걸. 그냥 말 편하게 해."

유라가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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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밖에서 보니 반가운데 차라도 같이 한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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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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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무혁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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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면 아쉽게도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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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그냥 차나 한잔 마시자는데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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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유라는 냉정하게 등을 돌린 무혁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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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그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는지 두고 보라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떼려던 유라의 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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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저 매장에서 나왔었지?’

여성 주얼리 전문 명품 브랜드 매장이다.

그런 곳에 워커 홀릭인 무혁이 아무 이유 없이 올 리가 없었다.

무혁이 나온 G 매장을 보던 유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매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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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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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간 남자가 산 거 저도 보여줘요."

매니저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말을 자르며 말했다.

순간 매니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베테랑답게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매니저가 쇼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자 유라는 한참을 뚫어져라 반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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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남자가 이걸 사 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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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답니다."

유라가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 천만 원을 넘는 반지의 가격에 유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보나 마나 반지의 주인은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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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도 않아.’

유라는 기가 막혀서 하,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에게 주어야 할 반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도, 살고 있는 집도, 강무혁이란 남자도 모두 제 거였다. 혜란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고, 집안도 비등하니 누가 봐도 무혁과 어울리는 여자는 자신이었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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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알면 거절해야지."

유라가 이를 갈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엔 새치기당했다는 생각에 무혁을 제 걸로 만들고 나중에 버릴 생각이었다.

잘난 남자가 자기에게 목매는 꼴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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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바뀌었어.’

재미없는 남자라고 여긴 강무혁이 여자에게 선물하기 위해 직접 G 매장에 온 거로도 모자라, 가격 따위 재지 않고 바로 사버리는 그 거침없는 행동에 유라는 무혁을 반드시 제 걸로 만들고 싶어졌다.

이리저리 두고 재는 여우 같은 남자들보다 무혁 한 명이 훨씬 더 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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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같은 거로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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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 남성용 반지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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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걸로 줘요. 내가 낄 거니까."

프러포즈용 반지였지만 매니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수긍했다.

고객의 사연을 자세하게 묻는 건 금지였다. 특히, 이렇게 독기를 가득 품은 고객의 경우는 괜히 한 마디 잘못했다간 날벼락 맞기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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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이 들어가면 3일 뒤에 찾으실 수 있습니다."

유라는 계약금을 치른 후 곧바로 매장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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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봐. 강무혁을 반드시 되찾아 올 거니까.'

유라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를 빠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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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해 주고 싶어서 못 배길 정도로 나한테 목매달게 될 거야.’

 

* * *

재혁은 대문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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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가기 싫다.’

거의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며 오랫동안 준비해온 공모전에서 탈락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준비한 몇 개월의 시간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에 재혁은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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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은 처음 준비한 공모전에서 바로 붙었다고 하던데.’

재혁에게 무혁은 건축학도로서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카페에서 무혁의 멱살을 잡은 뒤로 어떻게든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공모전에 매달렸는데, 오늘 최종 발표에서 탈락하고 만 것이다.

당연히 공모전에 붙을 거라고 자신만만하던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줄기차게 전화를 해대는 바람에 약속한 술자리도 거절하고 온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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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재혁이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언제 오나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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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우리 재혁이 왔누? 춥다. 얼른 들어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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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기는요. 이제 겉옷 벗어도 될 정도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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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일수록 더 감기 조심해야 하는 거야. 우리 귀한 재혁이 감기라도 걸리면 이 할미는 속상하다.”

밤에도 선선할 만큼 날이 풀렸는데도 할머니는 춥다며 성화였다.

일단 오긴 왔지만, 재혁은 이대로 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런 재혁의 기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쉴 새 없이 물으며 가만 놔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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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얼굴 까칠해진 것 좀 봐라. 어미는 약속 있다고 나갔는데, 오는 길에 보양식 좀 사 오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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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그냥 잠만 자고 나면 괜찮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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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건 잘 먹어야지! 우리 재혁이 살 빠진 것 봐라. 쯧쯧. 그러니까 그 공모전 준비 안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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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래서 말인데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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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내 새끼. 말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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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공모전 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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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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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지금은 혼자 있고 싶…….”

은근슬쩍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려던 재혁은 이어진 할머니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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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로 시무룩해 있었누? 넌 걱정 말아라! 어차피 그 공모전 내 찾아보니까 우리 재혁이를 품을 만큼 큰 곳도 아니더라. 쯧쯧. 역시 규모가 작으니 보는 눈도 없는 게야.”

그러나 그 공모전은 시에서 주최한 것으로, 재혁이 밤낮으로 매달렸던 공모전이었다.

할머니는 위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재혁이 매달렸던 공모전을 별 것 아닌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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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렇게 작은 공모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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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공모전 떨어져도 된다. 네 매형이 KJ 건설 상무인데 뭐가 문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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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제가 KJ 건설에 입사하고 싶은 건 맞는데요, 그건 제힘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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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떽! 매형이 KJ 건설의 임원인데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누! 넌 그냥 공모전 따위 한다고 몸 상하지 말고 편하게 학교나 다니거라. 이 할미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재혁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할머니는 재혁의 등을 두드리며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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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 고작 그런 일로 시무룩해 있었누. 그보다 어떻게 지냈는지 할미한테 말해주렴.”

재혁은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할머니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좋아해 주는 할머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재혁은 처음으로 이 집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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