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저녁 식사 (54/128)


#54화. 저녁 식사
2022.05.05.


이른 아침.

재희는 아침 식사하기 전 서재에 들어가서 달력을 살폈다.

동그라미를 친 것도 모자라 뿔까지 그렸던 4월 23일을 물끄러미 보던 재희는 빨간색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뿔을 하트로 수정해서 그려두었다.

그것도 모자라 조심스럽게 작은 선물 상자도 그렸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던 재희는 달력을 잘 보이는 두고 서재에서 나왔다.

다이닝 룸에는 무혁이 먼저 앉아 있었다.

태블릿 PC를 보며 업무를 훑던 무혁이 귀신같이 재희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는 무혁이 빼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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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타이 정말 잘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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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가 골라준 거니까.”

무혁은 재희가 골라주는 옷은 군말 없이 입었다.

재희는 문득 광대 같은 옷을 골라줘도 무혁은 불만 없이 입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하던 재희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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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희의 컵에 물을 따라주던 무혁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재희는 모른 척 시침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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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23일 날 줄 게 뭔지 물어봐도 안 말해줄 거죠?”

네. 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무혁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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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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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만 그때까지 조금 참을게요.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까.”

항상 외면하고 싶었던 생일이 난생처음으로 몹시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다.

무엇보다 미리 확인한 기상예보에선 그날 눈 소식도 없었다.

4월에 눈이 온다는 건 기상이변이었으나, 그래도 재희는 매년 4월이 되면 기상예보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눈 소식까지 없다고 하니 왠지 더 기대되었다.

커다란 선물 상자를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재희는 이 설레는 궁금증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Rrrr Rrrr

재희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휴대전화로 향했다.

[어머님]

발신인을 확인한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재희가 휴대전화를 잡으려 하자, 무혁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작은 손을 감쌌다.

재희가 시선을 마주치자 무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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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받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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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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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내가 따로 전화 드릴 테니 받지 마십시오.”

재희가 웃으며 부드럽게 무혁의 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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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전 괜찮아요.”

평소 연락이 없던 혜란이었다.

처음엔 모진 소리를 했었고, 지금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보였지만 재희는 굳이 혜란을 피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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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재희는 안심하라는 듯 무혁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는 무혁의 커다란 손을 재희는 가볍게 짚었다.

무혁의 손등에 툭, 불거져 나온 핏줄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재희는 그 핏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져 주었다.

무혁이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었지만, 재희는 통화에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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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무혁이랑 같이 시간 좀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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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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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람인지 네 시아버지가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한다. 저녁이나 먹으러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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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녁이요.”

재희가 무혁을 보며 되물었다.

바쁜 무혁이 주말에 시간이나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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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랑 상의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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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는 무슨 상의. 시간이야 내면 되지. 잔말 말고 와.

혜란이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재희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그때서야 무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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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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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토요일에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하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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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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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무래도 무혁 씨는 바쁘니까 힘들겠죠? 어머니한테 잘 말씀드려서 거절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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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겠다고 하십시오.”

라윤 갤러리에 가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무혁이 말했다.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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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 무혁 씨 바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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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한번 평창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정은 조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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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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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단호한 무혁의 말에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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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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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손.”

재희의 시선이 무혁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무언가 참고 있는 듯, 무혁의 주먹이 세게 쥐어져 있었다.

재희가 의아한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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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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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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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이어진 무혁의 말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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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타이, 다시 매주십시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알고 있는 재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이 재희의 손을 잡고 조금 급하게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드레스 룸이 닫히며 밥이 식을 때까지 둘은 나오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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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저녁 식사 당일.

원래대로라면 이 시간까지도 숨 막히게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어야 할 무혁이었지만, 적당한 시간에 업무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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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은 알아서 할 테니 윤 비서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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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제가 퇴근길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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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들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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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게 되자 윤 비서의 얼굴에 살 것 같다는 기색이 잠깐 번졌다가 사라졌다.

살인적인 무혁의 일정을 쫓아다니느라 윤 비서도 내심 지쳐있던 참이었다.

가장 늦게 사무실에서 나온 무혁은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마치면 집에서 재희와 만나 함께 평창동으로 가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수신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재희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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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혁 씨. 퇴근했어요?

재희의 목소리를 듣자 종일 단단하게 굳어있던 무혁의 입매가 아주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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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는 중입니다. 한 시간쯤 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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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조심해서 와요.

 

한 시간 뒤.

검은색 세단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무혁의 걸음이 느려졌다.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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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미리 준비하고 내려와 무혁을 기다리던 재희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무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희를 당연하다는 듯이 제 품에 끌어안았다.

순간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재희가 놀라 움찔하는 게 느껴졌으나 무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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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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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내려와 있으면 무혁 씨가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무혁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재희의 체향을 맡자, 종일 쌓였던 피로가 스르르 녹는 것 같았다.

무혁이 재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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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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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도착할 거라고 미리 연락 줬잖아요. 많이 안 기다렸어요. 그보다 이 손 좀…….”

지금 이 상황이 부담스러운 듯 재희가 꼼지락거리자 무혁은 팔을 풀었다.

무혁이 순순히 팔을 풀어주자 겨우 품에서 벗어난 재희가 약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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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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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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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바깥에선 이러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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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무혁이 순순히 수긍하자, 재희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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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늦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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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창동의 본가.

창고식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무혁이 뒷좌석에 실린 과일 바구니와 꽃다발을 꺼내 들었다.

재희가 미리 백화점에 예약해둔 선물이었다. 무혁은 준비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재희는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건 아니라고 하며 평창동으로 가는 길에 잠시 백화점에 들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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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네요.”

친정과 비교도 안 되게 넓은 저택을 보며 재희가 중얼거렸다.

넓은 정원 한가운데 큐브처럼 사각형으로 지어진 저택은 지하 2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강진과 혜란이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2층은 무혁과 우진이 사는 공간이었다.

현재 무혁은 독립했기에 우진만이 2층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집은 현대식이었으나, 정원은 동양풍으로 수심이 얕은 연못과 작은 정자가 있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인사드릴 때, 무혁은 혜란의 취향이라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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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멋진 정원이에요.”

연못 근처에서 박새가 강원댁이 가져다 둔 먹이통 근처에서 종종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며 재희가 웃었다.

돌길을 따라 현관에 다다르자 문이 벌컥 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진이 제일 먼저 친근하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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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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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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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도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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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딱딱한 무혁과 정반대로 사근사근한 재희의 인사에 우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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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뭐 그렇죠. 에이, 무겁게 뭘 이런 걸 다 사 오고 그러세요. 얼른 들어오세요. 두 분 다 기다리고 계세요.”

우진이 무혁의 손에서 선물을 뺏듯이 받아들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우진이 두 사람을 다이닝 룸으로 안내했다.

다이닝 룸에는 혜란이 시집올 때 데리고 왔다던 강원댁이 한껏 솜씨를 부린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강진과 혜란이 먼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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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셨어요. 저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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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느라 수고했다.”

강진이 딱딱하게 대답하자, 무혁이 재희를 보호하듯 자신의 몸으로 재희를 가리려 했다.

그러나 재희가 무혁의 팔을 짚으며 그러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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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하지만 과일이랑 꽃다발을 사 왔어요.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재희의 말에 우진이 들고 있던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혜란은 못마땅한 눈으로 타박하듯 우진을 바라보았다.

혜란의 왜 네가 그걸 들고 있냐는 시선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강진이 짧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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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맙다. 어서 이리 앉아서 식사부터 하자.”

혜란은 재희가 들고 온 가방을 강원댁에게 맡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번 모임에서 들었었던, 무혁이 사주었다는 그 가방이었다.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금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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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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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무혁이 의자를 빼주자 재희가 웃으며 자연스럽게 앉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의 모습에 우진의 입이 벌어졌지만, 혜란이 옆구리를 세게 찌르자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자리는 서먹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분위기가 그러한 건지, 몇 번 오가는 대화조차도 서먹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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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좋아하잖습니까.”

무혁이 전을 하나 집어 재희의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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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이거, 무혁 씨 좋아하는 거요. 일전에 이거 잘 먹었잖아요.”

재희가 매콤한 더덕구이를 가져와 그릇에 올려주려 하자, 무혁이 그대로 받아먹었다.

재희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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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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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도 얼른 식사를…….”

강진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하던 재희의 말끝이 흐려졌다.

엄한 강진의 얼굴과 못마땅한 혜란의 얼굴, 그리고 밥을 입으로 가져가던 우진이 그대로 굳은 채 재희와 무혁을 보고 있었다.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전을 하나 더 가져오는 무혁의 손을 가만히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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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경 쓰지 말고 무혁 씨 드세요.”

민망해진 재희가 사양했지만, 무혁은 고집스럽게 전을 하나 더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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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멀어서 가져가기 힘들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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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어른들 계세요.”

재희가 속삭이며 주의를 주었지만, 무혁은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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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안 씁니다.”

무혁의 경고 서린 시선이 우진에게 향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우진이 밥을 얼른 씹어 삼키고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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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세요. 그렇죠, 엄마? 아빠?”

혜란은 대답 대신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강진은 음, 짧은소리를 내며 무언의 긍정을 내비쳤다.

그 후로도 재희는 자꾸만 음식을 주려는 무혁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해야 했다.

저녁 식사가 겨우 끝나고, 모두 거실에 둘러앉았다.

재희가 자연스럽게 소파 끄트머리로 가려는 걸 무혁이 잡아끌어 제 옆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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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으십시오.”

아직 그 집에서의 습관이 남아있었던지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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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해. 네 아내를 아끼는 건 좋지만 장소를 가리지 그러니. 여기서 누가 네 아내를 잡아먹으려는 사람이 있니, 뭐가 있니?”

혜란의 쌀쌀맞은 말에 재희가 민망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무혁은 덤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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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에게 편한 장소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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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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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모처럼 모인 자리다.”

강진이 중재를 하자, 혜란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사이에 낀 재희가 무혁의 팔을 잡으며 그러지 말라고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무혁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은 감탄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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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짐승을 조련하는 조련사 같으시네. 우리 형수님.’

무혁이 여자의 말을 잘 듣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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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이 형도 같이 봤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을 건데.’

우진은 이 자리에 민석이 없는 걸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강원댁은 재희가 선물로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꺼낸 과일 몇 개를 내왔다. 과일 접시를 내려놓기 무섭게 무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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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직설적으로 묻는 무혁의 질문에 당황한 건 재희였다.

강진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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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아기가 네 어머니 갤러리에서 일한다지. 5월의 연회도 준비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더 바빠지기 전에 식사나 한번 하자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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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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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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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 말씀하시는 건 아버지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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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어떻게 지내나 한번 궁금해서 불렀다. 네게 할 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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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이 무혁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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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와 바둑이나 한번 두자꾸나.”

강진은 긴히 할 말이 있을 때 항상 바둑을 두자고 말했었다.

무혁은 재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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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녀올 테니 기다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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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아요. 얼른 가요.”

재희가 강진과 혜란의 눈치를 보며 무혁을 밀어냈다.

무혁이 강진과 함께 서재로 걸음을 옮기자 우진이 읏차,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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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도 서재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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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혜란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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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싸움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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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걱정을 다 한다. 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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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그럼 형 안전하게 데리고 나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형수님.”

우진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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