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무혁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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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무혁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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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무혁의 결심
2022.05.02.
무혁이 본격적으로 KJ 건설 일을 시작한 이래로 민석은 하루하루 죽을 맛이었다.
무혁의 공석을 채우는 것도 채우는 거였지만, KJ 건설에 있으면서도 무혁은 틈틈이 KM 건축사 사무소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피드백하기까지 했다.
“아, 이 워커 홀릭을 어떻게 하면 좋냐.”
막 현장을 다녀온 민석은 자신의 대표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괴물 같은 무혁의 체력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 돌아갈 정도로 바쁠 땐 더더욱 그의 체력에 경외심이 들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Rrrr Rrrr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석은 힘없는 몸짓으로 액정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수신 거부를 할까 하다,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혁이 전화한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A사와 트러블이 난 공사는 설계팀이 잘 이야기해서 마무리했고, 시와 진행하기로 한 시청 신축 공사 프로젝트 협의도 거의 막바지야. 담당자가 네가 보내준 설계도를 마음에 들어 했다. 됐냐.”
무혁의 전화를 받자마자 민석은 다다다 쏘아붙였다.
무혁이 뭐라 하기 전에 먼저 말해주고 빨리 전화를 끊는 게 상책임을 민석은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무혁에게 시달린 덕분이었다.
-노을 서점 리모델링 기간 앞당기기로 했다.
그러나 예상을 깬 무혁의 말에 민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앞당기다니.”
-4월 22일까지.
“……?”
뚝.
민석이 뭐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민석은 휴대전화 액정을 보며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
* * *
한편 전화를 끊은 무혁은 노을 서점 미니어처 모형을 손바닥 위에 두고 이리저리 다각도로 돌려보았다.
재희가 사무실에 처음 놀러 왔을 때 실패작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노을 서점 리모델링을 계획하면서 만들어 두었던 모형이었다.
무혁이 미니어처를 책상에 내려놓고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다락방이었다.
‘행복했다라.’
한참을 노을 서점 미니어처 모형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무혁이 눈을 감았다.
문득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재희가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었다.
“저기…… 인제 그만 얼굴 보여도 되지 않아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노을 서점의 묵은 내음, 그리고 책장 너머로 느껴지는 작은 기척이 더없이 편안한 그런 날. 잠시 대화가 끊겼어도 어색하지 않고 더없이 편안한 겨울의 어느 날.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고 했었지.’
자신의 거절에 재희는 다행히 한발 물러섰다.
당시의 무혁은 웃을 줄 몰랐다.
아버지인 강진마저도 나중에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면 가끔 웃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훈계하기도 했었다.
재희는 비밀 친구인 자신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희는 시시콜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무혁은 다정한 사람 같다고 몇 번씩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무혁은 그런 재희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재희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굴도, 나이도 모른 채로 그 이미지대로 남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편안한 관계마저 망가질까 봐, 걱정했었던 듯도 하다.
함께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비밀 친구임을 밝히지 않은 이유 역시 단순했다.
어디까지나 힘들었을 그 겨울을 떠올리며 재희 스스로 말을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게 재희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노을 서점 앞에서 재희를 만나기 전까지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나의 오판이었을지도.’
노을 서점 리모델링 현황을 보기 위해 짬을 내어 갔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온 무혁은 그날따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노을 서점 앞에서 머물렀었다.
그리고 재희를 만났다.
재희와 만나서 놀란 것도 잠시뿐이었다.
무혁은 재희가 노을 서점에 대해, 그리고 비밀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었다. 재희가 그때 괴로웠다고 말했다면, 더 말하지 못하게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재희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행복했어요. 눈물 나도록.”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전 돌아갈 거예요. 너무 행복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우습게도 무혁은 그동안 갈팡질팡했던 마음을 단단하게 굳혔다.
이미 시작된 서점의 리모델링이 완료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래도, 무혁은 노을 서점의 오픈 시기를 겨울쯤으로 계획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재희와 처음 만난 계절이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비밀 친구였다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노을 서점을 다시 재희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재희가 노을 서점을 다시 찾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노을 서점은 항상 그래왔듯 그 자리에 있을 거니까.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때겠지.’
노을 서점 미니어처 모형을 보는 무혁의 눈이 깊어졌다.
* * *
“아주머니. 저 아침은 간단히 할게요. 샐러드와 커피만 줘요.”
이른 아침의 평창동.
혜란은 깔끔하게 꾸민 모습으로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혜란의 걸음이 멈췄다.
혜란은 굳게 닫혀있는 다른 방에 시선을 짧게 두었다가 이내 거둬들였다.
강진과 각방을 쓴 지 20년째.
강진이 언제 나가고 언제 들어오는지 혜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이 식사하는 횟수도 일 년에 5번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같은 집에서 살지만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
그게 현재 혜란과 강진의 관계였다.
혜란은 다이닝 룸 식탁에 앉아 강원댁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장독수 화백의 작품은 봄이라는 주제인데도 화풍이 좀 거친 편이었어요. 5월의 연회 콘셉트는 고풍스러움과 우아함이지만,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작품은 5월의 연회가 열리는 정원 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닿는 입구 쪽에 두는 건 어떨까 싶어요.”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야. 그런데 장독수 화백의 작품을 거기에 두자고?”
혜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금세 의견을 굽히며 물러설 거란 혜란의 예상과는 다르게 재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인 만큼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라윤 갤러리 정원에는 이미 수많은 꽃나무가 있어요. 그 속에 장독수 화백의 작품을 놓는다면 오히려 묻힐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오히려 오가는 손님들이 볼 수 있는 입구 쪽이 오히려 눈에 더 잘 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요. 입구 어디쯤에 작품을 둘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요.”
“생각해 봐.”
“네?”
재희가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으나, 혜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도 네가 지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네가 생각해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
혜란으로서는 다분히 충동적인 지시였다.
작품을 보고 와서 어떻게 전시할 건지 생각해 보라고 지시는 했지만, 재희에게 거는 기대는 적었다.
그 이후는 당연히 미술팀한테 지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콘셉트만 잡아놓은 라윤 갤러리 정원의 디자인 도안을 보고 재희는 5월의 연회 콘셉트에 대한 단점까지 지적했다.
“감히 내 앞에서 5월의 연회의 단점까지 지목해? 어이없어서 정말.”
혜란은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왜인지 그렇지 않았다.
“아침은 제대로 먹지 그래.”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혜란의 눈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당연히 출근했을 거라 생각했던 강진이 다이닝 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혜란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웬일이에요? 이 시간에 다 있고.”
“왜, 있으면 안 되나?”
“회사 일밖에 모르는 당신이 지금 이 시간에 있는 게 이상한 거죠.”
뾰족한 혜란의 대꾸에도 강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강진이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같이 식탁에 앉았는데, 같이 식사나 하지.”
“됐어요. 아침은 생각 없으니까.”
“요즘 5월의 연회 준비로 바쁘다며. 아침은 든든히 먹어야지.”
“언제부터 당신이 내 갤러리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아주머니. 여기 이 사람 것까지 부탁합니다.”
혜란은 제 의사는 들어보지도 않고 아침 준비를 부탁하는 강진을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침부터 목소리 높이며 싸우고 싶지 않았던 혜란은 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또 지루한 아침이 되겠구나, 싶었다.
속에 부담이 가지 않으면서도 제철인 음식으로 맛깔스럽게 차려진 아침상이 금세 차려졌다.
강진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우진이는 출근했나.”
“요즘 바쁜지 어제 안 들어왔어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 얻었다더니 거기서 잔 모양이죠.”
“그건 또 언제 얻었지.”
“당신 아들 일인데 관심 좀 가지지 그래요? 한참 됐어요.”
혜란의 뾰족한 말에 강진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인제 그만 KJ 건설로 들어왔으면 좋겠건만.”
“무혁이가 KJ 건설로 들어갔잖아요. 그거면 됐지, 뭘.”
“내 아들놈이니 응당 KJ 건설에 들어와야지.”
“이런 얘기할 거면 전 그만 일어나겠어요.”
고집스러운 강진의 말에 또 목소리 높이며 싸우게 될까 봐 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이닝 룸에서 나가려던 혜란의 걸음이 멈춘 건 이어진 강진의 말 때문이었다.
“5월의 연회 전에 무혁이랑 새아기를 불러서 같이 저녁 식사나 하지.”
“뭐요?”
“신혼여행 다녀온 날 말고는 아들 내외랑 식사한 적 없잖나. 우진이도 같이 불러서 식사나 한번 하지.”
“노망났어요?”
혜란의 타박에 강진이 시선을 올렸다.
혜란은 의자를 짚고 선 채로 강진을 보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회사 일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도 없는 당신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한 번쯤은 괜찮지 않나.”
강진의 말이 기가 막힌지 혜란이 헛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좋을 대로 해요. 그래서 언제 할 건데요.”
“조만간. 시간은 당신이 편한 날짜로 잡도록 해.”
“평일 저녁으로 잡으면 어쩌려고? 당신이 시간 낼 수나 있긴 해요?”
명백하게 비꼬는 말에도 강진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애들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티를 낼 건가.”
“뭐라고요?”
“결혼하고 지금까지 집안일을 등한시하는 건 참겠지만,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까지 티는 내지 말도록.”
“지금 내가 당신의 부하 직원으로 보여요?”
“무슨 의미지.”
“당신이 나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해요. 무엇보다 당신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까 웃기네요.”
“여보.”
“가정을 등한시 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요.”
강진이 대꾸하지 않자, 혜란은 더 화가 났다.
벽보고 대화하는 것 같았다.
“그만하죠. 날은 내가 알아서 잡을 테니 나중에 군소리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한 혜란이 미련 없이 다이닝 룸에서 나갔다.
손도 대지 않은 혜란의 그릇을 보던 강진은 이내 시선을 거둬들이고 식사를 마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