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부부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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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부부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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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부부싸움
2022.04.14.
“인제 그만 해요. 우리.”
잔인한 말을 내뱉은 아내의 입술은 아찔할 정도로 고왔고, 목소리는 미치도록 부드러웠으며, 제 볼을 감싼 손은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무혁은 잠깐 반응하지 못했다.
무혁은 굳은 채 제 볼을 감싸고 잔인한 말을 내뱉고 있는 재희를 묵묵히 응시했다.
평소보다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방이 어두컴컴해서인지 재희는 눈치채지 못했다.
“……진심입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혁이 물었다.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지만, 재희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무혁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목덜미에 힘줄이 솟았다.
“왜입니까.”
속에서 끓어오르는 격통과 다르게 무혁의 표정은 딱딱했고 목소리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인제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어머니입니까.”
“네?”
“어머니가 시켰습니까.”
“그게 무슨……!”
재희의 시선이 닿는 곳이 무혁의 얼굴에서 천장으로 뒤바뀌었다.
등에 닿은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무혁이 재희의 옆을 손으로 짚으며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재희는 제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는 격렬한 감정이 따갑게 피부에 박힌다.
순간, 재희는 커다란 짐승을 바로 앞에 둔 듯한 섬찟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말씀해 보십시오.”
“무혁 씨.”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재희 씨를 괴롭히고 있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그만하자는 소리가 나옵니까.”
재희는 무혁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혁은 인제 그만하자는 말의 의미를 헤어지자는 뜻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
힐끗, 재희의 시선이 제 얼굴 옆을 짚고 있는 무혁의 손으로 향했다.
시트를 꽉 움켜쥔 그의 손등에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억지로 참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듯 힘줄이 위협적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무혁 씨.”
재희는 팔을 뻗어 보드랍게 무혁의 뺨을 감쌌다.
그러나 무혁은 반응이 없었다.
예의 격한 감정을 그대로 내비치며 재희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게 아니에요. 인제 아침 식사 같이하는 것도, 저를 데려다 주는 것도 그만하자는 소리예요.”
“…….”
“무혁 씨는 너무 바쁜데 제 욕심만 낸 것 같아서요. 출근은 이 실장님도 계시고, 아침 식사야 저 혼자 해도 상관없어요. 그 시간에 무혁 씨가 조금이라도 더 잤으면 좋겠어요.”
“난 괜찮습니다.”
“무혁 씨.”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재희 씨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해를 풀어주었지만, 무혁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지금 재희가 하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무혁 씨, 지금 무리하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 전보다 퇴근 시간도 늦고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재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혁 씨. 저 요즘 무혁 씨가 퇴근을 언제 하는지 몰라요.”
“…….”
“주말에도 무혁 씨는 출근을 했어요. 그리고 그때도 퇴근이 늦었잖아요.”
무혁이 너무 바빴던 탓에 주말에도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식사 때뿐이었다.
주말에 무혁이 출근하고 나면 재희는 외주 작업을 하거나, 희수를 만나거나, 아니면 경자와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주말을 보냈다.
밤엔 무혁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는데, 그는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었다. 그것도 그나마 주말이라서 빨리 귀가한 거였다.
“지금도 몇 시인 줄 알아요? 새벽 4시예요. 무혁 씨가 무리하고 있는 게 이렇게 보이는데 제 욕심만 차릴 수 없어요. 전 무혁 씨가 좀 더 쉬었으면 좋겠어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닙니다.”
“신경 쓰여요! 왜 매사 무혁 씨 마음대로 하려고 해요?”
무혁의 한결같은 반응에 재희는 순간 울컥해서 목소리를 조금 높여버렸다.
재희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어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재희의 외침에 짧게 침묵하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 마음대로 했단 말입니까.”
“네! 마음대로 했어요.”
재희가 어깨를 밀어내자 무혁은 순순히 비켜주었다.
재희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이젠 제가 싫어요. 아침 식사 같이 안 해도 되고, 데려다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한테 안 찾아와도 되고요. 무혁 씨가 무리하는 모습, 그걸 지켜보는 게 더 힘들어요.”
“…….”
“그러니까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요?”
강진은 무혁이 이끌고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업은 곧 끝난다고 했다.
무혁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것이 없으니, 재희는 막연히 그가 바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아침 식사를 함께 하거나 라윤 갤러리에 데려다주는 건 한 번도 거른 적이 없기에 그 정도 시간 여유는 있을 거라고, 그렇게 바보같이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자신을 위해 기꺼이 없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함께해주는 무혁이 눈물 나도록 고맙고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고작 저를 위해서 이렇게 무리해서.
안방에 침묵이 깔렸다.
무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재희를 응시했다.
싸늘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무혁이 입을 열었다.
“내일 이야기합시다.”
“…….”
“오늘은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무혁이 욕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리자, 재희는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화를 내버렸다.
그것도 막 일하고 온 피곤한 무혁을 붙잡고.
‘이게 아닌데.’
무혁이 씻고 나오면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되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하는 부부싸움.
그 집에서처럼 저만 참고 넘어가면 되었다.
그럼 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랬는데 순간 재희는 무혁에게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이 말만 되풀이하는 무혁에게 순간 화가 나서.
‘무혁 씨도 화났겠지.’
재희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혁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샤워를 마친 무혁이 안방에 들어오자, 재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그를 볼 낯이 없었다.
“뭐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덤덤한 무혁의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무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전혀 화가 난 기색도 없었고 불쾌한 기색도 없었다.
무혁은 대충 말린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앗!”
눈치를 슬슬 보며 머뭇머뭇하던 재희는 무혁이 제 손목을 잡아당기자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재희가 반항할 새도 없이 풀썩 눕자 무혁은 낮은 한숨을 흘리며 그녀를 제 품에 가두었다.
보드랍고 익숙한 재희의 향기에 피로가 녹는 기분을 느끼며 무혁은 눈을 감았다.
“무혁 씨. 저기…….”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깐 미안해요.”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
“재희 씨 생각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자고 내일 아침에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말을 마친 무혁은 곧 잠들어 버린 듯 고른 숨을 내쉬었다.
재희는 금세 깊게 잠든 무혁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 증명하듯 피부가 푸석하고 까칠했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무혁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하고 화가 났다.
“미안해요. 무혁 씨.”
재희는 잠든 그에게 사과를 하며 그의 까슬한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재희가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첫 부부싸움과 무혁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 재희는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다.
* * *
결국,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재희는 조금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뜨니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놀라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던 재희는 문득 허전한 느낌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옆자리로 옮겼다.
무혁은 먼저 일어난 듯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재희는 한숨을 삼켰다.
어제 피곤한 무혁을 붙들고 화를 낸 게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이따 무혁에게 전화나 메시지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재희는 서둘러 씻고 나왔다.
“일어났습니까.”
“무혁 씨?”
무혁이 다이닝 룸에서 태블릿 PC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참 전에 출근한 줄 알았던 그가 다이닝 룸에 앉아있자, 재희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혁이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놀라 서 있는 재희를 자리에 앉혔다.
“전 이미 식사를 마쳤습니다. 천천히 드시고 출근 준비하십시오.”
그러곤 무혁이 드레스 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무혁 씨.”
무혁은 드레스 룸까지 따라온 재희를 돌아봤다.
재희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머뭇했다.
무혁은 그런 재희를 응시하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재희가 입을 열었다.
“무혁 씨. 어젯밤엔…….”
“타이, 매주십시오.”
무혁은 타이를 꺼내 재희에게 내밀었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타이를 받아들었다.
무혁이 익숙하게 상체를 재희의 시선에 맞춰서 숙였다.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재희가 머뭇머뭇하며 타이를 매어주었다.
“……!”
타이를 끝까지 매어주자 와락, 재희는 순식간에 무혁의 품에 거칠게 안겼다.
상황파악이 되기도 전에 재희의 입술은 뜨거운 입술에 먹혀들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뜨거운 물체가 샘물을 찾듯 헤집으며 탐하기 시작했다.
가늘게 새어 나오는 숨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무혁은 공격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재희의 여린 몸을 제 품에 꽉 끌어안고 마치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처럼 무혁은 한참이나 탐하고 또 탐하였다.
평소보다 더 거칠고 집착 섞인 키스에 짜릿한 쾌락과 함께 두려움이 솟구쳤다.
처음으로 이 남자가 위험하다는 걸 인지한 재희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다, 그만 발이 엉켜 풀썩 푹신한 쿠션 위로 쓰러졌다.
“무혁……!”
묵직한 무게감이 실린 거대한 몸이 쓰러진 재희 위로 겹쳐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쪽 팔은 재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제게 밀착시키고, 다른 한 손은 깍지를 껴서 단단히 옭아매었다.
재희의 입술이 다시금 무혁에게 먹혀들었다.
금세 드레스 룸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을 헤집는 거칠지만 달콤한 감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퍼붓는 뜨거운 공세에 재희는 그만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온몸의 힘이 풀리며 재희는 속절없이 남편의 키스에 응했다.
버거울 정도로 탐하고 또 탐하던 무혁의 입술이 이내 떨어져 나갔다. 입속을 꽉 채우던 달콤한 감각이 빠져나가자 움찔, 눈을 감고 있던 재희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
눈을 뜨고 제 몸을 가두고 있는 남편을 올려다보자, 드물게 가쁜 숨을 내뱉고 있는 무혁이 보였다.
무혁은 고개를 숙여 재희의 귓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움찔, 재희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무혁을 피하지 않았다.
무혁은 재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이제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를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엔 재희가 힘들까 봐 거부했던 아침 식사였다.
그러나 이젠 무혁이 원하게 되었다. 식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매일 퇴근하고 잠든 재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시간이 무혁에겐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 짧은 몇십 분의 시간이 살인적으로 휘몰아치는 스케쥴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의 원천이었다.
“제 마음대로 한다고 욕해도 좋습니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는 것. 이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진심이 담긴 묵직한 목소리.
재희를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그 시간에 좀 더 잔다면…….”
“재희 씨랑 아침 식사를 못 하는 것과 라윤 갤러리에 데려다 주지 못하는 것. 그게 저에겐 더 가혹한 일입니다.”
“제 욕심인 줄 알았어요. 제 욕심에 맞춰 주느라 무혁 씨가 무리하는 줄 알았어요.”
“제 욕심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재희 씨와 있고 싶은 내 욕심. 혹시 싫었습니까.”
“아니에요! 절대.”
재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재희를 보며 무혁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무혁의 미소에 재희는 그만 시선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무혁은 묵묵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러곤 볼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옷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같이 출근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무혁이 재킷을 챙겨 들며 몸을 일으켰다.
달칵, 드레스 룸 문이 닫히자 혼자 남은 재희는 양손으로 팔을 감쌌다.
강한 키스의 여운과 진중하지만 무거운 그의 목소리가 내내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가슴에 맴돈다.
무혁도 아침 식사를 원한다고 한다.
재희도 원했다.
무혁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를.
그런 무혁에게 강진의 말을 듣고 그를 위한답시고 한 말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자 재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