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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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노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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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노을 서점
2022.04.25.
“장독수 화백의 작업실에 좀 다녀와야겠다.”
장독수 화백은 90대 화가였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장독수 화백은 혜란의 어머니가 관장이었던 시절부터 라윤 갤러리와 인연이 깊었다.
그리고 이번 5월의 연회에서 장독수 화백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기도 했다.
“이번에 작품을 의뢰했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그러니 네가 가서 작업의 진척을 좀 보고 와.”
“제가요?”
“그래. 장독수 화백의 작품은 다 좋은데 화풍이 특이해서 정원에 배치하기 힘든 게 단점이기도 해. 네가 직접 보고 와서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 생각해 오도록 하렴.”
디자인팀이 따로 있는데도 굳이 자신을 시키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재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다녀와.”
재희가 나가자 혜란은 한 비서가 올린 보고서를 다시 한번 살폈다.
모임이 끝난 후 혜란은 직접 이명규 옹의 동생을 찾아가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재희의 말대로 박명주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위작이었고, 혜란이 가지고 있는 그림이 진품이었다.
재희는 이명규 옹의 작업이 끝내길 기다렸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그때 딱 한 번 본 그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쉽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번에 진품 여부를 감별한 재희의 눈썰미에 위작을 그린 이명규 옹의 동생조차 감탄을 했었다.
“우연이겠지.”
그래, 우연이겠지.
그런데도 혜란은 평소라면 디자인팀의 팀장을 보냈을 외근 업무를 재희에게 맡겼다.
“내 얼굴에 먹칠하기만 해봐.”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혜란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잘해오면 다행이고, 못해오면 애당초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 별로 실망할 것도 없었다.
* * *
“여기서 이쪽으로 가야 하나.”
재희는 지도 앱을 살펴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세월을 인 키 작은 낡은 건물이 즐비했다. 조금 지저분하고 낡지만, 오히려 예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청계천의 거리.
“오랜만이네.”
노을 서점이 자리하고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재희는 노을 서점에 잠시 들러 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아직까지도 노을 서점은 다시 문을 열지 않는다고 들었다. 주인이 바뀐 지 오래고 가끔 노을 서점 안에서 뭔가 하는지 불이 켜져 있다고 하지만, 정식 영업은 하지 않는 듯했다.
‘돌아갈 때 잠시 봐도 되겠지.’
비록 안에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건물 외관이라도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노을 서점에 들를 생각에 재희의 걸음이 빨라졌다.
“여긴가?”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골목 끝에 세워진 작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간판도 없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건물.
명망 높은 화가의 작업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낡고 초라했다. 제대로 된 잠금장치도 없는 문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재희는 손때가 묻어서 얼룩덜룩한 손잡이를 잡았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던 건지 문을 부드럽게 열렸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넓은 내부에 세워진 아치형의 벽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저 공간을 나누는 용도인 듯한 아치형의 벽 외에는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주변 곳곳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갖가지 물건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벽돌 곳곳에 베인 묵은 종이 냄새와 물감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재학 시절 늘 맡았던 추억의 냄새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에 재희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왠지 친근한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아치형 벽 안쪽에서 달그락, 작은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라윤 갤러리에서 나왔는데요.”
건물에서는 재희의 작은 목소리마저도 깊게 울려 퍼졌다.
“라윤 갤러리 말인가.”
곧 아치형 벽 반대편에서 작업용 앞치마를 걸친 흰머리가 성성한 할머니 한 명이 나왔다.
인상이 강렬한 할머니였는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손에는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도 혜란이 말했던 장독수 화백인 듯했다.
이름만 들었을 땐 분명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나오자 재희는 내심 당황했다.
9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장독수 화백은 재희를 훑어보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안녕하세요. 신재희라고 합니다. 라윤 갤러리에서 나왔습니다. 저, 혹시 장독수 화백 되실까요.”
조심스러운 재희의 물음에 장독수가 하하, 웃었다.
“왜,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가 나와서 놀랐나?”
인상만큼이나 강한 말투에 재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불쾌해할 거란 예상과 달리 장독수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솔직하네. 괜찮아요. 괜찮아. 이름이 이렇다 보니 오해를 많이 받았거든. 자, 이거 받아요.”
장독수가 앞치마 주머니를 아무렇게나 뒤져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확인한 재희가 슬며시 웃으며 방문 목적을 말했다.
“관장님께서 5월의 연회에 장식할 작품의 진척을 보고 오라고 하셔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지간히 기한 내에 못 맞출까 봐 초조한가 보구만. 이리 독촉하러 직원까지 보낸 거 보면.”
장독주 화백이 호탕하게 웃자, 재희의 귓불이 붉어졌다.
“그게 아니라…….”
“걱정 말게나. 거의 완성 단계이니 말이네. 한 두세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잠시 나가서 주변을 구경하고 오게나.”
“괜찮습니다.”
재희가 고개를 젓자 장독수 화백이 하하, 웃었다.
“난 누가 있으면 신경 쓰여서 작업 못 해서 그러네. 그 까탈스럽고 예민한 김 관장 아래에서 일하기 고단할 텐데 나가서 좀 쉬다 오시게. 마침 점심 먹을 시간 아닌가.”
“그럼 두세 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작업실에서 기다리는 게 더 민폐라 판단한 재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나갔다 오기로 했다.
재희가 나가자 장독수 화백이 껄껄 웃으며 다시 작업실로 들어갔다.
5월의 연회는 매년 열렸지만, 혜란은 언제나 완벽하길 바랐고 그만큼 5월의 연회를 장식할 장식품이나 작품 진행 상황을 확인할 때는 팀장급인 사람을 보내왔다.
그리고 디자인팀의 팀장은 장독수 화백을 담당했다.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장독수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니, 조금은 마음은 연 모양이지.”
* * *
다시 큰길로 나온 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장독수 화백의 말대로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조금만 걸을까.”
별로 배고프지 않았던 재희는 이따 가 보기로 마음먹었던 노을 서점에 들르기로 했다.
입시 미술을 하면서, 노을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노을 서점이 다른 이에게 매각이 되면서, 그리고 비밀 친구와 그렇게 헤어진 뒤로 잘 가지 못했던 노을 서점이었다.
그래도 노을 서점은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을 품은 장소였기에 재희는 종종 노을 서점에 몇 번 왔었다.
노을 서점에 갈 때마다 재희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혹시라도 비밀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노을 서점이 다시 문을 열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비록 그 희망은 노을 서점 입구에 세워진 외부인 출입 금지 줄을 보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 후로 거의 몇 년 만에 가게 된 노을 서점.
‘많이 변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재희는 부디 그대로이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지잉-
가방에 넣어놨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희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딱 한 명.
발신인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재희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무혁 씨.”
-식사했습니까.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무혁은 마치 뻐꾸기 시계처럼 정해진 시각에 전화했다.
“이제 막 먹으려구요.”
-뭐 먹을 예정입니까.
“아직 생각 중이에요.”
-든든하게 드십시오.
“무혁 씨도요. 요즘 바쁜데 특히 잘 드셔야 해요.”
무혁의 어투는 딱딱했지만, 재희를 걱정하는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재희는 바로 앞에 무혁이 있는 것처럼 한껏 애정 어린 눈으로 웃었다.
하루 중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무혁은 알까.
재희는 이 몇 분의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는 걸.
“지금 사무실이에요?”
-외근 나왔습니다.
여전히 무혁의 대답은 짧았다.
결혼 전에는 그런 대답에 민망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동안 무혁과 살면서 재희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 언제 들어와요?”
-좀 늦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탓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에 재희의 기분도 살랑살랑 흔들린 건.
그리고 평소라면 겨우 용기 내어야 할 수 있는 말을 하게 된 건.
“그냥…… 보고 싶어서요.”
재희는 제가 내뱉고서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지만,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무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휴대전화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에 재희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조심스럽게 무혁을 불렀다.
“무혁 씨?”
한참의 침묵 뒤, 휴대전화 너머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합니다.
“…….”
난데없이 무혁에게 고백받은 재희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가감 없는 남자의 투박한 고백이 그 어느 멋스러운 말보다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무혁의 진실된 마음이 버거울 정도로 피부에 와닿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재희 씨.
“…….”
-사랑합니다.
남자의 진중하면서도 뜨거운 목소리가 꿀처럼 귓가에 흐른다.
너무 달아서 얼얼할 정도로.
“…… 저도요.”
재희는 짧게 대답하곤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고 나서 아차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혁에게 다시 전화가 오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다시 휴대전화가 울리지는 않았다.
항상 무혁의 전화를 기다리던 재희였지만, 지금만큼은 무혁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곤란할 터였다.
‘더워.’
재희는 조금은 걸음을 빨리하여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조금 잊을 만하면 무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어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여긴.”
하염없이 걷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가 보였다.
바로 노을 서점으로 들어서는 골목 입구였다.
괴로웠던 10대 시절 큰 위안이 되었던 노을 서점.
가만히 책장에 기대앉아 있다 보면 노을 서점의 소소한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묵은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창을 투과해 들어온 빛무리 속에 떠다니는 먼지가 마치 요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해가 질 때쯤이면 서점에 스며들어온 노을이 공간을 가득 메우곤 했는데, 마치 황금빛 보리밭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겨울이면 낡은 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정겨웠고, 보글보글 끓는 양은 주전자가 주는 훈기가 따뜻했다.
책장에 기대어 앉아 서점 할아버지가 건네준 따뜻한 우유가 담긴 낡은 컵을 잡았을 때의 감촉도 생생하다.
‘고요’와 ‘적막’, 그리고 ‘예스러움’이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한지 알게 해준 노을 서점.
낡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노을 서점에서 만난 비밀 친구가 있었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했던 노을 서점.
‘무혁 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의 소중한 추억을, 소중한 장소를 무혁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무혁과 함께 나란히 서서 책을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던 재희의 걸음이 별안간 뚝 멈췄다.
“무혁 씨……?”
노을 서점 앞에 무혁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