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우리 그만해요. (47/128)


#47화 우리 그만해요.
2022.04.11.


퍽!

라윤 갤러리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유라의 손에 의해 한정판으로 구입한 값비싼 가방이 벽에 인정사정없이 던져졌다.

안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유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 몇 개를 벽에 집어 던지며 화풀이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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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정말!”

유라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곱게 다듬어진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모임이 파하기 전 혜란의 태도가 거슬렸다.

혜란과 박명주의 싸움을 뒤에서 구경하던 유라는 갑자기 끼어든 재희가 안 그래도 거슬렸다.

싸움 구경을 즐기고 있었던 유라에게 재희는 방해꾼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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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괜찮으세요?”

 
분위기가 풀어지자 유라는 친근하게 혜란의 팔짱을 끼며 걱정하는 척 물었다.

유라가 아는 혜란이라면, 당연히 ‘어머나. 유라야. 내 걱정해 주는 거니?’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혜란의 반응은 유라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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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구나. 유라야. 지금은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평소와 다름없는 친근한 웃음과 목소리로 말하는 혜란이었지만, 유라는 눈치챌 수 있었다.

혜란은 지금 유라조차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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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 자존심에 그렇게 미워하는 그 여자에게 단번에 마음 열지는 않을 거야.”

자칫하면 더 험악하게 흘러갈 뻔한 상황을 재희가 갑자기 나와서 수습했다.

박명주에게 모욕당한 혜란은 그 자리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분명 마음이 복잡했을 터였다.

상황을 수습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라윤 갤러리의 이름을 지켜준 게 다름 아닌 눈엣가시 같은 재희였으니.

이대로 가다간 혜란이 재희를 마음에 들어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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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 되기 전에 혜란의 호감을 다시 자신에게 모조리 돌려놔야 했다.

유라는 거울에 비친 험악한 표정을 한 자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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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교모임이 끝나고 며칠 동안 재희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그 일 이후 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재희 역시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재희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5월의 연회 준비에 집중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재희는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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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 씨. 오늘은 뭐 먹을 거예요.”

미경이 툭 내뱉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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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잉-

막 작성한 보고서를 저장하고 대답하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혁인가 싶어서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눈이 커졌다.

[아버님]

평소 재희가 연락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연락조차 없었던 강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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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잠시 중요한 전화가 있어서요. 전 따로 먹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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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미경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재희는 재빨리 휴대전화를 챙겨 들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최대한 담담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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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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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냐.

휴대전화 너머로 인사말을 건너뛴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바로 앞에 강진이 있는 것처럼 곧은 자세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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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지금부터 점심시간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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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점심 나와 함께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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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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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많이 뺏지 않겠다.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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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럼 어딘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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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10분 안에 도착할 예정이다. 라윤 갤러리 앞 소담이라는 한정식집에 네 이름으로 예약해 놨으니 가 있거라.

마치 재희의 거절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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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혜란과 다른 의미로 어려운 시아버지였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무혁과 함께 있을 때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강진을 단둘이 만난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러우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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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재희는 얼른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탕비실에서 나왔다.

* * *

강진의 말대로 소담은 재희의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직원이 안내한 방에 들어간 재희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묵묵히 강진을 기다렸다.

이윽고 직원이 강진의 도착을 알리며 문을 열어주자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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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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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느라 고생했다. 앉거라.”

강진의 딱딱한 목소리에 재희가 긴장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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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빠서 주문하고 기다릴 시간이 없다. 미리 주문해 뒀는데 가리는 게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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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가리는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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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해둔 듯 음식이 차례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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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들거라.”

강진의 권유에 재희는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간혹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겨우 밥 한 그릇을 비우고 후식이 나올 때쯤 강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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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결혼 생활은 할 만한가.”

마치 직원의 복지에 대해 묻는 듯한 어투였다.

재희는 마치 임원과 단둘이 면담하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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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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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둘이 잘 지내고 있다면 다행이다.”

딱딱하게 말하며 강진이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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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서 말하지 않겠다. 무혁이는 지금 KJ 건설에서 사활을 건 중동 초고층 빌딩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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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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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혁이에게 꽤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실패하면 무혁이의 위치는 위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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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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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대한 백화점 리모델링 사업도 같이하고 있어서 무혁이는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허튼 곳에 시간을 쓰면 안 된다.”

강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렴풋이 눈치챈 재희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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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이 요즘 네 출근길을 함께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 가끔 자리를 비운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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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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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네가 참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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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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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인 건 이해하나 신혼을 즐기는 건 잠시 미뤘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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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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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무혁이에게도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바쁜 일이 끝나면 그때 신혼을 즐겨도 늦지 않다.”

강진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묵묵히 말을 듣고 있는 재희를 응시했다.

무혁이 자발적으로 재희와 출근길을 함께하고, 가끔 보러 가기도 한다는 걸 강진은 알고 있었다.

얌전하고 제 주장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 같아서, 처음에 강진은 재희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웠다.

재희의 집안 배경은 아쉬우나 결국 무혁이 KJ 건설에 제 발로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딱히 큰 손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가 알던 무혁이 재희와 만난 뒤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공과 사는 철저하게 지키는 아들을 변하게 만든 며느리.

강진은 자신이 재희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처음으로 생각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재희의 어떤 면이 무혁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궁금증이 일자 강진은 늘 그랬던 대로 사업가로서 재희를 시험해 보고 있었다.

무혁이 안 하던 행동까지 하게 만드는 재량을 가지고 있다면, 강진은 재희가 다시 무혁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 짓는 그 성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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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우려는 잘 알겠습니다.”

빈 그릇을 응시하던 재희가 다소 메마른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재희의 표정은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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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가 바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부족하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희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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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더 이상 아버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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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강진은 올곧은 눈으로 저를 보는 재희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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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선한 눈을 가지고 있군.’

집에서 가끔 혜란이 그 여우 같은 게 무혁을 조종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기업 운영에만 관심 있는 강진은 그 소리를 흘려넘겼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마주 보니 겉으론 여려 보이지만 선하고 올곧은 눈동자가 퍽 마음에 들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움츠려 있던 때와 다른 태도에 강진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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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

일부러 틈을 내서 왔지만,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 * *

새벽 2시.

재희는 하품을 참으며 하염없이 무혁을 기다렸다.

강진과 헤어진 뒤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줄곧 강진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무혁이 바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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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재희는 무혁이 몇 시에 귀가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늘 기다리다가 먼저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고, 눈을 떠보면 무혁이 곁에 있었으니까.

매일 새벽에 퇴근하면서도 아침 식사와 출근은 반드시 같이하는 무혁이었다.

무혁은 결혼 전과 똑같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하고, 가끔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었다.

무혁이 괜찮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믿었다.

어쩌면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외면한 거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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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좋았으니까.’

짧지만 무혁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있는 시간은 행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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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나만 생각한 거야.’

재희는 인정했다.

자신의 욕심이 과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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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무혁이 보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재희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눈을 감고 언제 올지 모르는 무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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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지났을까.

깜박 잠이 든 재희는 몸이 허공에 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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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잠이 서린 시야에 맨 처음 들어온 건 자신을 안아 들고 있는 무혁이었다.

막 들어온 듯 그의 옷에서는 새벽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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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요?”

잠기운이 묻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무혁이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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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서 자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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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를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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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린다는 말 없었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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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걸 깜박했어요.”

재희는 평소처럼 무혁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바쁜 무혁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몇 번이나 내용을 쓰고 지우며 망설이던 재희는 끝내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결국, 강진이 한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재희는 언제 올지 모르는 무혁을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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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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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진심이었다.

퇴근한 무혁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잠시라도 무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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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습니까.”

평소와 다른 재희의 태도에 무혁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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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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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무혁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였다.

퇴근이라곤 하지만 무혁은 거의 철야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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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걸까.’

지금 씻고 잠든다 하더라도 무혁은 세 시간도 못 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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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 시간에 집에 들어와요?”

무혁의 건강이 걱정된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희를 침대에 내려둔 무혁은 갑갑한지 타이를 잡아당겼다.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무혁이 재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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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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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뒤늦게 재희는 무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재희는 미세한 차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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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피곤해하면서.’

결혼 전에도 눈가가 거뭇했어서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의 눈가는 여전히 거뭇했지만, 지금은 피로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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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그 말을 그대로 믿었어.’

무혁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무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진심이었으니까.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시간도, 저를 라윤 갤러리에 데려다주는 시간조차도 무혁은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무리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렇게 늦은 새벽에 퇴근을 하는 것이고.

재희는 마음이 아팠다.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에 무혁이 고생을 해서.

이젠 재희가 무혁을 힘들게 만드는 원인을 끊어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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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이제 괜찮아요.”

재희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무혁의 뺨을 보드랍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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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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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그만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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