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혜란의 목적2022.03.24.
관장실에 들어가자 혜란과 유라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재희가 들어서자 유라를 다정한 눈으로 보던 혜란의 눈빛이 곧장 차가워졌다. 라윤 갤러리에 들어온 뒤로 혜란은 철저히 재희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보는 혜란의 차가운 눈빛에 재희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다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거기 두세요.”
재희는 혜란이 가리킨 테이블에 홍차와 다과를 내려두었다. 유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유라가 재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제대로 못 했네요. 한유라라고 해요.”
유라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재희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여기서 유라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유라가 예쁘게 눈을 접으며 호감 가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그 웃음이 껄끄러웠지만, 재희는 감정을 숨기고 담담하게 인사했다.
“신재희라고 합니다.”
미간을 좁힌 채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혜란이 물었다.
“둘이 언제 만났니?”
“네. 아까…….”
재희가 대답하려던 찰나 유라가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요. 손에 디저트가 가득 들려 있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재희 씨가 도와주셨어요.”
“너도 참. 도착했다고 얘기했으면 한 비서라도 내려보냈을 텐데. 뭐 하러 무겁게 이런 걸 다 들고 왔어?”
혜란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유라가 작게 웃었다.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드리려고 했죠. 어머니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들고요.”
그 말에 혜란이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웃었다.
“어머나. 그런 계획이라면 성공했어. 정말 깜짝 놀랐지 뭐니. 그래도 앞으론 그러지 마. 피아노를 쳤던 이 귀한 손이 망가지면 어쩌려구.”
“어머니에게 드리는 건데, 더 무거운 걸 들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둘의 친근한 모습을 보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재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신재희 씨. 나가봐요.”
유라를 대할 때와 다른 사무적인 어조. 라윤 갤러리에선 철저히 직원으로 대하겠다고 말했던 혜란이었다. 그녀의 어조와 표정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재희가 관장실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둘의 대화가 귓가에 아프게 박혔다.
“그나저나 유 사모님은 잘 계시지?”
“물론이죠. 엄마도 요즘 모임에서 어머니를 잘 못 뵙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러게. 무혁이가 결혼한 뒤로 유 사모님도 통 못 뵈었구나. 아무래도 유 사모님한테 미안해서 말이지. 유라를 우리 무혁이한테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그래도 무혁 오빠가 좋은 짝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유 사모님은 너무 다정하시다니까. 유라 너한테도 미안해서 어쩌지.”
“어머니께서 저한테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어요.”
문을 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모조리 들은 재희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재희는 못 들은 척 서둘러 관장실 문을 닫았다. 관장실 앞에서 주저앉을 순 없어서 재희는 서둘러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
의도치 않게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했던 대화에서 알게 되었지만, 그걸 당사자를 통해서 듣게 되니 온몸에 피가 차게 식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혜란은 재희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유라를 며느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혜란은 숨기지 않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유라를 티 나게 아끼고 예뻐했다. 재희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혜란은 그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재희는 탕비실 문에 기대어 앉으며 두 손을 꼭 모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독이듯,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어머니 생각은 상관없어. 어쨌든 무혁 씨랑 결혼한 건 나니까. 괜찮아. 괜찮아.”
시어머니인 혜란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시아버지인 강진이 무관심해도 상관없었다. 혜란과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깨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무혁 씨가 있으니까.’
오직 무혁만 보고 결혼했으니 그 외적인 부분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할머니] 재희는 선반에 쟁반을 내려두고 전화가 끊기기 전에 얼른 받았다.
“네.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우리 손주사위에게 보약 잘 먹이고 있느냐.
안부 인사는커녕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할머니의 화법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재희는 한숨을 삼키며 할머니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네. 할머니 말씀대로 아침저녁으로 잘 챙겨주고 있어요.”
-그래. 그래야지.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흡족함이 서렸다.
-이번 23일에 와서 나머지 보약을 받아가거라.
“23일…… 이요?”
23일이면 친모와 남동생의 기일이자 재희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무혁과 저녁을 같이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할머니. 그날은 무혁 씨와 약속이 있어요.”
-약속?
“네. 무혁 씨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럼 낮에 와서 받아가면 될 일 아니냐.
“낮에는…….”
23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재희는 선뜻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직장 핑계를 댈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도 접었다. 첫 직장을 할머니에 의해 거의 강제로 퇴사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는 야근과 철야가 많다는 이유였지만, 결혼한 지금은 남편의 내조도 안 하고 직장을 다니냐며 불같이 화낼 할머니였다. 사돈댁이니 이전처럼 난장을 치지는 않으시겠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사정?
할머니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희수인지 개수인지, 걔 만난다고 설마 그러는 거냐? 친구에 미쳐서 네 어미 기일에 얼굴도 안 비치려고? 금수도 그러지 않는다!
“할머니.”
-아범이 더 이상 널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난 용납 못 한다. 네가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잔말 말고 한약이나 받아가!
재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겨버렸다.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던 찰나,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지친 표정으로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 * * KJ 그룹 본사 회장실. 강진은 딱딱한 목소리로 맞은편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무혁에게 말했다.
“요즘 출근 시간이 늦다고 들었다.”
“네.”
“중동 초고층 빌딩 사업은 중요한 프로젝트다. 밤낮으로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그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나.”
무혁은 강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평생 KJ 그룹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또 일하며 가정을 등한시한 아버지였다. 아들을 대할 때도 아버지로서의 면모보단 사업가적인 면모가 강했다. 지금도 일 분 일 초를 쓸데없는 데 허비하는 무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일은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모자라다. 더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도 너를 그 자리에 앉힐 때 반대하는 임원진은 많았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지 말아야 하고, 틈을 보여선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거래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잘 지킬 겁니다.”
강진은 약속 대신 거래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는 무혁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KJ 그룹 창업주이자 명예 회장이었던 아버지의 명령으로 무혁이 작은아버지를 찾아낸 건 좋았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빈틈없이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쥴 대로 살던 무혁이 갑자기 노을 서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진은 그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어쨌든 무혁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강진이 요구하는 기대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기 때문이었다. 다만, 강진은 궁금했다. 저 노을 서점이 어떤 곳이기에 무혁이 거의 살다시피 하는 걸까. 서점 할아버지라 불리는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강진은 일부러 무혁이 사들이려던 노을 서점을 중간에서 가로채 사들였다. 매사 무관심하고 감정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무혁이 노을 서점에 머무르는 이유가 궁금했고 그깟 낡은 서점에 목을 매는 이유도 궁금했다. 강진은 조용히 분노하는 무혁에게 제안했다. 소중히 여기는 걸 지키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일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 사업가로서 미래에 KJ 그룹을 이끌어갈 만한 역량이 되는지, 후계자에 적합한지 아들인 무혁을 시험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무혁은 유학을 간 뒤 강진조차 놀랄 정도로 성과를 냈다. 강진이 약속대로 노을 서점을 돌려주자마자 무혁은 KM 건축사 사무소를 차려서 나가버렸다. 강진이 극대노한 와중에 무혁이 갑자기 맞선을 보고 온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들의 기이한 행보에 강진과 혜란은 강하게 반대했다. 원래 둘이 마음에 두고 있던 며느리는 유라였다. 차근차근 무혁과 유라를 만나게 하려던 찰나, 무혁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결국, 강진은 무혁이 KJ 건설에 입사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혜란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무혁은 강진조차 흡족할 만큼 큰 성과를 내는 중이었다. 강진은 무혁의 말대로 사업 진행에 차질은 없으니 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강진이 무혁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즘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종종 있다지.”
무혁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새아기가 라윤 갤러리에 출근하고 있다는 건 네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리고 넌 새아기 출근을 도와주고 있고, 거기에 더해 간혹 보러 간다지.”
“…….”
“공과 사는 구분해라. 새아기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알겠지만, 너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부르신 거라면 시간 낭비하셨습니다.”
재희가 언급되자 무혁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일 분 일 초도 허비할 시간 없습니다.”
무혁이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강진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강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불쾌하다기보다는 흥미로움이었다. 강진은 상견례 자리에서 위축되어 있던 재희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진심인 모양이군.’
강진은 오늘 처음으로 며느리인 재희에 대해 궁금해졌다. * * * 무혁은 KJ 건설로 이동하면서 앞으로의 일정과 관련한 보고를 묵묵히 들었다.
“12시에 대한 백화점 한유석 사장님과의 점심이 있습니다. 2시에는 두바이 지사장과 화상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4시에는…….”
매일 아침마다 재희를 데려다주기 시작하면서 무혁의 하루는 전보다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출근 시간이 늦어진 만큼 할 일은 어마무시하게 쌓여 있었다. 대한 백화점 리모델링 사업과 중동 초고층 빌딩 사업에, 노을 서점 일까지. 하루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시기엔 체력적으로 무리이실 겁니다.”
처음으로 윤 비서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무혁이 체력이 좋고 워커홀릭이라도 일정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살인적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갑시다.”
무혁이 짧게 대답하며 태블릿 PC를 켰다.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보고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윤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무혁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윤 비서는 포기한 듯 말없이 약국에서 미리 사다 놓은 피로 회복제를 꺼냈다. 원래대로라면 좀 더 여유를 갖고 진행해도 될 일이었지만, 무혁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일정을 급박하게 잡은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 비서는 일정을 다시 한번 살폈다. 23일 19시. R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 이날 단 몇 시간의 저녁 시간을 비우기 위해 무리하는 무혁을 윤 비서는 이해할 듯 말 듯했다. * * * KJ 건설 상무실로 돌아온 무혁은 갑갑한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다음 일정까지 주어진 5분의 휴식. 윤 비서가 억지로 만들어낸 짧은 휴식 시간이었다. 무혁은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무혁 씨.
아침에도 들은 목소리지만 오랜만에 듣는 것처럼 그리운 느낌이었다. 무혁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띠어졌다.
“바쁩니까.”
-아니요. 마침 탕비실에 있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은 전화할 시간이 아닌데.
“잠깐 짬이 났습니다. 별일 없습니까.”
-아직 오전인걸요. 아무 일 없어요. 그보다 무혁 씨는요?
“저도 아무 일 없습니다.”
무혁은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재희에게 집중했다.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목소리. 별거 아닌 대화였지만, 어제오늘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는 기분이다. 그 짧은 5분이란 시간 동안 재희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혁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 * 무혁과 통화를 끝낸 재희의 안색은 밝아져 있었다. 기분이 엉망이었지만, 전화를 준 무혁 덕분에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금세 사르르 풀렸다.
[오늘 밤에 봐요.]
무혁의 일정 때문에 전화를 끊은 게 아쉬웠던 재희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무혁의 답장은 밤에나 올 것을 알기에 재희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탕비실에서 나왔다. 여전히 관장실에서 혜란과 유라가 나눈 대화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껄끄럽게 남아 있었고, 그런 와중에 걸려온 할머니의 전화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무혁과의 통화로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