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서리가 내린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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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리가 내린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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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리가 내린 아침
2022.04.07.
라윤 갤러리엔 여전히 부드러운 클래식 연주가 흐르고 있었으나, 부인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냉기가 흘렀다. 재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투는 소리가 확연하게 들려왔다.
“다시 말씀해 보세요.”
차갑게 말하는 혜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고,
“그러죠. 이 작품은 위작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아까 혜란을 통해 소개받은 J 갤러리의 관장인 박명주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혜란이 맞선을 중간에 가로채지 않았다면, 어쩌면 재희의 시어머니가 됐을지도 몰랐을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재희가 거듭 양해를 구하며 인파 사이를 파고들었다.
인파 사이를 비집고 나오자 대치하고 있는 혜란과 박명주가 보였다.
혜란은 냉랭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박명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반면 박명주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게 위작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진품은 우리 J 갤러리에 있으니까요.”
박명주의 말에 혜란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다이아몬드 알이 크게 박힌 반지를 낀 박명주가 입가를 가리며 훗,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작고하신 이명규 옹은 완성된 작품에 엠블럼을 새기기로 유명하죠. 그 엠블럼이 특이해서 구분하기도 쉽고, 또한 위작도 많죠.”
“그래서요?
“그중에서도 이명규 옹의 유작인 [서리가 내린 아침]은 모작이나 위작이 특히나 많기로 유명해요. 그리고 진품인 [서리가 내린 아침]은 우리 J 갤러리가 발품을 팔고 또 팔아 겨우 구입 했답니다. 작품보증서도 있죠. 그럼 여기 있는 작품이 위작이 아니면 뭐겠어요?”
혜란이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박 관장님 갤러리에 걸린 작품이 위작이겠죠.”
“뭐라구요?”
“이명규 옹이 작고하신 후 유족들끼리 재산 싸움이 일어났죠. 그 와중에 유작인 [서리가 내린 아침]이 사라졌어요. 다들 아실 거예요. 이명규 옹의 자식 중 한 명이 유작을 훔쳐서 해외에다 팔아버린 사건을.”
사회면에 기사까지 났던 사건이었다.
유작을 훔친 자식은 해외에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서리가 내린 아침]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렇게 [서리가 내린 아침]이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나 싶었다.
평소 이명규의 작품을 좋아했던 혜란은 인맥을 총동원해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운 좋게도 어느 허름한 갤러리에서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서리가 내린 아침]을 구할 수 있었다.
라윤 갤러리에 걸린 이 [서리가 내린 아침]이 진품임을 확신하는 혜란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힘들게 구한 작품이에요. 그러니 이 작품이 진품이에요.”
“그럼 작품보증서는 있나요?”
“몰래 갖다 판 작품에 보증서가 있을 리가 없죠.”
혜란의 말에 박명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하게 비웃는 웃음에도 혜란은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작품보증서도 없는데 이게 진품이라고 우기다니. 김 관장님. 내 아들 맞선 상대를 가로챈 그때처럼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군요.”
“뭐라고요?”
“뻔뻔하게 우긴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맞선 자리야 그래요, 뭐. 그렇다 쳐요. 오히려 김 관장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덕분에 내 아들은 더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했으니까.”
혜란은 박명주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맞선 자리를 중간에 가로챈 건 혜란으로선 뼈아픈 실책이었다.
당연히 맞선 상대를 거절하고 올 거라 생각한 무혁이 결혼하겠다고 하더니 불도저처럼 결혼을 밀어붙였다.
안 그래도 그 일을 후회 중이었는데 박명주가 아픈 부분을 제대로 건든 것이다.
박명주가 [서리가 내린 아침]을 곁눈질로 훑어보며 말했다.
“하지만 라윤 갤러리에 대한 자긍심이 높으신 분이 이렇게 위작을 가져다 두시다뇨.”
박명주가 동정 섞인 눈으로 혜란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긴. 이해해요. 위작이라도 가지고 싶으셨겠죠. 평소 이명규 옹의 작품을 좋아하셨으니까요.”
모욕을 받은 혜란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팔짱을 낀 혜란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세게 주먹 쥐었다.
‘어쩌지.’
상황을 지켜보던 재희가 머뭇거렸다.
박명주가 위작이라고 말하는 [서리가 내린 아침]이라면 재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윤 갤러리에 걸린 [서리가 내린 아침]은 단연코 위작이 아니었다.
재희가 갈등하는 사이 박명주는 굳은 혜란을 보며 속으로 통쾌해 했다.
한때 국내 최고의 갤러리라 불리던 J 갤러리는 어느 틈엔가 무시하던 라윤 갤러리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J 갤러리의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했던 라윤 갤러리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승승장구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의 심정이란.
지금까지 쌓여왔던 설욕을 이제야 풀 수 있게 되자 박명주는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박명주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서리가 내린 아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뭐랄까. 실망스럽네요. 이런 위작을 자랑스럽게 걸어두는 라윤 갤러리라니. 저라면 부끄러워서라도 걸어두지 못했을 거예요.”
이 자리에 나서도 되는 걸까. 주제넘은 짓은 아닐까, 고민하던 재희는 박명주의 말에 결심이 섰다. 짧은 시간 동안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혜란이 이 일에 얼마나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느꼈다.
재희 역시 혜란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모독당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인지 재희는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위작이 아니에요.”
작지만 분명한 재희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시선이 집중되자 재희는 당황스러웠지만, 치맛자락을 꾹 쥐며 자리를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혜란은 냉랭한 시선을 재희에게 던졌다.
감히 이 자리에 끼어든 재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티가 확연했다.
“위작이 아니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난데없이 끼어든 방해꾼에 기분이 상한 박명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재희는 얕게 심호흡을 한 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고하신 이명규 옹은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전공 교수님이셨어요.”
“그래서요?”
“취업추천서를 받기 위해 교수님 작업실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딱 한 번 이 작품을 봤었어요.”
“지금 딱 한 번 본 거로 위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설마?”
박명주가 비웃음을 흘렸다.
한때 탐이 난 며느릿감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아들에게 순종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제 KJ 그룹의 며느리가 된 이상 박명주가 재희를 예쁘게 봐 줄 이유는 없었다.
‘물러서지 마.’
재희는 끼어든 것에 후회가 됐지만, 스스로 다독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물러선다면 혜란은 물론, 자신도 우스운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거기다 진품이 위작이라 오명을 쓰는 건 이명규에 대한 모욕이었고, 말을 꺼낸 이상 끝은 맺어야 했다.
“교수님께서는 작업에 열중하실 땐 중간에 끊기는 걸 싫어하셨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적이 있었어요.”
허락을 받고 작업실에 들어갔지만, 이명규는 작품에 열중하느라 재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명규는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교수님이었지만, 국내외 명망 있는 화가이기도 했다.
재희는 괴팍한 성격과 다르게 햇살을 주제로 탄생하는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래서 재희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적어도 작품을 탄생시키는 그 숭고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이명규가 작업을 끝내며 엠블럼을 그릴 때 재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시다시피 교수님의 엠블럼은 유명해서 위작이 많이 나와요. 교수님은 그걸 평소에 싫어하셨고,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서리가 내린 아침]에 특이한 표식을 하셨어요.”
재희의 등 뒤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으셨어요? 표식이라니. 들은 적 있으세요?”
“저도 처음 듣는 소리예요.”
“엠블럼 말고도 뭐가 또 있단 거죠?”
재희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작품 앞으로 다가갔다.
재희는 혜란의 눈치를 살폈지만 의외로 혜란은 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저 해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혜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재희는 엠블럼이 새겨진 모퉁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엠블럼 위에 교수님의 사인이 들어가 있어요. 작품의 색과 비슷해서 돋보기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인이에요. 교수님의 사인도 특이해서 아마 아실 거예요.”
“한 비서. 돋보기 가져와 봐요.”
혜란의 말에 한 비서가 재빨리 돋보기를 가져왔다.
혜란이 돋보기로 엠블럼 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재희의 말대로 이명규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돋보기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흐릿한 사인이었다.
사인을 확인한 혜란이 박명주에게 돋보기를 넘겨주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흥. 사인은 무슨. 보나 마나 착각한 게 틀림없…….”
떨떠름한 얼굴로 돋보기를 들고 엠블럼을 살펴보던 박명주의 얼굴이 굳었다.
“이, 이럴 리가! 작품보증서가 없다잖아요. 전 분명 제값을 치르고 작품보증서까지 받았어요!”
부정하는 박명주에게 재희가 차분하게 어조도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평소 자식들 사이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셨어요. 분명 이 작품으로 싸움이 날 걸 우려하신 교수님은 동생에게 위작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그리고 진짜는 숨겨두셨죠. 교수님께서 작고하시자 아시는 것처럼 자식 중 한 분이 진짜 작품을 찾아내 해외에 몰래 팔았고요. 위작은 다른 자식분이 작품보증서까지 위조해 정식 경로를 통해 판매하셨어요.”
박명주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요? 정식 감정 의뢰하면 다 탄로 날 텐데요. 시어머니 감싸겠다고 앙큼한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때 위작을 그린 건 동생분이셨고, 그분이 모든 과정을 알고 계실 테니 직접 감정 의뢰하셔도 될 거예요.”
담담한 재희의 말에 박명주가 입을 다물었다.
반전된 상황에 주변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이라면 박 사모님의 갤러리에 있는 작품이 위작이네요.”
“이 작품으로 기사까지 나지 않았어요? 작고하신 이명규 옹의 유작이라고. 곧 이명규 옹의 작품 전시회 오픈이실 텐데 곤란하게 됐네요.”
박명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결국, 박명주는 그대로 도망치듯 라윤 갤러리에서 나가버렸다.
“소란스럽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마저 자리를 즐기시죠.”
혜란이 능숙하게 분위기를 환기하자 냉랭하던 공기가 다소 풀어졌다.
각자 다시 흩어지자 혜란은 재희에게 시선을 두었다.
시선이 쏠렸던 상황이 부담스러운지 재희의 안색이 창백했지만, 용케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떻게 알았니?”
“어머님.”
“이명규 옹도 설마 자식이 작품을 훔쳐서 해외에다 팔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셨을 거야. 그런데 넌 어떻게 이 작품이 진품인 걸 알았니?”
“그게…….”
이명규의 작업실에서 취업 추천서를 받기 위해 기다렸던 그 날.
이명규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린 재희를 발견하곤 물었다.
“지금까지 기다린 거냐.”
이명규는 방문을 허락한 것이 지금에서야 기억난 듯한 표정이었다. 홀린 듯이 [서리가 내린 아침]을 보던 재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업이 길어질 것 같으면 나가서 기다리지 않고. 앉을만한 곳도 없는데 계속 서 있었느냐.”
취업 추천서를 받기 위해 왔다는 학생의 방문을 허락한 건 대략 네 시간 전쯤.
작품에 열중하다 보니 까맣게 잊었었다.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품이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고 말았어요. 그뿐입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을 텐데, 잠시 여기서 쉬다 가거라.”
이명규는 담담하지만 진솔한 재희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작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권했다.
뜻밖의 이명규의 권함에 재희가 놀란 듯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이명규는 재희에게 취업 추천서를 써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었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마. 여기 보이느냐.”
“이건…….”
“내 사인이란다.”
이명규는 재희에게 진품에서만 볼 수 있는 포인트와 엠블럼 위에 새겨진 자신의 사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식 간의 불화를 걱정한 이명규가 동생에게 위작을 맡겼다는 사실도.
재희는 왜 이런 중요한 얘기를 자신에게 해주는 건지, 조심스레 물었다.
이명규는 웃어 보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넌 입이 무거울 것 같구나. 단지 그뿐이야.”
이명규는 작품을 보는 재희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다.
‘어쩌면 괴팍한 노인네의 변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 이명규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던 재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재희의 말이 끝나자 혜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이명규 옹이 그랬단 말이지.’
혜란은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재희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위작이나 걸어두는 라윤 갤러리라는 오명 쓸 뻔한 것을 재희가 구해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묘한 감정에 혜란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수고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거라.”
“하지만 아직…….”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러니 돌아가렴.”
혜란은 재희가 모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한 비서. 데려다 주고 와요.”
다른 곳으로 가버린 혜란을 망연한 얼굴로 보는 재희에게 한 비서가 난감한 얼굴로 다가왔다.
“작은 사모님.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 실장님을 따로 부르면 돼요.”
“그럼 여기 앞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한 번 더 거절하면 한 비서가 곤란해질 걸 염려한 재희가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에게 연락한 뒤 행사도우미에게서 가방을 받아들던 재희는 친근하게 혜란과 팔짱을 낀 유라를 발견했다.
혜란은 그런 유라에게 친근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저, 그냥 어릴 때부터 봐오던 사이라 그렇습니다.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한 비서가 서둘러 변명했으나, 재희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한 비서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재희는 휴대전화를 열었다.
화면이 켜지자, 두 시간 전에 무혁에게서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괜찮습니까.
짧지만 염려가 담긴 메시지.
재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표현은 적지만 항상 자신을 걱정해 주는 남자였다.
분명 이 메시지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보낸 메시지일 터였다.
그런 무혁에게 재희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걱정했는데 분위기도 좋았고 재미있었어요.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해서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전송을 하자마자 메시지에서 읽음 표시가 뜨며 무섭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무혁 씨]
항상 메시지를 보내고 나면 한참 뒤에나 연락이 오던 무혁이었다.
빠른 연락에 깜짝 놀란 재희는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네. 무혁 씨.”
-정말 아무 일 없습니까.
받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남자.
아주 잠깐 그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재희가 커다란 눈을 한번 깜박였다.
“네?”
-아무 일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조금 소란한 일이 있었지만, 별로 아무 일 없었어요.”
-어떤 일 말입니까.
“무혁 씨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에요.”
-재희 씨.
“그보다 바쁠 텐데 전화해도 괜찮아요?”
-말 돌리지 마십시오.
“…….”
-궁금합니다. 그 조금 소란했다는 일이 무엇인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재희는 유라에 대해서는 쏙 빼고 혜란과 박명주 사이의 일을 간추려서 말해주었다. 묵묵히 듣던 무혁이 말했다.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분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까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통화하던 재희의 눈꺼풀이 슬며시 들어 올려졌다.
-재희 씨?
“무혁 씨. 저 이 결혼 잘했다고 생각해요.”
-…….
처음엔 이상하고 무례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무혁이 없는 삶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무혁 씨는요?”
-처음 볼 때부터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재희 씨가 내 아내여서 좋습니다.
“응. 저도 그래요. 무혁 씨가 내 남편이라서 다행이에요.”
아직 감당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무혁이 있으니까. 무혁은 항상 자신에게 진심이니까.
완전히 어두워진 서울의 거리가 어지럽게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